1. 유형문화재

1) 화수루(花樹樓)
   창수면 갈천리 6번지에 있는 화수루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누각으로 1975년 12월 30일 자로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었으며, 건물은 숙종 2년(1676)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불에 전소되자 숙종 19년(1693)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전면에 “ㅡ”자형의 2층 누각(樓閣)을 두고 그 뒤로는 ㄷ자형의 단층건물을 세워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을 이룬다.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기와 집인데, 하부에는 어칸에만 양개판장문을 달아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상부의 평면은 중앙의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대청 뒤에는 퇴를 설치하여 좌측으로 올라오는 계단의 통로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계단은 통재의 나무를 사용하여 5단을 만들었다. 누와 단층집 지붕이 접하는 부분에는 목책을 설치하였으며, 건물은 5량가로 대량 위에 판재를 끼워 종량을 받게 하고 종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하였다. 공포는 화두아계(花斗牙系)이며, 천장은 대청 상부만 연등천장이고 온돌방에는 평천장 도배를 하였다. 누의 전면에는 판벽으로 처리하고 바라지창을 드렸으며, 온돌방 측면에는 각 칸마다 외짝의 띄살무늬창을 고창형(高窓形)으로 설치하였는데 머름은 두지 않았다.
누각은 뒤로는 ㄷ자형의 건물이 안마당을 에워싸고 자리잡고 있는데 누각의 좌측 온돌장 뒤로는 통래간과 3칸 규모의 부엌이 이어져 좌익사를 이루고 있으며, 부엌의 좌측에는 마구 1칸이 돌출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온돌방 2칸과 도장, 고방이 배치되어 있다. 고방의 전면에는 마루 1칸과 온돌방이 연접되어 우익사를 이루어 전체적으로는 ㄷ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17세기 말기에 건립된 건물로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지니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양승람」에 의하며 화수루는 충순위 권희언의 분전루라고 한다.(忠順衛 權希彦 墳前樓) 또한 매일 효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화수루라 하였다고 하며, 후손들이 모여 친목을 돈독히 하는 장소로 건립되었다고 한다.(日孝思之意曰 花樹樓 以爲後孫聚會 敦睦之所結構)

2) 장육사 대웅전(大雄殿)
장육사 대웅전은 창수면 갈천리 120번지에 있는 장육사의 중심 건물로 조선 초기 건축기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1979년 12월 18일자로 도지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기와 집이다. 막돌 쌓기한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는데 주상에는 외1출목의 중심포를 올렸다. 내부는 모두 통칸으로 처리하여 우물마루를 깐 7량가이다.
가구나 보아지는 형상, 천장 등에 있어서는 임난 이전의 고격(古格)인 수법을 보이고 있으나, 유독 공포만은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중수시에 교체된 것으로 짐작되어 진다. 또한 단청을 금단청으로 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색상이나 무늬가 장엄스럽고 거룩한데, 특히 사천장(斜天障)의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과 좌우벽의 보살상(菩薩像) 벽화(壁畵)는 매우 특이한 필법으로 우리나라 예술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단원류파의 신선도 등에 보이는 인물과 유사한 모습의 천의존상들이 사천장 하나하나에 구획을 두고 묘사되고 있는데,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있다. 대웅전에는 보물 제993호로 지정된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과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설에는 고려 공민왕 4년(1355)에 나옹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미상이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세종대왕대에 산불로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당우(堂宇)가 소실되었으나 1900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3) 영해 난고종가문서(蘭皐宗家文書)
난고종가문서는 영해 영양남씨 난고종가 소장의 전적·고문서 등이다. 문서 중에 「남종통기(南宗通記)」는 수약당 남제명(守約堂 南濟明)이 1668년 편집한 4권 2책의 필사본으로, 남씨세보(南氏世譜)에 관하여 집대성하였으며 여기에는 영락연간(永樂年間)의 호적도 등재되어 있다.
   특히 「보중취동성변문(譜中聚同姓辨文)」과 「신구보세계변의문(新舊譜世系辨疑文)」은 동성결혼 문제에 대하여 역사적 고찰을 한 것으로 조선 중기 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교지(敎旨)는 중종 2년(1507)의 남비금(南今)의 무과별시 급제에 관한 것이며, 소지(所志) 2건은 1581년과 1582년에 전부장 남광(前部將 南廣)이 도망노비의 후소생(後所生)에 대한 천적처리와 관련된 입안(立案)을 성급받기 위해 부사와 관찰사에게 올린 것이다.
또한 토지·노비매매문서와 분재기(分財記) 등은 16∼18세기 작성된 것으로 이 시기 양반들의 재산 소유실태 및 재산·제사 상속의 형태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4) 덕후루(德厚樓)
1987년 12월 29일에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34호로 지정된 덕후루는 창수면 수리 454번지에 위치하여 있다.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무의공 박의장(武毅公 朴毅長)의 재실(齋室)이다.
현재는 ㅁ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뒤쪽에 있던 건물로 인하여 日자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뒤에 있던 건물들이 도괴되어 철거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한다. 정면 7칸 규모의 누각으로, 구조로 보아 건립년대는 1700년대로 추정된다.
누의 하부는 어칸에 출입대문을 내고, 협칸과 차협칸은 정면에만 판벽을 막고 내부는 개방하여 수납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퇴간에는 누상의 온돌방에 불을 때기 위한 구들을 시설하였다. 누상에는 중앙의 5칸을 모두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꾸미고 양퇴간에는 온돌방을 설치하였는데, 대청의 안마당 쪽은 개방시켜 난간을 돌렸다. 대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운 후 첨자를 놓아 종도리를 받게 한 3량가이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주상에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으며 내부 쪽으로는 초각한 보아지를 끼웠다.
누하부(樓下部)에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집희암(集喜庵)이 연결되어 있다. 집희암(集喜庵)은 정면 중앙부 3칸이 통칸으로 된 온돌방으로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좌측은 마룻방, 우측은 규모가 큰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부엌의 부뚜막은 철거되었고 뒷쪽 구석에 디딜방아가 설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잡석축대를 높이 축조하고 정면에는 원주를 사용하여 위의를 갖추었으나, 주두에는 쇠서장식이 없는 소박한 굴도리 집이다.
옛날 덕후루(德厚樓) 앞쪽에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덕후루는 이 절과 관련이 있는 건물이 아닌가 추측이 되며 무의공 사후 기존 암자 건물을 점유하고 앞쪽에 덕후루를 추건하여 재실로 꾸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5) 영해 경수당종택(慶壽堂宗宅)
1997년 9월 29일 도지정 문화재 제297호로 지정된 경수당종택은 영해면 원구리 11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경수당 종택(慶壽堂 宗宅)은 임란(壬亂) 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兼 五衛將)을 역임한 경수당 박세순(慶壽堂 朴世淳, 1539∼1612)이 32세 때인 선조 3년(1570)에 99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나 중간에 우연한 실화로 현종 9년(1668)에 소실되었다가 숙종 39년(1713)에 현재의 규모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종택은 원구마을 안쪽의 평지에 북동향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담장이 틔어진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하여 정침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대청을 두었는데, 대청의 전면에는 일각문을 세워 출입하게 하였다.
대청의 후원에는 사당이 있었으나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후원만 조성되어 있다. 후원에는 경수당 향나무(기념물 제124호)가 보존되고 있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으로 중문간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도장과 마굿간을 두고, 우측으로는 안사랑방과 대청 2칸, 감실방을 연접시켰는데 마루의 우측칸과 감실방은 우익사에서 돌출되어 편날개집을 이루고 있다. 중문에 들어서면 3칸 폭의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하여 대청이 자리잡고 있다. 그 좌측으로는 도장방, 안방, 부엌을 연결시켜 좌익사가, 우측으로는 귀방, 통래간, 광, 대청채의 후원과 연결되는 문간, 중방이 연결되어 우익사가 있다. 대량 위에 다소 키가 큰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한 간결한 구조의 3량가이다.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 집으로 좌측간에 전후로 2칸의 대청방을 두고 우측칸은 모두 마루방으로 꾸몄는데, 대청과 대청방 사이에는 3분합과 2분합의 맹장지를 설치하였다. 대청의 3면에는 모두 궁널띄살문을 달았으며, 대청방의 3면에는 띄살문을 사용하였다. 주상에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다. 5량가인데 종도리 받침의 중대공은 포대공이며 종량상의 마룻대공은 파련형이다. 측면 상부에는 충량을 대들보에 걸치고 충량 상부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종택은 지역적, 시대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가옥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종가로서의 면모와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물 양식을 알아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지역적, 시대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건물이다.

 
 

2. 무형문화재

1) 영해별신(寧海別神) 굿 놀이

도지정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영해별신굿은 영해면 괴시리 158∼3번지의 송동숙(宋東淑)을 그 보유자로 하여 지정되어 있다. 별신굿은 과거부터 동해안 일대에 널리 행하여져 온 전통 무속의 하나로 일종의 축제성이 강한 굿이라 할 수 있다.
영해별신굿 보유자인 송동숙(宋東淑)은 온갖 조화술(造花術)에 능해 칼과 송곳, 노끈, 종이만 있으면 온갖 꽃을 만들어 내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송동숙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한다.
별신굿 놀이는 가무신(歌舞神)적 제의이다. 가정에서 거행하는 무제(巫祭)가 아니고 마을 공동으로 행하는 특별 제의라는 점과 제를 주관하는 무격(巫覡:사내무당)이 강신무(降神巫)나 독경무가 아닌 세습무(世襲巫)라는 점이 놀이의 특징이다.
다른 무제보다 굿거리수가 많으며, 장편의 서사가(敍事歌)가 풍부하며, 그 내용면에서 해학성, 그리고 각종의 민속문학을 보유하고 있어서 구연문학의 총체이자 미분화된 종합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굿에는 우주관, 영혼관, 내세관, 신화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가무연회를 펼쳐서 촌락민들에게 안식과 활력을 제공해 준다.
동해안 일대의 세습무 집단은 지역적으로 박용녀·신성남을 중심으로 하는 강릉·영양일대, 이금옥을 축으로 하는 삼척 해안 일대, 송동숙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 해안 일대, 김석출을 중심으로 하는 경남 동해안 일대의 4개 지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들은 4명의 주무(主巫)를 중심으로 하여 굿이 있을 때마다 일시적으로 집단을 조직하는 관계로 그 구성원은 각처에서 영입한다.
대개 별신굿은 3∼10년을 주기로 촌락 단위로 행해지며 시기는 지역에 따라 상이하나 주로 정월, 3월, 4월, 9월, 10월 등의 시기에 열린다.
별신굿의 굿판의 시행과정은 먼저 무녀가 제상을 향해 강신(降神), 청배(請拜), 축원(祝願) 등을 하면서 시작하고, 무가(巫歌)를 할 때에는 관중을 향한다. 그러나 이때도 재비(반주자)는 제단을 향하여 앉아서 반주를 한다.
무구(巫具)로는 장구, 북, 징, 메구(꾕과리) 등이며, 신기(神器)로는 작은 신도(神刀)와 신간(神杆)이 있다. 무복(巫服)은 쾌자와 장삼, 그리고 갓과 고깔 등이 있다. 제수(祭需)의 진설은 마을마다 차이가 있으며, 방법이나 종류는 일정한 규정이 없이 일상식(日常食)에 한 두가지의 찬이 더 있을 정도로 간편하다. 제일(祭日)이 결정되면 5∼7일전에 제주(祭主)를 선정하고 당 주변에 금줄을 친다. 제주는 당에 소지를 올리면서 굿에 대하여 고한 후 제일(祭日)까지 목욕재계를 통한 근신을 한다.
굿은 부정굿, 골메기청좌굿, 당맞이, 화해굿, 세존굿, 조상굿, 성주굿, 장군굿, 천왕굿, 심청굿, 놋동이굿, 손님굿, 계면굿, 용왕굿, 탈굿, 거리굿의 순서로 행해진다.

