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계종택(愚溪宗宅)
선조 때 재령이씨 입향조인 이애의 손자인 의령현감 운악 이함(雲嶽 李涵, 忠孝堂)의 차남인 선교랑 우계 이시형(愚溪 李時亨)의 살림집으로, 이애가 초창한 고택을 철거하고, 선조 39년(1606)에 우계공이 살림집으로 건립한 것으로 약 400여 년간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우계공은 선조 19년(1586)에 인량에서 출생, 풍채가 준수하고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며, 학문과 재능이 뛰어났으며, 삼년간 가친의 병을 지성으로 간호하여 효가 극진하였으며, 가친 운악 이함공이 의령현감으로 부임할 때 우계공에게 가사를 위임할 정도였다. 당시 영해부내 어떤 시비가 있어 공이 20세의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글을 보내 화해를 가능하게 하였으니, 그 문장이 간명하여 글을 본 사람은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공은 27세 되던 해인 광해군 4년(1612)에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동의 외가(주촌, 周村)에서 별세하였으며, 부인 무안박씨 무의공 따님은 시부모 봉양에 극진하던 중 지아비의 상을 당하자 음식을 들지 않고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하며, 시어머니가 죽자 성복(成服)을 마치고 자결하니 나라에서 정열 표창(貞烈 表彰)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창수면 인량리 438∼1번지에 위치하며 1995년 6월 19일 문화재자료 제307호로 지정된 것으로 정면 6칸, 배면 3칸, 측면 4칸의 ㅁ자형 목조와가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5칸의 ㅁ자형의 목조와가로 막돌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운 건물이다.
안채 중앙 어간에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건너방이 배치되고 안방 후면에는 벽장을 설치하였다. 건너방 전면에는 마루를 두어 후정(後庭)으로 통하는 출입구로 이용하였다. 사랑방은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마루로 되어 있고 대문간 좌측에는 마구간을 두고 그 옆에는 곳간을 두어 양식을 저장하여 부엌과 연결시켜 놓았다.
별채는 정자를 두고 외부 손님을 접대한 곳으로 이용되었으며,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막돌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다. 건립 당시에는 대문채 및 행랑채가 있었다 하나 철거되었다.
13) 돈수재(遯峀齋)
돈수재는 영덕에 세거한 수안김씨 부장공파(部長公派)의 종택으로 유학자이며 경재구휼(傾財救恤)한 공로가 많았던 돈수 김덕유(遯峀 金德裕, 1694∼1767)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인 김정련(金鼎鍊, 1783∼1862)이 1804년에 건립한 주택이다. 건물의 건립에는 사림과 주민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다고 하며, 1980년도에 중수를 하였으나, 건물은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요소가 강하게 풍기며 현재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건물은 지품면 송천리 124∼2번지에 위치하며, 1995년 12월 1일에 문화재자료 제316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6칸, 배면 4칸, 측면 5칸반의 ㅁ자형 목조와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중문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채를 우측에는 문간방 아랫방을 두고 뒤쪽에는 안채를 꾸몄으며, 전면의 사랑마루와 아랫방은 좌우로 돌출되어 양날개집으로 되어 있어 전면의 6칸이 되어 앞에서 바라보면 제법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채는 기단을 다소 높게 조성한 후 다시 바닥면을 3자 가량 올려 온돌방과 마루를 꾸미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평면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田자형인데, 좌측간은 전·후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깔아 사랑마루를 꾸몄으며, 우측간에는 4짝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과 책방을 전·후로 배치하였다. 사랑채 뒤에는 통래간을 사이에 두고 곳간과 상방을 두어 안채와 연접되게 하였다. 칸은 2칸 규모인데 좌측 1칸은 안마당을 면하고 있으나, 뒤쪽의 1칸은 안대청쪽으로 들어가 있는데,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으며 벽체는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대청은 전면 뜰의 폭과 같이 하여 2칸의 칸살을 잡았는데, 전면 가운데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우측에는 축이 꺽이어 도장과 2통칸의 안방 그리고 역시 2통칸의 정지가 연접되어 있다. 정지는 2통칸의 비교적 큰 규모로 계획된 까닭에 우측면은 건물의 전면에 면하고 있는데, 좌측에는 문간방을 두어 중문과 접하게 하였으며, 우측에는 아랫방을 두어 날개를 형성하였다.
상부가구는 대량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그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는 간결한 구조의 5량가로 구성되어 있다.