 
 

3. 민속자료

1) 갈천동 초가 까치구멍집
1975년 12월 20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된 초가까치구멍집은 화수루(花樹樓)를 수호하기 위하여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수루 부속건물이다. “까치구멍”이라 함은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지붕을 합각 처리하여 구멍을 내놓은 것을 말한다.
마루와 외양간 사이에 있는 두짝 널문을 들어서면 좁은 통로처럼 된 외양간에 이르는데 통로의 왼쪽은 마루로, 오른쪽은 외양간의 구유통에, 바로 들어가면 부엌에 이르게 된다. 안방은 마루를 통해서 출입하는데 부엌의 부뚜막과 접하여 있다.
안방 좌측에는 도장방을 두어 곡물을 갈무리 하였는데 안방에서만 드나들 수 있다. 사랑방도 마루에서 출입할 수 있지만 건물의 앞부분에 놓여져서 외부에서 바로 외여닫이 살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대게 우리나라의 북부형 겹집에서는 모든 아궁이가 건물 내부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집은 사랑방의 아궁이가 바깥인 앞 축대에 만들어져 있어 변화를 보이고 있다. 문간과 부뚜막 사이에는 좁은 간벽이 서 있는데 그 중간쯤에 구멍을 크게 내고 바닥을 넓게 하여 코굴을 만들어 불을 피우던 시설이 남아 있다. 방에도 실내용 코굴이 있었다고 하나 연기가 빠지던 그을음 흔적만 처마 밑에 조금 남아있는 상태이다. 부엌의 오른쪽 구석에는 물독을 바닥에 묻어 물을 채워 마실 물을 저장하였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그리고 둘레에만 막돌로 막은 토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웠는데 방 주위의 벽은 모두 토벽으로 막았다.
일반적으로 산골 겹집의 마루, 외양간, 부엌 등의 외벽은 널벽으로 막는 것이 상례이나 여기서는 마루와 외양간의 앞벽만 널벽으로 하고, 외양간의 측벽 및 부엌의 벽은 모두 토벽으로 처리하고 있다.
건물은 3량가의 간결한 구성이지만 용마루 양쪽끝의 아래에는 동자기둥에 십자로 중도리를 가로 걸쳐대어 측면 중도리처럼 만들고 측면 서까래를 얹어서 간소한 합각을 구성하였다.
방과 마루가 있는 부분은 도장방이 줄어들어 안방과의 사이벽이 좀 어긋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온돌중심형 겹집의 방들처럼 田자형으로 칸살이 잡혀있어, 강원도의 온돌중심형 겹집 평면에서 앞쪽의 방 1칸이 마루로 대체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북쪽지역의 온돌중심 주거문화와 남쪽의 마루중심 주거의 생활양식이 매우 깊게 절충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2) 영해 난고종가 정침(正寢)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된 난고종가정침은 진사 안분당 남길(安分堂 南佶, 1595∼1654)이 조선조 인조 2년(1624)에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은 정침과 정면3칸, 측면 2칸의 ― 자형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대청,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 진 대묘(大廟), 정면 1칸의 별묘(別廟)과 정면 4칸, 측면 2칸의 ― 자형 팔작지붕인 정자(蘭皐亭) 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된 묘사(廟舍)로 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마구, 우측에는 사랑방 1칸, 사랑마루 1칸으로 된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사랑마루에는 정면과 우측면에 판벽으로 막고 판문을 달아 마루방을 형상하고 사랑마루 뒤에는 1칸 규모의 책방을 두어 우익사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상방을 두었으며, 2칸 규모의 안방 뒤에는 안방에서 필요로 하는 세칸의 수장처로 사용하는 도장방을 두었으며, 도장방 우측에는 대청으로 돌출된 1칸 규모의 고방이 있다. 상방의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마루간을 두었는데 우측에 문을 달아 외부와 통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영덕지방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기둥은 모두 각주이며 5량가 이다.

3) 인량리 용암종택(仁良里 龍巖宗宅)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61호로 지정된 용암종택은 창수면 인량리 133∼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고건축물로 선산김씨 김익중(善山金氏 金益重, 1678∼1740)의 주택으로 영조 4년(1728)에 건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건축 당시에는 대문칸과 정침 사이인 사랑마당 좌우쪽에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정침과 대문채만 남아 보존되어 있다.
남향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역시 남향한 ㅁ자형의 정면 5칸, 측면 6칸의 정침이 자리잡고 있는데,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시선을 차단하게 위하여 담이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중문간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중문간으로부터 사랑방, 사랑웃방, 사랑마루가 연접되어 있다. 사랑마루는 2칸이 종으로 통칸을 이루고 있으며, 사랑마루 뒤에는 중방이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가 정면 3칸이 된 관계로 중문은 우협칸으로 밀려나 있으며 중문간의 우측에는 마구간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3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좌우로 귓방과 도장을 두었다. 좌측 귓방 전면에는 통래퇴간과 곳간이 좌익사를 이루며 중방과 연결되어 있는데 귓방 전면에 있는 통래퇴간은 이 지방의 평면에 자주 발견되는 지역적 특징중의 하나이다.
도장방 앞으로는 안방과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고 있으며, 고방의 좌측에는 대청쪽으로 곳간이 1칸 돌출되어 있는데, ㅁ자형의 주택에서 대청쪽에 곳간이 돌출되어 있는 예는 봉화, 울진 등지에서는 간혹 발견되나 이 지역에서는 흔치않는 예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워 5량가의 가구를 결구하였는데 기둥 안쪽의 보아지는 높이가 낮고 길게 뻗어 있어 섬약하고 장식적으로 보인다.
부엌에는 화덕도 있었다 하며, 기둥, 보, 판재의 목부 면에는 자귀로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어 비교적 옛스러운 분위기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평면형태가 민가 유형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4)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宗宅)

1987년 12월 29일 민속자료 제74호로 지정된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務安朴氏武毅公派宗宅)은 가마골(陶谷)의 북방에 있는 야산을 배산하고 안들을 내려다 보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무의공 종택은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넷째 아들인 박선(朴璿, 1596∼1669)이 백형(伯兄)인 박유(朴諭)를 위하여 1644년경에 건축하였다 한다.
건물의 기본적인 구도를 살펴보면 6칸 규모의 솟을대문과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정침이 배치되어 있고, 정침 우측 후면에는 무의공 불천위사당(武毅公 不遷位祠堂)이 있으며, 우측 전면에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의 우측에는 작은 부엌 1칸과 2칸의 온돌방이 있고, 이어서 사랑방과 사랑마루가 연접되어 있는데 사랑방과 사랑마루는 전면으로 1칸을 돌출시키고 하부에는 기둥을 세워 누와 같은 느낌을 들게 하였다. 대청 주위의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주상(柱上)에는 익공계로 분류할 수 있는 특이한 초각재로 장식하였다. 대량 위에 포대공을 세워 종량을 받게 하고 그 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정혀를 받게 한 5량가이다. 사랑마루 측면의 문틀에는 중간 설주를 세웠던 장부구멍이 상하틀에 남아 있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우물마루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2통칸의 안방과 부엌을 두고 우측에는 상방을 배치하였다.
대청 상부가구는 종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운 비교적 소박한 모습을 한 5량가인데 대량을 받는 양봉에는 초각장식을 하였다. 대청 후면의 양개널문 문얼굴의 윗틀에는 중간 설주를 세웠던 장부구멍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홈이 중심에서 한쪽으로 약간씩 치우쳐 있어 중수 때에 설주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문채는 솟을대문간의 좌측에 문간방, 부엌, 마굿간이 달려있고 마굿간 옆에는 화장실이 있고 대문채 우측에는 문간방, 창고가 놓였다. 창고 우측에는 독립된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사당(祠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초익공계 건물로 전면은 원주를 세웠으며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5)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宗宅)

1987년 12월 29일 민속자료 제274호로 지정된 본 주택은 영해면 괴시리 333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종택은 약 300년전에 남붕익(南鵬翼)이 건립한 가옥으로 ㅁ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 규모로 사랑채 부분이 우측으로 3칸 돌출되어 편날개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사랑채는 중문간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전면에 2통칸의 사랑방을 배치하였고, 사랑방 우측칸 뒤에는 1칸 규모의 책방을 두었다. 책방의 우측에는 1칸의 사랑웃방과 2칸 크기의 사랑마루방이 연접되어 날개를 형성하고 있다.
중문칸 좌측에는 원래 마굿간이었던 온돌방 1칸과 고방 1칸이 연접되어 있으며, 고방 뒤에는 부엌이 자리잡아 좌익사를 이루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3칸이 안대청이 자리잡고 있는데 좌측에는 도장방, 안방, 부엌이 연접되어 좌익사를, 우측에는 2칸 규모의 상방과 작은 부엌 1칸이 책방과 연결되어 우익사를 형성하고 있다.
상방은 원래 방 1칸과 통마루 반칸, 중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1984년 중수시 통마루의 마루바닥을 뜯고 벽을 헐어 통칸의 온돌방으로 개조하였다 한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평주 위에 간략한 보아지를 결구하여 대량을 받게 하고 그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게 한 간략한 3량가이다.
정침의 우측에는 1900년대 초에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기와 집으로 된 사당이 2통간의 방과 1칸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방의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툇마루가 놓여져 있다.
건축 후 수차 중수를 한 바 있으며 1919년경에 전체적인 부재 교체와 번와를 하였으며 1984년에 일부 노후 부재를 교체하는 등 부분적인 수리를 하여 평면구성이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는 있으나, 전체적인 공간구성이나 평면구성에서 조선 후기 주택의 소박한 고격(古格)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곳 호지말의 마을공간 구성에서 핵심적인 건물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옥이다.

6) 영덕 도곡동 충효당(陶谷洞 忠孝堂)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83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무의공 박의장(武毅公 朴毅長)의 넷째 아들인 박선이 1620년경에 세운 건물이다. 박선은 현종 6년(1665)에 조산대부 동몽교관(朝散大夫 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양성에만 전념하였으며, 현재 도계정사(陶溪精舍)에 배향되고 있다.
충효당의 당호(堂號)는 당시 우의정을 지낸 미수 허목(許穆)이 박선의 충효를 기리는 뜻으로 전서(篆書)로 쓴 “충효당(忠孝堂)”이라는 현판으로 비롯되었으며, 사랑대청 벽에는 천하귀필(天下鬼筆)로 알려진 박춘수(朴春秀)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가 남아 있다.
앞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의 정침 중심으로 전면 우측에 바깥마당을 두고 토담을 쌓아 공간을 분리시킨 사랑부분과 바깥마당 후편에 축대를 조성한 후 삼문을 세우고 사당을 둔 전체가 3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청은 9칸 안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2칸 온돌방과 안대청보다 한 단 높게 난간을 세운 툇마루를 두고 좌퇴칸은 도장과 3칸의 안방, 부엌을 연결시켜 좌익사를 이루고 있다. 보통 ㅁ자 정침 대청인 경우 퇴칸을 두되 내진주를 세우지 않는 것이 통례인데 여기에서는 칸살을 크게 잡아서인지 기둥 2칸을 세웠다. 그리고 전면쪽은 대문간을 중심으로 우측에 2칸 사랑방과 폐쇄형 마루방을 두고 배면쪽으로 통래간을 두어 곳간과 연결하여 우익사를 만들었다.
   정침 우측 모서리와 접속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독립된 사랑이 자리하고 있는데 좌측 2칸에 온돌방을 두고 넓직한 4칸 대청으로 만들어졌다.
사랑 뒤쪽으로는 방형 토장을 두르고 삼문이 설치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우물마루를 깐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과거에는 정침 정면에 솟을 삼문이 있었고 방앗간채 부근에 연당이 있었으며 경염정과 이오정 등이 있었으나 두 차례의 화재로 없어지고 다만 경염정만 주택에서 100m 지점에 이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7) 면운재고택(眠雲齋古宅)

창수면 오촌리 239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 건물은 성균관 진사를 지낸 면운재 이주원(眠雲齋 李周遠, 1714∼1796)이 1750년에 건립한 가옥으로 전하며,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96호로 지정되었으며, 특히 한말 영덕지역의 의병을 대표하는 이겸호(李謙浩 義士)가 독립운동 당시 본 가옥을 본거지로 활용하였다 한다.
건물의 일반적 구조를 살펴보면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우물마루를 깐 고방을 두고 좌익사를 연결시키고 우측으로는 온돌방이 우익사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나 1칸의 칸살로는 방이 작았던지 온돌방과 대청을 1칸 반으로 잡고 있는데, 이는 고방과 연결되는 온돌방을 연결하며 부엌 1칸과 합해지고 있다. 그러나 고방의 출입은 온돌방에서만 할 수 있도록 외짝문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우측 온돌방과 연결되는 1칸 반의 고방은 내정에서 출입토록 하여 좌측의 고방과는 기능이 다른 듯 하다. 고방과 연(連)하여 2칸의 온돌방이 연결되나 이 온돌방은 사랑부분에 속하는데, 온돌방 위쪽에 벽감(壁龕)을 설치하고 전면 우측 모서리 부분에 마룻방에서 출입토록 하였으며 대문간 우측의 사랑부분과 연결된다. 폐쇄형 마룻방과 접하여 1칸의 온돌방을 들이고 온돌방 배면쪽, 즉 내정으로 툇마루를 내고 마룻방 전면은 판벽에 궁널끼운 세살문으로 막았으며, 대문간 좌측에는 마굿간을 두고 상부는 수납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건물의 전체 상부가구는 3량가 납도리로 처리되었고, 정침과 양익사, 사랑의 지붕형태와 높이를 잡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며, 정침의 주고를 높이 잡아 양익사 마루도리가 정침 기둥에 결구되게 하였고, 사랑부분의 지붕을 독립된 박공지붕을 만들기 위해 역시 주고를 전면 대문간과 우익사 보다 높게 잡았다. 특히 용재의 치목은 자귀를 사용한 듯 자국이 선명하며, 통평고대를 사용한 것 등 여러 부분에서 고형(古形)이 남아 있으며, 과거 정침 좌측에 방앗간과 전면에 대문채가 있어 반가(班家)의 격식을 갖추었으나 6·25때 훼손되어 철거되었다.

8) 경주김씨 눌곡종택(訥谷宗宅)

   1999년 8월 9일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119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지품면 눌곡리 366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 김씨 김언수(金彦壽, 1574∼1638)가 건립한 고가로 현재 경주 김씨 아천공파의 종가(我泉公派 宗家)이다.
가옥의 구성은 전체적으로 독립된 사랑채와 ㅁ자형의 정침 배치를 이루고 있다. 정침은 동남향으로 지형에 맞게 전면에 석축하고 배산(背山)하여 앉힌 정면 4칸, 측면 4칸의 골기와 집이다.
정침의 안채는 우측으로부터 부엌 1칸, 내실 1칸, 대청 2칸, 상방 1칸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부엌이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부엌정지 좌측벽과 안방측의 모퉁이에는 코굴을 놓고 부엌에 붙은 내실에는 정지쪽 상부에 감실을 설치하였다. 정침의 전면은 우측으로부터 아랫방 1칸, 외양간 1칸, 대문간 1칸, 안사랑방 1칸 그리고 안사랑방 좌측에 뒷방을 곁들여 놓아 정침에서 전면만 5칸으로 배치하고 있다.
2통간의 대청은 한옥의 실내 기후조절 측면에서 전형적인 여름공간을 꾸몄고 마루바닥은 우물청판을 깔았다. 집안의 제례시에는 이곳에서 행한다 하며 후면쪽으로는 상부에 시렁을 설치하였다.
대청의 2통간 전면은 완전 개방되었고, 대청 후면은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고 문 하부에는 머름중방을 설치하여 머름동자와 머름착고를 끼웠다.
기둥은 모두 덤벙주초 위에 방주를 사용하여 납도리로 꾸몄으며, 상부가구는 간결한 3량가구로 구성되었다. 대청 상부에는 용마루대를 지지하기 위하여 내실과 상방쪽 벽 상부에 동자대공을 세웠고, 대청상부는 대들보 위에 각대공을 놓아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고 천장은 연등 천정으로 꾸몄다.
정침 전면의 안사랑채는 대청과 높이를 맞추기 위하여 경사진 지형 위에 높은 자연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평면은 좌측부터 뒷방, 안사랑방, 대문간, 외양간, 아랫방 순서로 각 1칸씩 짜여져 있다. 상부가구는 3량가이다.
ㅁ자형 정침 앞에 독립된 사랑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기와 집으로 각 2칸의 온돌방과 사랑마루를 통칸으로 꾸미고 있다. 막돌기단 위 덤벙주초에 방주를 세웠으며 납도리와 대들보를 장식없이 5량 가구로 결구시켰다. 상부가구는 대들보 위에 각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치고 마루상부 천장은 연등 천정으로 꾸몄다.

9) 곡강고택(曲江古宅)

영해면 원구리 726-3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곡강고택은 2000년 9월 4일에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123호로 지정된 건물로 1500년대에 건립하였다 전한다. 곡강고택의 정침은 북동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우측 뒤쪽에 사당이 있으며, 곡강정은 고택 전면 좌측쪽에 남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택은 통례간을 중심으로 우측에 사랑공간이 자리하며 우익사와 연결, 좌측은 부엌과 마구로 구성되어 있다. 통례간을 들어서면 정면에 4칸 대청이 높직이 자리하면서 좌, 우에 온돌방을 두는 것으로 정침을 구성하고 있다.
대청 좌측편은 고방, 2칸통의 안방과 부엌이 연결되어 정침과 좌익사가 연결되고 우측편에는 출가한 자녀가 사용하였다는 신방과 마루가 자리하면서 우익사와 연결된다. 우물마루를 깐 고방과 중방이 사랑과 연결되고, 사랑공간은 전면 우측과 우익사에 걸쳐 구성된다. 안대청 배면은 판벽에 쌍여닫이 판문을 매칸 설치하였다.
사랑부분은 사랑방을 중심으로 우측으로 한칸 돌출시켜 판벽으로 패쇄된 마루방을 설치하였다. 안대청 상부구조는 제형판대공을 세운 5량 구조이며 좌우익사의 처마도리가 정침 기둥에 결구됨에 따라 구조의 허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내진주를 세운 후 익사 처마도리와 동일 높이에 방재를 하나 더 얹었다. 좌우 방상부에 더그매가 노출되었고, 정침 전면 가운데 기둥만 원주를 사용하여 양서형 초익공을 장식하였고 살미 뒷뿌리는 초각된 보아지로 대량을 받추고 있고, 주칸 사이에는 창방이 소로수장하여 안채 정침에서 보기 드문 수법을 지니고 있다. 정침 전면 부분만 평고대와 연함이 설치되었을 뿐 그 외 부분은 고식인 통고대를 두었다. 양익사와 정면은 3량 구조이다.
사당은 정면의 길이가 측면에 비해 1.5배 정도 더 큰 장방형을 이루고, 우물마루 바닥에 단을 만들고 위패를 배설하였고 굴도리 판대공 3량 박공지붕을 얹었다.
곡강정은 전퇴간을 둔 중당협실형으로 정자건물에서 자주 채택되는 평면구성을 지니고 있다. 전퇴칸은 좌·우가 판벽과 판문으로 패쇄되었으며, 가운데 2칸 마루를 전면에 4분합들문을 설치하였고, 뒤쪽 또한 판벽과 판문으로 패쇄하였다. 상부가구는 5량이며 소로를 삽입한 판대공을 세웠으며, 퇴량은 내진 주위에서 합보형식을 취했다. 좌·우협칸의 도리 채의 위치를 어칸보다 높이고 그 위에 판대공형 양봉을 얹은 후 종량을 받도록 한 구조가 다소 독특하다.
전면과 좌·우 기둥을 두리기둥을 채택하고 정면은 무익공 소로수장으로 마감하고, 처마곡선과 마루곡선은 만곡도가 높은 편이다.

 

4. 기념물

1) 영덕 대소산 봉수대

축산면 도곡리 산 20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대산소 봉수대는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 지정 지방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된 것으로 해발 282m의 최상봉인 대소산의 동봉(東峰)에 축조되어 있다. 봉수대는 현재 영해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3km지점, 축산항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km지점, 해안으로부터는 약 1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차지하고 있는 넓이는 2,826㎡이다. 축조된 시기는 고려 혹은 조선 전기로 추정된다.
봉수대의 구조를 살펴보면 동봉의 지형을 이용하여 직경 약 20m 되는 넓이의 둘레에 돌로 축대를 쌓아 올려 그 위에 봉수대를 마련했다. 축대는 크고 작은 할석을 이용하여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현재 남쪽이 약 2m, 서쪽이 약 1.6m가량 높이만 잔존하고 있으며, 서쪽 안부(鞍部)에 연결되는 부분은 방형으로 돌출되어 나즉한 축대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봉수대 중앙부에는 역시 석축으로 된 연통이 구축되어 있다. 연통의 외형은 단경 10m, 장경 12m에 높이가 3m 되는 원통형이며, 구조는 대소형의 할석을 이용하여 두께 1.5m되는 석축벽으로 둘려저 있다. 그러나 현재는 연통 부분이 매립되어 그 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
동봉(東峰)·서봉(西峰)과 안부(鞍部)를 포함한 그 외각은 가느다란 타원형으로 석축된 돌담을 돌려 두고 있다. 돌담은 할석을 쌓아 올렸으나 거의 붕괴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고, 길이는 장축이 약 120m이고, 가장 좁은 안부에서는 단축이 약 23m이다. 이 돌담 외측은 올라오기 힘든 심한 자연경사를 이루고 있다.

봉수대 외곽을 돌리고 있는 보호벽 내의 서봉에는 조선시대 기와조각이 산재, 분포되어 있어 봉수군들의 막사로 사용한 건물터임을 추정케 하고 있으며, 안부의 남쪽 경사면은 긴 곳은 11m, 짧은 곳은 4m의 석축 담장이 방형으로 둘려저 있다.
대소산 봉수대는 남쪽으로는 창포리 뒷산인 별반산 봉수대, 북으로는 후포의 후리산 봉수대, 서로는 영해 원구리 뒷산인 광산 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 봉수대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대소산 봉수대는 현재 영덕 인근지역의 여러 봉수대 가운데서 가장 형태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조선시대 통신수단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 옥계 침수정계곡 일원(一圓)

달산면 옥계리 일원 1,743,219㎡에 이르는 옥계 침수정계곡 일원은 1983년 9월 29일 경상북도 지정 지방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으며, 계곡은 팔각산(八角山)과 동대산(東岱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산하(山河)가 아름다우며 기암괴석이 절경(絶景)을 이루고 있다. 계곡 주위의 깍아 놓은 듯한 기암괴석은 삼귀암(三龜岩), 학소대(鶴巢臺), 병풍석(屛風石), 일월봉(日月峰), 진주암(眞珠岩) 등 37경의 관광 명소를 만들고 있으며, 각 소(所)마다 전설이 깃들어 있다.
특히 계곡 입구에는 조선조 광해군(光海君) 때 손성을(孫聖乙)이 건축한 침수정이 있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던 선인들의 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정자의 구조는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건립연대는 1600년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자(亭子)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렀는데, 담장은 옥계가 보이는 전면쪽은 개방시켰으며 배면 좌측에는 일각문을 세워 정자를 출입토록 하였으며,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 집이다. 또한 도로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경사진 대지위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대지의 경사에 따라 전면에는 반석 위에 누(樓)하주를 세워 누정(樓亭)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으며, 따라서 정자로의 출입은 뒤에서 하게 되어 있다. 후열(後列)의 2칸은 온돌방을 두고 전열은 통칸으로 처리하여 우물마루를 깔고 누마루를 꾸몄는데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다.
건물은 5량가인데 팔작집의 전면에 누마루를 설치한 관계로 장연과 단연이 맞닿는 곳에는 우물반자로 막음하였으며 귀에는 선자연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정자와 주변환경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관계로 여름철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다.

3) 갈암종택(葛庵宗宅)

1991년 5월 14일에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된 갈암종택은 창수면 인량리 412∼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조판서를 역임한 영남학파 거두였던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 1627∼1704)의 종택이다. 이 건물은 1910년에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건축된 것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92년 현 창수면 인량리로 이건된 것이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 반의 팔작기와집 형의 평면으로 우측 측면으로 돌출하여 인접한 사랑방과 사랑대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기와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문에 들어서면 자그마한 중정이 자리하고 있고 중정(中庭) 정면으로 위치한 안채의 대청은 중정 폭 가득히 2칸으로 펼쳐놓고 있다.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아 그 위에 방주를 세웠는데, 상부가구는 3량 가구로 결구하였고, 대청상부의 대량 중앙에는 판대공을 얹어 마루도리와 장혀를 받히고 있다. 대청의 좌우로 통칸 온돌로 된 안방과 건너방을 배치하고 있다. 건너방과 고방 사이에 온돌 아궁이를 설치하였고, 그 상부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건넌방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안방과 대각선을 그어 동일 평면상에서 가장 먼 곳에 사랑방과 사랑마루, 그리고 책방을 두고 동시에 이들을 작은사랑과 대칭되게 배치하였으며, 이곳의 개구부는 건물의 정면쪽 외향을 향하게 하여 중정 및 안채측과 시선을 차단되게 하고 있음에 주목할 만 하다.

4) 신돌석장군 생가지(申乭石將軍 生家址)

축산면 도곡리 528∼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돌석장군 생가터는 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었다. ― 자형의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초가집인 신돌석(申乭石, 1878∼1908) 의병장의 생가는 의병장의 부친 신석주(申錫柱)가 1850년경에 지은 집이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1940년경에 일제 관헌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꺽기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생가에 불을 질러 상량주 및 연목 등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1942년에 다시 보수되었다. 그후 1995년 8월 19일 생가지 정비공사(生家址整備工事)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돌석 의병장은 고종 15년(1878) 11월 3일(음력) 신석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태호(泰浩)였다. 어릴 때 서당에서 공부할 무렵부터 행동이 날래고 담력이 있어 항상 대장 노릇을 하여, 통솔력과 지도력이 돋보였다.
그후 1896년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을 때부터 영해지역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6년에 고향에서 창의하여 의병장이 되어 영덕, 영양, 울진 등의 여러 곳에서 일제 군경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수많은 전투에서 일제의 군경과 전투를 벌이다 1908년 11월 18일(음력) 지품면 눌곡리에서 불의의 사건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여 신의병장의 애국충정을 기리고 있다.

5) 영해 경수당 향나무

유형문화재 제297호인 경수당종택이 있는 영해면 원구리 112번지의 건물 후원(後園) 연못가에 심겨져 있는 이 나무는 1997년 12월 1일에 경상북도 지정 지방기념물 제124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가 6m, 둘레가 3m, 밑둥치 둘레가 4.7m, 수관폭이 8.9m가 되는 향나무이다. 수간(樹幹)의 일부가 약간 고사(枯死)하였으나 수령(樹齡)에 비하여 수세(樹勢)가 비교적 양호(良好)한 편이다. 이 향나무는 주로 울릉도에 자라고 있는 수종으로 당시 약 300년생이 된 나무를 다시 옮겨 심었다고 한다. 따라서 나무의 수령은 대략 7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설에 경수당 건립자인 박세순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나 고증할만한 기록은 없다.
경상북도에는 천연기념물 48,49호인 통구미와 대풍감의 향나무 자생지, 158호인 울진 죽변리의 향나무, 312호인 울진 화성리 향나무가 있고, 경상북도 기념물 8호인 양동의 향나무, 57호인 영일 우각동 향나무, 71호인 입암서원의 향나무가 있다.
   경상북도 내륙지방에서는 최노수(最老樹)로 추정되며, 노수(老樹) 보호 측면 뿐만 아니라 향나무의 생태연구에 귀중한 학술적 자료와 옛 선조들의 식수관(植樹觀), 그리고 자연사상을 후세에 전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 문화재 자료

1) 송천 세려고택(松川 世廬古宅)

병곡면 송천리 388번지에 위치하며, 문화재자료 제86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조선 숙종 년간(1674∼1720)에 권득여(權得與, 1636∼1716)란 분이 영해 관어대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송천자(松川子)라 자호(自號)하며 거주하던 곳으로 이 건물은 그의 아들인 칠우정 권대림(七友亭 權大臨)이 주택으로 1700년대에 건립한 日자형의 가옥이다. 현재는 좌측의 방앗간이 철거되어 한쪽이 트여져 있는 상태이다.
4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자리잡고 있다. 정침의 중문 좌측에는 외양간과 곳간을 두었는데 곳간의 뒤에는 통례간과 부엌이 연접되어 좌익사를 이루면서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중문의 우측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책방과 사랑윗방이 연접되어 있으며 사랑윗방 뒤에는 사랑아랫방을 두어 우익사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윗방이 전면쪽으로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랑마루를 두었는데, 사랑마루는 전면으로 돌출되어 날개를 이루고 있다. 사랑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종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운 5량가이며 사랑방쪽 윗벽에는 칠우정(七友亭)이란 현판(懸板)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3칸 규모의 대청이 자리잡고 있는데 안방은 대청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안방 윗머리에는 도장방이, 도장방 위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마루에서 벽에 붙은 통나무 사다리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대청 우측에는 상방을 두었으며 상방 전면에는 영덕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래 퇴칸을 두었으며 대량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운 3량가의 건실한 구조이다.
내부구조와 배치에 다소의 변형은 있으나, 경상북도에서 몇 안되는 日자형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는 건물로 주거사(住居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2) 괴시동 대남댁(台南宅)

이 건물은 영해면 괴시리 353번지에 위치하며, 문화재자료 제197호로 지정된 건물로 영양남씨 씨족마을인 괴시(호지촌)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조 42년(1766)에 괴정 남준형(槐亭 南峻衡)공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가옥이다.
안대청 장혀 부분에 “신해 2월 18일 묘시입주동시상량(辛亥 二月十八日 卯時立柱同時上樑)” 이란 상량년대는 중건년대로 보여지는데, 상량문에 년호를 기록하지 않고 신해(辛亥)라는 간지(干支)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중수년대의 추정은 어려우나 신해라 할 때 철종 2년(1851)과 1911년의 두가지 경우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으나, 평면이나 마을 전체의 건축상황에 비추어 볼 때 1911년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아진다.
정면 4칸반, 측면 6칸반의 ㅁ자형 가옥으로 마을 형국에 순응하면서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중문 우측에는 사랑채가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전면에 큰사랑과 사랑마루가, 사랑마루 뒤로는 윗사랑과 아랫사랑이 연접되어 있다. 중문 좌측에는 마굿간을 두고 뒤로는 반칸 규모의 고간이 부엌과 연결되면서 익사를 이루었다. 안대청은 마당폭과 같은 규모로 꾸며졌다.
안채는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도장방과 안방을 두어 부엌과 연결하게 하였고, 우측에는 샛방과 통래간 곳간이 익사를 이루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비교적 높게 축조 한 막돌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3량가로 꾸민 대청상부 대량 밑에는 간략한 보아지가 받쳐져 있고 보위에는 제형판대공을 받고 마룻대를 꾸몄다.
  안채 우측에서 뒤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담장을 방형으로 둘러 일곽을 형성하고 3칸 규모의 전면 퇴간형식으로 된 사당이 배치되었는데, 전면 퇴간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한 3량 가로 기둥과 도리 연결부분에는 간략한 보아지를 끼워 보강하였고, 주상부에는 봉두와 흡사한 조각의 쇠서를 결구하였다.
  조선 후기에 창건되고 1900년대초에 중수된 건물로, 평면구성에서 그 변화의 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안채의 평면구성을 볼 때 안방 뒤쪽의 도장방 뿐만 아니라 샛방과 곡간 사이에 놓인 통마루의 존재는 이 마을 ㅁ자형 주택의 전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사랑채에서 발달한 툇마루 및 아랫사랑, 윗사랑 등의 내부공간 분화는 후대에 새롭게 변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3) 괴시동 물소와 고택(勿小窩 古宅)

  영양남씨 씨족마을인 괴시리(호지촌)에 서향으로 자리잡은 이 건물은 조선조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勿小窩 南澤萬)공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南有鎭)이 지은 집으로 현재 건물은 1864년에 중수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이는 안대청 상부 마루대를 받는 장혀 밑면에 년호가 생략된 “갑자 12월 27일 진시상량(辰時上樑)”이라는 상량문을 보아서는 연대와 치목수법 및 보존상태, 그리고 건축양식 등을 종합해 볼 때 1924년 중수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건물은 1987년 12월 29일 문화재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해면 괴시리 33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의 주출입은 원래 사랑채 고방과 좌측 익사 고방 사이에 놓인 중문칸을 이용하였으나 현재는 안채 상방과 사랑웃방 사이에 난 중문을 통해 외부로 동선이 연결되도록 이쪽의 담장을 틔워 헐고 통행하고 있다.
  사랑채는 중문간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평면은 중문간에서부터 사랑웃방과 아랫방, 사랑마루 2칸, 작은사랑이 연접되어 있고, 사랑채 전면에는 넓찍한 툇마루가 각 방과 마루앞쪽에 꾸며져 있다. 중문간에 들어서면 폭 3칸, 길이 4칸 규모의 안마당이 나타나고, 안마당 우측에는 안대청이 서북향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안대청 우측에는 반칸 규모의 가묘와 1칸 규모의 상방이 상하로 연접되어 있다.
안대청 좌측 2칸에는 웃방 1칸과 1칸반 크기의 안방이 배설되어 있고, 안방 아래로는 1칸반 규모의 부엌과 각 1칸 규모의 아랫방, 창고, 고방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3량가의 건물로 막돌 초석 위에 방주를 세워 대량을 받게 하였으며, 대량 밑에는 간략한 S자형 새김의 보아지를 결구하였으며, 대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놓아 마룻대를 받게 하였다.
당시에는 유교적 윤리에 의해 남·여의 생활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었는데, 골목에서 바깥마당으로 진입할 때 사랑채의 전면이 여성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또한 사랑마당 우측 모서리에 있는 우물에서 여성이 가사 작업시 노출되는 것을 고려하여 중문간 앞쪽과 담벽에서 중문간 쪽으로 각 약 6m 가량의 내외벽을 쌓아 올렸으며, 괴시마을에 있는 ㅁ자형 주택의 평면과 공간구성이 변화하는 양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4) 괴시동 해촌고택(海村古宅)

  영양남씨 씨족마을인 괴시리(호지촌)에 위치한 이 건물은 영조 31년(1775)에 해촌 남극만(海村 南極萬)공이 건축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안대청 종도리 장혀의 상량문(光緖 4年 戊寅 二月二十七日 立柱 巳時上樑) 기록으로 보아 고종 15년(1878)에 중수한 건물로 보인다.
  1987년 12월 29일 문화재자료 199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해면 괴시리 35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ㅁ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7칸 규모인데 중문간 좌측에는 아랫방을 두었으며 우측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칸을 중심으로 건물 정면 우측에는 1칸 규모의 작은 사랑방이 놓이고 그 뒤쪽으로 1칸반 크기의 큰 사랑방이 위치하고 있다. 작은 사랑방의 전면과 우측에는 각 1칸반, 반칸 규모의 사랑마루가 꾸며져 있으며, 특히 돌출된 사랑마루 부분을 박공지붕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중문을 지나면 안마당에 이르는데 안대청은 마당폭과 같은 정면 2칸에 측면 2칸 규모의 안대청이 꾸며져 있다. 안대청의 우측에는 상방을 두었는데 상방의 전면쪽으로는 통마루, 곳간, 통래칸 등이 연접되어 우익사를, 좌측에는 도장방이 자리하고 있고 도장방의 전면쪽으로는 안방과 부엌이 연접되어 좌익사를 형성하고 있다.
  막돌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는데, 기둥의 모서리는 쇠시리하여 접어 놓았다. 전체적으로는 5량가의 건물로 대량 밑에는 간략한 S자 새김의 보아지가 받쳐져 있고 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마룻대를 받았다.
  사당은 정면 3칸의 맞배기와 집으로 정침의 좌측 약간 높은 대지위에 서향으로 배치되었다. 어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각각 가묘방과 온돌방을 대칭으로 배설하였다.
조선 후기에 창건되고 19세기에 중수한 건물로 평면이 비교적 구제의 구성과 지역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조선 후기 주거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5) 영덕 만괴헌(晩槐軒)

  이 건물은 본래 야성정씨의 고택이었으나, 1843년에 현소유자의 6대조인 신재수(申在洙)가 매입한 가옥이다. 기록에 의하면 신재수 공이 매입할 때는 와가 17칸, 초가 5칸이었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현소유자의 고조부인 신의영(申義泳, 1842∼1902)이 현재의 상태로 확장 개축하였다 한다.
만괴헌(晩槐軒)이란 당호(堂號)는 영해향교 태화루(太和樓)를 개수하고 병자(1876) 흉년에 많은 시혜로 베푼 공으로 나라에서 가의부위(嘉義副尉)를 제수받은 신재수의 호를 따서 당호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창수면 인량리 493번지에 위치하며, 1988년 9월 23일 문화재자료 제209호로 지정받았다.
건물의 구조는 ㅁ자형 평면에 양쪽으로 1칸씩 날개를 달았으며 전면 좌측에는 사랑을, 우측 모서리 부근에 방앗간을 별설하고 대문칸 앞에 가리개 담장을 설치하여 외부에서 정침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방앗간은 1983년 장마로 인해 허물어졌다.
  대문간 전면에 설치된 가리개 담장과 좌측 마루방에 연하여 설치된 토장이 ㅁ자형으로 사랑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정침 좌익사 부분에 설치된 통례간을 통한 외부공간, 정침 배면과 우익사 부분의 공간 등 크게 3개의 영역으로 분할되어 있다.
  정침은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퇴칸에 상방과 도장방을 배치하고, 도장방과 연하여 안방과 부엌, 그리고 고방이 있는 우익사로 연결되며, 상방 전면에 퇴간을 두어 좌익사를 연결시켰다. 좌익사는 중방, 통례간, 곳간을 연접하고 있다.
  사랑공간은 2칸 온돌방과 마루방이 연결되고 온돌방과 연결되는 좌익사 쪽으로 책방을 한칸 더 내어 사랑은 모두 4칸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측에는 마구와 집안의 상어른이 기거하였던 귓방인 온돌방을 들이고 마루방 한칸을 첨가하였다.
  안채는 5량 가구에 판대공을 세운 간결한 결구법을 보이고 있으며, 물매가 낮아 중도리 간격이 좁다. 정침 부분의 상방과 도장방 상부를 막지 않아 더그매가 노출되어 합각 부분이 보인다.
사랑 부분 역시 5량 가구법을 채택하였으나 중도리를 처마 상부에 얹어 익사보다는 한단높게 하여 독립된 팔작지붕을 만든 재치있는 구법을 취하고 있으며, 사랑 전면 기둥은 주두를 얹어 퇴량이 건널 수 있게 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 가옥 변천상을 살필 수 있는 주거 건물로서 특히 안방 뒷부분 도장방과 상방 전면의 퇴간 등의 구성은 이 지방의 ㅁ자형 주택의 전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사랑 부분의 독립성이 돋보인 배치를 지니고 있다.

6) 영덕 수정재(水晶齋)

  이 건물은 평산신씨의 신희(申禧), 신종부(申從簿), 신규년(申年) 세분을 모시기 위하여 1702년에 건립한 세덕사(世德祠)였으나, 고종 원년(1864)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현재는 입향조 묘하(入鄕祖 墓下)의 재사로 전용하면서 세분을 배향하고 있다. 1808년 1차 중수, 1879년 2차 중수, 1963년 3차 중수가 있었다.
특히 “숭정기원후 을묘(崇禎紀元後 己卯 … )”라는 마루도리의 기록으로 볼 때 2차 중수시 기록으로 생각되며 당시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영덕읍 구미리 250번지에 위치하며, 1988년 9월 23일 문화재자료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서사를 중심으로 좌·우익사와 전면 대문간이 자리하여 언듯 보면 ㅁ자형을 취한 듯 하나 서사 부분이 독립된 관계로 튼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서사와 익사의 연결부분 양쪽에 협문을 두어 외부에서 직접 서사로 출입이 용이하게 하였다. 실질적인 재(齋)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서사의 평면은 중당협실형으로 6칸 규모의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 2칸 온돌방을 주성재(主誠齋)로, 우측 2칸 온돌방을 사경재(思敬齋)로 이름 짓고는 동·서재의 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다.
  5량가의 팔작지붕으로 장식성이 없는 간결한 수법을 취하고 있으나 물매를 낮게 잡은 관계로 중도리 장혀가 대량 위에 얹히거나 동자주를 생략하고 받침목을 이용하였다. 전면에 자리잡은 대문과 익사 부분은 서사와는 완전히 분리된 독립건물을 형성하고 있는데 전면 대문간을 중심으로 우측 부분은 향사시 외부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며, 좌측 부분은 관리인들이 사용하는 주사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우측 부분은 서사와의 연락 및 행사시 참관이 용이하도록 배치하였다.
  안동지역의 재실과 외형상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비슷하나, 내부 평면에는 전혀 다른 구성법을 취하고 있어, 이 지역에 있어서 조선 후기 재사 건축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7) 모고재(慕古齋)

  조선 문종 때의 승지 이승길(李承吉)공의 두 아들 서산 이명발(西山 李明發), 간산 이춘발(澗山 李春發) 형제가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학구 중 단종 폐위에 충격을 받고, 서산공은 모고산 입구에서 은거하였으며, 그후 성균관 생원 이학(李鶴)이 직천에서 이거 후, 중종 15년(1520)에 서산공의 유지인 모고산 입구에 정자를 짓고 모고재라 하였다. 정자 후편에는 지당(池塘)을 축조하여 양어도 하고 청학(請學)하는 제자들에게 강학(講學)과 더불어 요산요수(樂山樂水)하며 지내던 정자이다. 1989년 5월 29일 문화재자료 제221호로 지정되었으며, 달산면 용평리 7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건축 당시 암석 절벽 위에 위치하였으나 풍우로 인해 퇴락하여 창건 150년 후가 되는 현종 10년(1669)에 그의 현손 삼성제 이명선(三省齊 李明善)이 100m 아래로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주춧돌에서 마루까지 1.6m, 마루에서 도리까지 2.7m나 되며, 동향으로 정좌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집이다. 흙으로 구축된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정면과 좌·우측면 첫칸은 민흘림기둥을, 배면은 방주를 사용하였다. 중앙 2칸은 온돌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로 이어지며, 방에는 연등천정, 마루는 우물천정을 하였다.
  정면에는 창방, 화반, 도리로 이루어지는 이익공의 3량 가구이다. 중앙 1칸씩의 각 온돌방 정면에는 세살문을 달고 좌측면에도 세살문을 달았으며, 마루 우측면과 배면 좌·우측에는 판장문(띠장널문)을 달았다.
대청의 정면과 좌측면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였으며, 계단은 배면 좌·우측에 각각 두어 판장문을 열고 마루로 진입하도록 하였다. 중앙에 방 2칸을 두고 대청 정면과 좌·우측면에 우물마루를 깔아 계자난간을 설치한 정자 건축으로 광주의 소쇄원과 같은 경북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공간구조를 이루고 있다.

8) 지족당(知足堂) 

  지족당은 영조대에 장수현감으로 재직한 지족당 권만두(知足堂 權萬斗, 1674∼1753)공이 1727년에 지은 살림집으로 인량리 마을 뒷편의 산자락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1993년 2월 25일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으며, 창수면 인량리 47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ㅁ자형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ㅁ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한몸을 이루고 있으나, 좌측의 사랑채는 팔작지붕을 얹어 독립된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전면과 우측에는 담장을 쌓아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사랑채는 2칸의 사랑마루와 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마루는 좌측으로 돌출되어 날개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사랑방 뒤로는 책방과 곳간이 연접되어 있으며 사랑방 우측에는 문간채를 두었다.
  사랑방과 책방 사이에는 4짝 미서기문을 달고 책방에서 내방쪽으로는 외짝 세살문을 달아 정침과 통하도록 하였으며, 문간방 사이에는 외짝 미서기문을 달았다. 사랑방과 사랑마루 사이에는 중앙의 기둥 양쪽으로는 2분합들이 열개문을 설치하였고, 전면에는 쌍여닫이 굽널띠살문을 설치하여 폐쇄적인 공간을 이루었으며, 전면에는 퇴를 들이고 헌함을 설치하였다. 대양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그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장혀와 종도리를 받는 5량가의 간결한 구조이다. 팔작지붕을 형성한 관계로 귀에는 선자연을 걸고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안채는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상방을, 우측에는 도장방을 두었는데, 상방의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으며, 퇴의 전면과 곳간 사이에는 통로를 두어 외부와 통하게 하였다. 도장방의 전면에는 축이 꺽기어 안방과 부엌이 자리잡고 있는데, 부엌은 중문간채의 객사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객사 우측의 고방도 돌출되게 되어 고방은 좌측의 사랑마루와 함께 양날개를 형성하고 있다. 막돌쌓기한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전면 2본만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그 직경이 매우 크다.
  주두 상부에는 대청쪽의 보아지에는 초각을 하였으며, 전면의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소로수장을 하였다. 5량가인데 대량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았으며, 그 위에는 동자주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한 간결한 구조이다.
  일제말과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책 및 각종 유품들은 왜경 및 빨치산들에게 약탈 혹은 소각되어 현재는 장수공(長水公)의 문집과 건물만 남아있다.

9) 대은종택(臺隱宗宅)

  대은종택은 영해면 괴시2리 581번지 상대산(上臺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괴시 2리는 관어대(觀魚臺)라 부르는데, 이는 원래 마을의 이름이 아니고 뒷산인 상대산의 이름으로 목은 이색(牧隱 李穡 先生)이 이 산에 올라가 동해를 보니 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고 하여 관어대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대은종택은 1993년 11월 30일 문화재자료 제278호로 지정되었으며, 종택 건물은 조선효종 때의 학자인 대은 권경(臺隱 權璟, 1604∼1666)공이 건축한 것으로 1889년 중건하였으며, 1978년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은공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의 집인 병곡면 송천리의 송천세려고택(문화재자료 제86호)과 셋째 아들의 집인 번호댁(樊湖宅, 문화재자료 제379호)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종택은 건축 당시에는 정침과 사당(정면 3칸, 측면 1칸반)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사당은 퇴락하여 철거되고 주초석만 남아 있으며,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으로 좌측에 사랑마루 1칸이 돌출되어 편날개 집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중문간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평면은 중문간으로부터 사랑방, 사랑웃방, 사랑마루가 연결되어 있다.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고 퇴간 전면의 주간에는 헌함(軒檻)을 둘렀다. 소로수장한 5량 가구인데 기둥의 상부에는 보아지를 끼워 퇴량을 받게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정면에 취옹세려(醉翁世廬), 사랑마루 앞에는 대은헌(臺隱軒)이라 쓴 편액(扁額)이 있다. 중문간의 우측에는 아랫사랑을 두었는데, 아랫사랑 뒤에는 2칸 규모의 부엌이 안방과 연결되면서 우익사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평면의 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우물마루인데, 마루 상부에는 고임대를 두지않아 여러 사람이 뛰면 울렁거리게 되어 있다. 대청의 좌측에는 상방과 마루도장을 두었는데 우측에는 안방도장과 안방이 부엌과 연결되면서 우익사를 이루고 있다.
  상부가구는 5량으로 대량과 종량은 만곡된 부재를 사용하였고 동자주형 대공이 마룻대를 받고 있다.
종택의 건축년대는 1600년대라 하나 1889년 중건시에 크게 보수하여 조선 후기적 양식이 많이 보이고 있으며 평면 형상은 영덕지방의 상류주택의 전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10) 존재종택·명서암·우헌정(存齋宗宅·冥捿庵·于軒亭)

  창수면 오촌리 232번지, 318∼1번지, 336∼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 건물들은 1994년 9월 29일에 문화재자료 제293호로 지정된 것으로 존재종택은 조선중기의 대학자인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 선생이 창수면 인량리에서 이주해 온 현종2년(1661)에 건립한 가옥 및 정자이다.
우헌정은 존재의 8대손인 우헌 이수악(于軒 李壽岳)의 정자로 1800년대 말에 건립되었다. 종택은 존재와 갈암(存齋·葛菴) 형제의 살림집이었고, 명서암(冥捿庵)은 강학소(講學所)였다. 이 건물들은 마을 뒷산의 경사면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데 산중턱에 우헌정이 있고 그 아랫쪽에 존재종택 및 명서암, 관리사가 거리를 두고 북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존재는 어려서부터 글에 뜻을 세워 도산에서 글을 닦고 두문불출하여 독서에만 몰두하여 유학의 중흥을 이루었고 당시 영해부사 최혜길의 천거로 경기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뇌정택에서 후진을 양성하다 1673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로는 전원팔곡시조, 홍범연의(洪範衍義) 13권, 일원소장도문집 3권, 존재집 등이 인량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⑴ < 존재종택 > 종택은 원래 ㅁ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사당은 헐려 없어지고 정침의 우측 후방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초석만 남아 있다. 현재는 정면 8칸, 측면 6칸반의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정침은 전면의 중문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랑채와 행랑채가 일렬로 연접하여 ―자형으로 이루었고, 이들 각각이 양익사로 안채와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중문간 우측의 사랑채는 전면에 툇마루를 둔 사랑방과 날개로 돌출한 마룻방을 두었고, 중문간 좌측의 행랑채는 외양간, 문간방, 고방을 두었는데, 고방이 날개가 되었다.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고방을 두고, 그 앞쪽으로 안방, 부엌을 붙여 좌익사를 구성하였으며, 우측에는 윗상방과 아랫상방을 두고 그 앞쪽으로 고방, 중방, 책방 등을 배치하였는데, 상방 앞에는 안대청과 연결된 툇마루를 두어 사당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상부가구는 3양가구이며, 대청 좌우측 방의 천장을 더그매로 하였다.

⑵ < 명서암 >
영조 49년(1773)에 존재의 증손자되는 면운재(眠雲齋)가 사림의 발의 요청(發議 要請)에 의해 존재공의 높은 학덕을 추모하고 후학의 학문연찬(學文硏鑽)을 위하여 건립한 건물이다.
명서암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 자형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전면에 퇴를 두고 어칸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며, 4면의 헌함을 돌렸다. 상부가구는 5량가로 무익공 집이며 기둥은 원주로 되었다.

⑶ < 우헌정 >
우헌정은 존재종택에서 북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해 일원에서 한말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이수악(李壽岳, 1993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우헌정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자형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어칸대청 좌우에 각각 방을 둔 중당협실형으로 전면 퇴에서 헌함을 둘렸다.

11) 사암재(思庵齋)

  사암재는 조선 명종 20년(1565) 경에 건립된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인 울진현령 이애(李)와 숙부인(淑夫人) 진성백씨합부묘제(眞城白氏合附墓祭)의 재사(齋舍)로 효종 10년(1659)에 중수하였으며, 숙종 28년(1702)에 다시 개수, 그후 부분적으로 개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건축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애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근재공(覲齋公,諱孟賢)의 아들이며 성종 11년(1480) 출생하였으며 16세때 중부인 율간 이중현(栗間 李仲賢)이 영해부사로 나올 때 영해의 진성백씨 백원정(白元貞)의 따님과 결혼 후 인량리에 정착하였다.
  공은 중종 10년(1515) 무과에 급제, 선전관, 무안현감, 함창현감, 도총부도사를 거쳐 경주판관을 역임하였으며, 중년 이후 20여 년간은 병으로 벼슬을 오르지 않았으며, 명종 15년(1560) 통정(通政)의 품계를 받았으나 이듬해인 명종 16년(1561)에 창수 인량에서 8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사암재는 창수면 신기리 47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5년 6월 19일 문화재자료 제306호로 지정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튼 ㅁ자형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 건물이다.
안채의 건물은 옛날에 짐승과 도적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층 구조로 축조되고 당실 부엌은 1층에서 2층으로 불을 넣는 특유의 기형건물이다. 2층 중앙에는 삼칸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기거할 수 있는 온돌방으로 배치하여 묘제시에는 많은 제관이 설 수 있으며, 1층 마루 아랫부분은 헛간으로 이용되고 온돌방 아래는 성토한 구들골이 있으며, 안채 날개부분에는 각각 온돌방과 헛간과 방이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과 측면 1칸으로 중앙어칸에 대문을 배치하고 협칸에 방을 두어 하인이 기거할 수 있는 온돌방이 배열되어 있다.

 
12) 우계종택(愚溪宗宅)

  선조 때 재령이씨 입향조인 이애의 손자인 의령현감 운악 이함(雲嶽 李涵, 忠孝堂)의 차남인 선교랑 우계 이시형(愚溪 李時亨)의 살림집으로, 이애가 초창한 고택을 철거하고, 선조 39년(1606)에 우계공이 살림집으로 건립한 것으로 약 400여 년간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우계공은 선조 19년(1586)에 인량에서 출생, 풍채가 준수하고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며, 학문과 재능이 뛰어났으며, 삼년간 가친의 병을 지성으로 간호하여 효가 극진하였으며, 가친 운악 이함공이 의령현감으로 부임할 때 우계공에게 가사를 위임할 정도였다. 당시 영해부내 어떤 시비가 있어 공이 20세의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글을 보내 화해를 가능하게 하였으니, 그 문장이 간명하여 글을 본 사람은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공은 27세 되던 해인 광해군 4년(1612)에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동의 외가(주촌, 周村)에서 별세하였으며, 부인 무안박씨 무의공 따님은 시부모 봉양에 극진하던 중 지아비의 상을 당하자 음식을 들지 않고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하며, 시어머니가 죽자 성복(成服)을 마치고 자결하니 나라에서 정열 표창(貞烈 表彰)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창수면 인량리 438∼1번지에 위치하며 1995년 6월 19일 문화재자료 제307호로 지정된 것으로 정면 6칸, 배면 3칸, 측면 4칸의 ㅁ자형 목조와가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5칸의 ㅁ자형의 목조와가로 막돌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운 건물이다.
  안채 중앙 어간에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건너방이 배치되고 안방 후면에는 벽장을 설치하였다. 건너방 전면에는 마루를 두어 후정(後庭)으로 통하는 출입구로 이용하였다. 사랑방은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마루로 되어 있고 대문간 좌측에는 마구간을 두고 그 옆에는 곳간을 두어 양식을 저장하여 부엌과 연결시켜 놓았다.
  별채는 정자를 두고 외부 손님을 접대한 곳으로 이용되었으며,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막돌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다. 건립 당시에는 대문채 및 행랑채가 있었다 하나 철거되었다.

13) 돈수재(遯峀齋)

돈수재는 영덕에 세거한 수안김씨 부장공파(部長公派)의 종택으로 유학자이며 경재구휼(傾財救恤)한 공로가 많았던 돈수 김덕유(遯峀 金德裕, 1694∼1767)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인 김정련(金鼎鍊, 1783∼1862)이 1804년에 건립한 주택이다. 건물의 건립에는 사림과 주민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다고 하며, 1980년도에 중수를 하였으나, 건물은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요소가 강하게 풍기며 현재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건물은 지품면 송천리 124∼2번지에 위치하며, 1995년 12월 1일에 문화재자료 제316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6칸, 배면 4칸, 측면 5칸반의 ㅁ자형 목조와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중문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채를 우측에는 문간방 아랫방을 두고 뒤쪽에는 안채를 꾸몄으며, 전면의 사랑마루와 아랫방은 좌우로 돌출되어 양날개집으로 되어 있어 전면의 6칸이 되어 앞에서 바라보면 제법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채는 기단을 다소 높게 조성한 후 다시 바닥면을 3자 가량 올려 온돌방과 마루를 꾸미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평면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田자형인데, 좌측간은 전·후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깔아 사랑마루를 꾸몄으며, 우측간에는 4짝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과 책방을 전·후로 배치하였다. 사랑채 뒤에는 통래간을 사이에 두고 곳간과 상방을 두어 안채와 연접되게 하였다. 칸은 2칸 규모인데 좌측 1칸은 안마당을 면하고 있으나, 뒤쪽의 1칸은 안대청쪽으로 들어가 있는데,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으며 벽체는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대청은 전면 뜰의 폭과 같이 하여 2칸의 칸살을 잡았는데, 전면 가운데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우측에는 축이 꺽이어 도장과 2통칸의 안방 그리고 역시 2통칸의 정지가 연접되어 있다. 정지는 2통칸의 비교적 큰 규모로 계획된 까닭에 우측면은 건물의 전면에 면하고 있는데, 좌측에는 문간방을 두어 중문과 접하게 하였으며, 우측에는 아랫방을 두어 날개를 형성하였다.
  상부가구는 대량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그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는 간결한 구조의 5량가로 구성되어 있다.

14) 목사공 종택(牧使公 宗宅)

  목사공 농아당 박홍장(聾啞堂 朴弘長, 1558∼1598)은 연일현감 박세렴(朴世廉)의 아들로 영해면 원구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조선 선조 13년(1580) 무과에 급제 아이만호, 제주판관, 대구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선조 24년(1592) 임진왜란 때에 무장으로 활약하다 4년후인 1596년 임진왜란의 타개를 위하여 처음으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할 때 부사로 참여하였다. 이때 풍신수길(豊臣秀吉)이 통신사 일행에 대해 여러 가지 압박을 가하려 하자 그는 이에 대항하여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나라를 위해 의기를 굽히지 않았다 하며, 귀국 후 상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종택은 칠성리 마을 한가운데인 축산면 칠성리 16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산하여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는 우측에 사랑채가 있었다 하나 퇴락하여 철거되고 현재는 안채만 남아있다. 1996년 7월 16일에 문화재자료 제320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반,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 집인데, 막돌쌓기한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운 후 5량가의 가구를 결구하였고, 겹으로 구성된 건물로 전열에는 좌로부터 사랑방, 마루, 통로, 정지방을, 후열에는 도장방, 안방, 부엌을 각각 배치하였으며, 전면과 좌측면에는 퇴를 달아 헌함을 둘렀다.
좌측의 방들은 전열에는 사랑방과 마루를, 후열에는 도장방과 안방을 두어 田자형을 이루었는데 이러한 형태는 강원도지방의 온돌중심형 겹집평면에서 앞쪽의 방1칸이 마루로  대체된 형식이다.
   와가까치구멍집으로서 마루가 수용된 온돌중심형 겹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북부지방의 온돌중심 주거문화와 남부의 마루중심 생활양식이 절충된 형태로서, 지역적인 측면에서 민가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초가의 까치집과 유사한 형태인 천정(天井) 투창(透窓)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15) 강파헌 정침(江坡軒 正寢)

  이 건물은 숙종 때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강파 권상임(江坡 權尙任, 1622∼1700)공이 건립한 살림집으로 공은 인량리에서 출생하여 현종10년(166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공조정랑, 예조정랑, 해남현감, 풍기군수 등의 관직과, 1692년에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 편수관(承文院判校 兼 春秋館 編修官)을 역임하고 이듬해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교육하였다 한다.
  건물은 창수면 인량리 16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9년 3월 11일에 문화재자료 358호로 지정되었으며, 건물의 구조는 건축당시는 ㅁ자형 집이었으나, 전면의 사랑채 부분은 화재로 인하여 소실(소실년대 미상)되어 정침 전면 좌측에 사랑채를 다시 지어 현재의 건물배치는 ㄱ자형의 정침과 사랑채로 구성되어 ㄷ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사랑방 전면에 우측 벽면을 따라 토담을 7자 남짓 설치하여 사랑채 내방객으로 하여금 안채의 시선을 차단시켜 주고 한편으로는 가옥의 내외부를 차단시켜 주고있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방, 마루, 방의 순서로 평면이 이루어져 있으며, 팔작와가 홑처마 3량가의 간결한 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고, 막돌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깔고 그 위에 방주는 세워 방주상부에는 납도리와 대들보를 장식없이 결구하고 있다.
  상부가구는 대들보 위에 각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치고 있고 마루의 상부는 연등천정으로 꾸며져 있고 안방 배면에는 곡식 등의 수납을 위한 도장방을 달아 놓았다.
  두칸 대청의 전면에는 판벽이, 후면에는 상여닫이 판장문이 두 개씩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여름은 물론 겨울의 실내온도 조절 기능까지 용이한 것으로 보아진다.
정침 우측으로는 2칸의 부엌이 있는데 원래 한칸은 외양간이었다 하나 현재는 철거되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침과 분리되어 있다. 어칸에 한칸마루를 깔고 좌우 협칸에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맞배지붕의 홑처마 납도리 3량 가구의 간략한 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16) 영덕 천전댁(川前宅)

  본 주택이 자립잡고 있는 이 마을은 옛부터 호지촌(濠池村)이라 불리어 왔는데, 이는 마을 전면의 넓은 평야를 관통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 주위에 많은 늪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고려말 목은 이색 선생이 이곳의 지형이 중국의 괴시(槐市)라는 마을과 흡사하다 하여 괴시리라 이름지었다 한다. 마을의 전면에 넓은 들이 있고 배면에 入자형 산세가 마을을 둘러싸는 入자 형국을 하고 있으며, 마을의 주된 향(向)은 서북향이며, 천전댁은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목조와가 건물로 영해면 괴시리 31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987년 6월 19일 문화재자료 378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구조를 보면 사랑채는 중문간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사랑채는 지붕을 팔작으로 올려 안채와는 격을 달리하면서 독립된 건물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전면에 반칸 규모의 퇴간을 둔 2통칸의 사랑방과 1칸의 사랑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방 우측칸 뒤에는 반칸 규모의 가묘방을 두었다.
  중문칸 좌측에는 작은사랑과 아랫방이 연접되어 있고, 작은사랑의 뒤로는 부엌으로 이어져 좌익사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로는 도장방과 안방, 부엌이 이어지면서 좌익사를, 우로는 상방과 고방이 우익사를 형성하였다.
  대량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게 하고 종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한 간결한 구조의 5량가이다.

17) 영덕 번호댁(樊湖宅)

  번호댁은 영해면 괴시리 583번지 상대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1987년 6월 19일 문화재자료 제379호로 지정되었으며, 효종 때의 유학자인 대은 권경(臺隱 權璟, 1604∼1666)의 3자의 가옥으로 18세기 말엽에 건립하였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침은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고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채를 꾸몄다.
  사랑채는 작은사랑, 큰사랑, 사랑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랑마루는 우측으로 돌출되어 날개집을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의 전면과 측면에는 나지막한 난간을 두어 격식을 갖추고 있다.
  대청은 3칸 규모로 되어 있으며 대청 좌측에는 웃방, 안방, 부엌이 연접되어 좌익사를 이루고 있으며, 우측에는 상방, 부엌, 아랫방이 우익사를 이루며 사랑채와 접하고 있다.
  정침 우측에 위치한 사당은 단칸 규모의 맞배기와 집으로, 주위에는 방형의 토담을 둘렀으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건축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8) 정담 정려비(鄭湛 旌閭碑)

  정담장군은 조선 명종 3년(1548)에 평해군 기성면 사동리(현 울진군)에서 태어났으며, 선조 16년(1583) 무과에 급제, 회령판관, 경원판관, 오위도총부 도사를 역임하고 선조 23년(1590) 청주목사로 임명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방위의 중책을 띠고 김제군수로 부임하여 웅치(熊峙)에 나가 의병장 황박(黃璞), 전라판관 이복남(李福南) 등과 연합하여 7월 7일부터 벌어진 왜적과의 격전 끝에 적의 주력부대를 격멸하고 마침내 화살이 떨어지자 육박전으로 싸워 적의 예봉은 꺽었으나 이튿날 정오경 45세의 일기로 순국하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왜병도 조선군의 충의에 감복하여 흩어진 시신을 거두어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충간의담(弔朝鮮忠肝義膽)”이라는 표말을 세웠다 라고 되어 있으며, 조정에서는 3등 공신으로 포상하고 선조 26년(1593)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에 증직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의 백사집(白沙集)에는 나의 장인 권율장군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의 공이 크다고 하지만, 그가 1,000명도 안되는 약한 군사를 데리고 10배가 넘는 대적을 맞아 잘 싸우다 죽었고, 그러므로 호남(湖南)이 보전되었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 하겠는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 및 「징비록」, 권율장군의 말, 이현일이 쓴 행장, 이휘일이 쓴 유사 등을 살펴볼 때 임진사에서 이순신, 권율, 신립 등에 못지않은 유공자로 평가되며, 영해의 향현사(鄕賢祠), 김제의 충렬사(忠烈祠), 영양의 명고서원(明皐書院)에 향사되었으나, 이들 사당은 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대부분 훼철되었다. 정려비는 1999년 12월 30일에 문화재 자료 380호로 지정되었으며, 창수면 인량리 255∼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려비는 숙종 16년(1690)에 교지가 내려와서 처음에는 인량리 가운데 목비로 세웠다. 이후에도 세차례에 걸쳐 목비로 세웠으나 퇴락함에 따라 정조 5년(1782) 마을 앞 길가에 석비로 다시 세웠다.
비의 높이는 1m, 이수고(首高)는 84cm, 좌대의 높이는 65.72cm이며,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주초 위에 원주를 세우고 정면과 측면에 홍살을 세워 내부의 비를 볼수 있게 하였고 배면은 벽체로 폐쇄하였다. 건축양식은 초익공으로 수서형 살미를 하나 얹고 주간 사이에는 소로를 2개 얹었으며 가구는 제형판대공을 세운 3량가이다. 지붕 양쪽에 풍판을 둔 맞배형이며, 내부에는 비석 1기와 정려제액문(旌閭題額文)이 뒷벽 상부에 걸려있다.

19) 대봉재사(大峯齋舍)

  대봉재사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육신 등과 화를 당한 충민공 권자신(忠愍公 權自愼, ?∼1456)을 주위(主位)로 모시고, 부제학 권자홍(權自弘)의 아들로 13세 때 영해로 유배되어 안동권씨 영해 입향조가 된 오봉 권책(五峯 權策, 1442∼?) 및 병자호란 때에 척화를 주장한 남곡 권상길(南谷 權尙吉, 1610∼1674)을 배향하는 건물이다.
  창수면 미곡리 737∼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9년 12월 30일 문화재자료 제381호로 지정된 대봉재사는 입향조 묘하(墓下)의 재사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인 추감루(追感樓)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서산각 지붕인 아랫채로 구분되어 있으며, 재사 우측에는 사각문과 토장을 두른 경모재(景慕齋)가 자리잡고 있다. 높게 축대를 쌓은 후 건물을 앉힌 관계로 정면에서 볼 때는 중층 건물인성 싶다. 추감루 앞쪽에는 대문간 부분과 양익사로 구성된 ㄷ자형 아랫채가 합해져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추감루와 양익사 사이에는 담장으로 폐쇄하였고 우측에 협문을 두어 출입하게 하였다.
  추감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로 전퇴간을 둔 중당협실형 평면이다. 가운데 마루방을 두고 좌우에 각 온돌방 1칸씩 두었으며, 뒤쪽으로 2자폭의 벽장을 내고 퇴간마루 전면에는 난간을 세웠다. 가운데 마루방은 전면쪽으로 4분합 들문을 두었으며, 뒤쪽에는 판벽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는데, 폭을 키워 제례시 이 문을 통해 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마루 좌우 협칸과 온돌방에는 고미반자를 두었으나, 어칸에는 두지 않았고 마루 좌우는 판장문으로 막았다.
  추감루는 제향시 상어른이 기거하거나 제례공간으로 활용하는 중심건물로 이에 걸맞는 위계를 갖추고 있다. 아랫채는 대문간을 중심으로 우측은 수임방(受任房), 헌관방(獻官房)인 온돌방 2칸을 두면서 우익사와 연결된다. 우익사는 부엌과 유사실(有司室)을 두었으며, 대문칸 좌측으로는 참제인실(參祭人室)인 2통간의 온돌방과 재물창고 및 재물실로 이루어진 좌익사가 구성된다. 특히 재물창고에 궁널을 끼운 쌍여닫이문은 실의 용도를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전체가 3량 구조이나 서산각 지붕을 만들기 위해 양익사의 주고를 높혔다.
  경모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루형 건물로 정면과 양측면에 퇴간을 두어 4칸 크기의 중앙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2칸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 평면이다. 2이익공 1고주 5량 구조집으로 치목수법이 매우 세밀하고 전면 내진주 3본은 모두 고주를 사용하여 퇴량은 고주 몸에 결구되고 대량은 고주 위에 얹혔다. 내진주와 결구되는 퇴량 하부에는 선각한 보아지로 보강하였으며, 종도리는 동자주 위에 장식없이 처리하였으며, 종도리는 제형판대공에 의해 지지되고 익공살미의 형상은 수서와 앙서도 구성되며 양두는 봉두로 장식하였다. 주간 사이에는 선각화반을 1구씩 넣었으며 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20) 영해 입천정(卄川亭)

  입천정은 영해면 괴시리 7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2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 숙종 때 남붕익(南鵬翼, 1541∼1687)공이 1680년경에 건축한 정자로 건축 당시는 2∼3칸 규모였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건물이 퇴락하여 빈터만 남은 것을 그의 5대손 남흥수(南興壽)가 200년 정도 지난 후 퇴락한 입천정(卄川亭)을 둘러보고 한탄한 후 여러 친족들과 힘을 모아 1887년 3월에 착공하여 1888년 9월에 현재의 규모로 복원하였다고 전하나 현 건물의 상량에는 “숭정기원후 5임인년 8월15일 유시입주 동일시상량(崇禎紀元後 五壬寅年 八月十五日 酉時立柱同日時上樑)”이라 묵서한 것을 볼 때 이때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우측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오른 산허리에 3단으로 구성된 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입천정은 방형의 토담을 두르고 별도의 공간을 이루어 자리잡고 있고, 하단의 좌측에는 마계정사(磨溪精舍)가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고, 마계정사의 하단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자형 홑처마 맞배지붕의 고직사(庫直舍)를 두고 있다.
  입천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퇴칸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퇴칸의 전면에는 계자각을 둘렀으며 마루의 전면에는 각 칸마다 4분합 들문을 설치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인데 대량(大樑)은 만곡(彎曲)된 자연재를 사용하였고 대공은 원형판대공이다.
  마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퇴칸을 둔 중당협실형이며, 마루의 전면에는 4문합 들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꾸몄다.

21) 영해 주곡댁(注谷宅)

  이 건물의 정확한 창건년대는 알 수 없으나 현소유자의 증조 남효순(南孝順, 1863∼1942)이 1919년 중수하였다 전한다. 영해면 괴시리 320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3호로 지정되었다.
  주곡댁이란 택호는 소유자의 7대조인 증가선대부호조참판 남경괄(贈嘉善大夫戶曹參判 南景适, 1772∼1835)의 처가의 동명(妻家洞名,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조씨가)을 딴 것으로 창건시기는 1772년에서 1835년 사이인 것 같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정면 5칸, 측면 6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ㅁ자형 목조와가이다.
  건물은 천전댁(문화재자료 제378호)의 전면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호지마을 주택 좌향(坐向)은 모두 서향인데 비해 도로의 서쪽에 자리한 천전댁과 주곡댁은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토담 사이로 난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침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간의 좌측에는 사랑채를 꾸미고 있고, 사랑채는 사랑마루 1칸과 사랑방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사랑마루방 뒤에는 감실방을 두어 익사를 이루며 통례칸과 연접하게 하였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고방과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은 대청쪽으로 반칸을 내밀어 1칸반 규모가 되게 하였으며, 고방의 전면에는 퇴칸과 같은 폭(幅)으로 통래마루를 두었다. 안방의 좌측에는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형성시켰다.

22) 물소와 서당(勿小窩 書堂)

  물소와 서당은 좌승지에 추증된 남택만(南澤萬, 1729∼1810)공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약 150년 전에 건축한 것으로 한때는 사당으로 활용되었다고 전한다. 영해면 괴시리 334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4호로 지정되었다.
  서당 좌측면에는 남택만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南有鎭)이 약 150년 전에 세운 물소와 고택(문화재자료 제198호)이 보존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영양남씨 괴시파종택(민속자료 제75호)의 우측에 서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 주변에는 방형의 토담을 둘렀고 정면 담장 사이에는 사주문을 세워 출입구로 삼았다.
평면은 전면에 퇴칸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퇴칸의 전면과 우측면 후면에는 툇마루를 둘렀으며 대청의 전면에는 4분합 들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으로 꾸몄다. 가구는 3량가(樑架)의 소박한 구조이다.

23) 영해 경주댁(慶州宅)

  이 건물은 남세하(南世夏, 1490∼1572)공이 인량리에서 분가, 괴시로 이주할 때 함창김씨, 수안김씨, 영해신씨 등의 4성이 한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뒤 3성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어 남씨만 남아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경주댁은 그때의 수안김씨가 살았던 건물로 전하며, 호지마을에서 천전댁과 더불어 별도의 대문채가 있는 주택 중의 하나이다.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5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해면 괴시리 33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홑처마지붕을 가진 정침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침과 정서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 경주댁도 다른 주택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서향하면서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한 이 마을 특유의 배치유형에 따르고 있다.
  사랑채는 중문 우측에 있는데, 작은사랑과 사랑마루의 측면이 연접되어 있으며, 작은 사랑방은 앞마당쪽으로 양개세살문을 달아 마당쪽에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사랑마루의 측면에서 우측 담장까지에는 앞마당과 사이에 담장을 설치하여 별도의 공간을 이루게 하였으며 담장 사이에는 작은 일각문을 세워 출입구를 만들었다. 사랑채는 좌로부터 1칸 규모의 사랑마루와 방, 반칸규모의 감실이 연접되어 있는데, 사랑마루의 전면과 좌측면에는 판벽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었으며,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 2칸의 대청을 꾸몄는데 대청의 좌우에는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다. 안채는 다른 주택들이 모두 반겹집, 겹집의 평면을 이루는데 비해 홑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고(柱高) 또한 다른 집에 비해 현저히 낮은 편이다.
  좌익사는 마루바닥을 한 안고방과 안방, 부엌이 연접되어 있다.

24) 영해 구계댁(邱溪宅)

  이 건물은 졸헌 남경악(拙軒 南景岳, 1763∼1821)공이 1805년경에 건축하였으며, 그의 현손(玄孫)인 남경목(南敬穆)이 1910년경 중수하였다고 한다. 영해면 괴시리 351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에 문화재자료 제396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6칸의 홑처마 지붕으로 호지마을의 다른 주택들이 자연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서향하여 자리잡은 관계로 종택을 제외하고는 채광을 고려하여 사랑채 부분은 우측에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구계댁도 마찬가지로 서향하면서 사랑채는 남향하여 배치한 이 마을 특유의 배치유형을 따르고 있다.
  남향한 사랑채는 전면에 정면 3칸 규모인데 좌측의 사랑마루는 정면쪽으로 1칸이 돌출되어 있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으며, 사랑마루방의 전면의 마루는 퇴칸보다 다소 길게 내밀었다.
안채의 평면은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평면은 마당폭과 같은 정면 2칸을 2통칸의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꾸미고 안방의 좌측에는 부엌을, 우측에는 건너방을 각각 배치하였다.
  부엌의 뒤에는 마루를 깐 고방을 두어 안방에서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건너방 앞에는 1칸 규모의 마루를 깔고 마루의 전면에는 난간을 세웠다. 건너방 앞에 이러한 마루는 영덕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통래마루칸(통칸)으로 볼 수 있는데, 보통의 경우 이런 마루는 반칸 규모인데 비해 이 집에서는 1칸 규모의 넓은 마루를 채택하였고, 따라서 대청은 전체적으로 ㄴ자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25) 괴시리 괴정(槐亭)

  이 정자는 조선 영조42년(1766)에 괴정 남준형(槐亭 南峻衡)공이 고려말 명유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名儒 稼亭 李穀, 牧隱 李穡)의 유허지인 이곳에 괴정을 창건하여 경목재(景牧齋)라 하고, 연못을 파고 괴류(槐柳)를 심고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한다.
  공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상전(桑田)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 가난과 고달픔을 극복하여 꿋꿋하게 살았다 하며, 영조 29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경전과 역사를 깨우치며 자오(自娛)하였다 하며, 부(府)의 상혜청(常惠廳) 재산이 아전들의 사유로 농락되자 향노(鄕老)들과 의논하여 이들 바로잡고 절약하여, 백성들의 세금를 감면케 하는 등 민생에 전력하여 향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2000년 9월 4일에 문화재자료 제397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해면 괴시리 30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4칸, 측면 2칸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괴정 중건기(重建記)에 의하면 순조17년(1817)에 중건하였고 이후에 고종13년(1876)에 중수하였다 하며 이때 지은 주사 (廚舍)는 1960년도에 도괴되었고, 상량문에 “영묘병술창건후 231년 세차병자윤 3월 13일중건진시입주(英廟丙戌創建後 二百三十一年 歲次丙子閏三月十三日 重建辰時立柱)”라 되었는데, 잘못된 기록으로 보이며, 현재의 건물은 창건 당시의 원형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은 정자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면에 반칸 폭의 퇴칸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가운데 2칸 마루는 앞쪽으로 4분합 들문을 달고 뒤쪽에는 파문과 판벽을 설치하여 외관상 폐쇄된 마루방이나 필요시 공간을 개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좌우에는 동일 규모의 온돌방을 두면서 출입이 용의하도록 퇴를 설치하여 앞쪽 퇴칸과 연결시켜 측면 동선이 원활하게 하였다.
  입면은 전면 주열(柱列)만 원주를 세워 정면성이 강하며 상부가구는 판대공을 세운 5량 구조이다.
전면과 퇴칸 양측면 및 마루 배면쪽은 무익공 소로수장으로 장식하였고 방 부분은 굴도리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종량은 접시받침으로 지지되고 있으며, 양방향과 도리방향으로는 선각하지 않은 뺄목으로 보강하였다.

26) 각리 언곡재(角里 彦谷齋)

  이 재사는 안동권씨 부정공파(安東權氏 副正公派) 영해입향조인 오봉 권책(五峯 權策)의 아들 권인형(權仁衡)과 손자 권세평(權世平)의 분암(墳庵)이다. 권인형과 권세평은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학덕을 쌓는 한편, 부모의 생존사후(生存死後)를 한결같은 지극한 효성으로 원근에 이름이 났다 한다.
병곡면 각리 668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홑처마 와가지붕으로 대지의 경사에 따라 기단을 조성한 후 건물을 앉히고 있다.
  평면구성은 전면 통래칸을 중심으로 우측에 2칸 온돌방, 좌측의 마구자리는 현재는 부엌으로 개조되었다. 우측사는 앞쪽의 온돌방 보다 방바닥이 2자 정도 높으나 과거에는 앞쪽 온돌방과 높이가 같았다 하며, 용도는 유사실이라 한다. 유사실과 연하는 뒷방은 재물고라 한다. 유사실과 재물고는 통래칸을 통하지 않고 바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우측쪽으로 출입문을 하나씩 두었다.
  일반적인 재물고인 경우 수장기능에 맞게 판벽과 마루로 이루어지나 이곳에서는 온돌방과 심벽, 세살문으로 이루어져 개조된 듯하다.
  부엌과 연결되는 좌익사에는 부엌과, 익사와 정침이 걸쳐진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정침부분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자리하는 일반적인 평면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대청 뒤쪽 벽체가 판벽으로 마감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여기에서는 폐쇄성이 강한 심벽으로 마감되었고 하부에 마름을 두었다.
  상부구조는 전체가 3량가이며, 정침 대청상부만 판대공을 두고 그 외 부분은 방형동자주를 얹었으며 정침 양쪽 온돌방은 더그매가 노출되어 있다.

27) 오촌리 갈암고택(葛菴古宅)

  갈암고택은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영남학파의 거두인 성리학자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 1627∼1704)의 고택으로 갈암선생이 중형인 존재 이휘일공과 임난으로 황폐화된 오촌리 마을 개척 때에 건축된 것이라 하며, 거주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수면 오촌리 22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0년 9월 4일에 문화재자료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홑처마 목조와가로 ㅁ자형 건물이다. 오촌리 마을 뒷편에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남서향으로 배치되었으며 마을의 입구에는 존재종택(문화재자료 제293호)이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ㅁ자형 정침만 있으나 전에는 정침 좌측에 방앗간채, 우측 뒷편에 사당이 있었다 한다. 사당은 1998년 8월 태풍으로 붕괴되었다.
건물의 구성은 뒷편 안채부분이 높고 앞부분이 낮은 지붕구조이나, 전면 우측의 사랑방은 팔작으로 따로 지붕을 높다랗게 구성하여 사랑공간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어 조선 후기 이후 사랑채가 발달한 상류 주거모습을 보여준다.
평면구성은 건물 앞쪽에는 각 2칸의 사랑방 및 사랑대청을 꾸몄다. 사랑대청이 2칸일 경우 사랑방과 평행하게 배치하여 날개집으로 꾸미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러한 통례를 따르지 않고 90도 꺽어 사랑대청을 꾸몄다. 이러한 연유로 대청 상부구조의 결구가 비정상적으로 처리되었다. 사랑대청끝에 중방을 두어 사랑공간에 포함시켰으며, 사랑방 배면에 1칸 규모의 반침이 설치되어 있다.
안채부분은 정면이 5칸인 관계로 안방을 가로로 두지 못하고 세로로 배치하였는데, 그 때문에 안대청이 3칸으로 넓직하게 되었다. 안방 뒤에는 뒤주를 설치하였고, 대청 우측에 건너방을 마련하고 앞에는 영덕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부와 연결되는 좁다란 통래마루를 두었다. 안방 뒤주 상부에는 수장고를 만들었으나, 건너방 상부는 수장시설이 없고 더그매도 치지않아 상부가구의 결구된 모습이 노출되어 있다.
안채, 외양간 기둥 등에서 자귀를 사용한 치목수법이 보이나 사랑대청과 사랑방쪽에는 부재상태 및 대공의 형태에서 조선 말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어 사랑채 부분이 후대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