14) 목사공 종택(牧使公 宗宅)
목사공 농아당 박홍장(聾啞堂 朴弘長, 1558∼1598)은 연일현감 박세렴(朴世廉)의 아들로 영해면 원구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조선 선조 13년(1580) 무과에 급제 아이만호, 제주판관, 대구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선조 24년(1592) 임진왜란 때에 무장으로 활약하다 4년후인 1596년 임진왜란의 타개를 위하여 처음으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할 때 부사로 참여하였다. 이때 풍신수길(豊臣秀吉)이 통신사 일행에 대해 여러 가지 압박을 가하려 하자 그는 이에 대항하여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나라를 위해 의기를 굽히지 않았다 하며, 귀국 후 상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종택은 칠성리 마을 한가운데인 축산면 칠성리 16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산하여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는 우측에 사랑채가 있었다 하나 퇴락하여 철거되고 현재는 안채만 남아있다. 1996년 7월 16일에 문화재자료 제320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반,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 집인데, 막돌쌓기한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운 후 5량가의 가구를 결구하였고, 겹으로 구성된 건물로 전열에는 좌로부터 사랑방, 마루, 통로, 정지방을, 후열에는 도장방, 안방, 부엌을 각각 배치하였으며, 전면과 좌측면에는 퇴를 달아 헌함을 둘렀다.
좌측의 방들은 전열에는 사랑방과 마루를, 후열에는 도장방과 안방을 두어 田자형을 이루었는데 이러한 형태는 강원도지방의 온돌중심형 겹집평면에서 앞쪽의 방1칸이 마루로 대체된 형식이다.
와가까치구멍집으로서 마루가 수용된 온돌중심형 겹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북부지방의 온돌중심 주거문화와 남부의 마루중심 생활양식이 절충된 형태로서, 지역적인 측면에서 민가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초가의 까치집과 유사한 형태인 천정(天井) 투창(透窓)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15) 강파헌 정침(江坡軒 正寢)
이 건물은 숙종 때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강파 권상임(江坡 權尙任, 1622∼1700)공이 건립한 살림집으로 공은 인량리에서 출생하여 현종10년(166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공조정랑, 예조정랑, 해남현감, 풍기군수 등의 관직과, 1692년에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 편수관(承文院判校 兼 春秋館 編修官)을 역임하고 이듬해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교육하였다 한다.
건물은 창수면 인량리 16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9년 3월 11일에 문화재자료 358호로 지정되었으며, 건물의 구조는 건축당시는 ㅁ자형 집이었으나, 전면의 사랑채 부분은 화재로 인하여 소실(소실년대 미상)되어 정침 전면 좌측에 사랑채를 다시 지어 현재의 건물배치는 ㄱ자형의 정침과 사랑채로 구성되어 ㄷ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사랑방 전면에 우측 벽면을 따라 토담을 7자 남짓 설치하여 사랑채 내방객으로 하여금 안채의 시선을 차단시켜 주고 한편으로는 가옥의 내외부를 차단시켜 주고있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방, 마루, 방의 순서로 평면이 이루어져 있으며, 팔작와가 홑처마 3량가의 간결한 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고, 막돌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깔고 그 위에 방주는 세워 방주상부에는 납도리와 대들보를 장식없이 결구하고 있다.
상부가구는 대들보 위에 각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치고 있고 마루의 상부는 연등천정으로 꾸며져 있고 안방 배면에는 곡식 등의 수납을 위한 도장방을 달아 놓았다.
두칸 대청의 전면에는 판벽이, 후면에는 상여닫이 판장문이 두 개씩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여름은 물론 겨울의 실내온도 조절 기능까지 용이한 것으로 보아진다.
정침 우측으로는 2칸의 부엌이 있는데 원래 한칸은 외양간이었다 하나 현재는 철거되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침과 분리되어 있다. 어칸에 한칸마루를 깔고 좌우 협칸에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맞배지붕의 홑처마 납도리 3량 가구의 간략한 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16) 영덕 천전댁(川前宅)
본 주택이 자립잡고 있는 이 마을은 옛부터 호지촌(濠池村)이라 불리어 왔는데, 이는 마을 전면의 넓은 평야를 관통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 주위에 많은 늪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고려말 목은 이색 선생이 이곳의 지형이 중국의 괴시(槐市)라는 마을과 흡사하다 하여 괴시리라 이름지었다 한다. 마을의 전면에 넓은 들이 있고 배면에 入자형 산세가 마을을 둘러싸는 入자 형국을 하고 있으며, 마을의 주된 향(向)은 서북향이며, 천전댁은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목조와가 건물로 영해면 괴시리 31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987년 6월 19일 문화재자료 378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구조를 보면 사랑채는 중문간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사랑채는 지붕을 팔작으로 올려 안채와는 격을 달리하면서 독립된 건물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전면에 반칸 규모의 퇴간을 둔 2통칸의 사랑방과 1칸의 사랑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방 우측칸 뒤에는 반칸 규모의 가묘방을 두었다.
중문칸 좌측에는 작은사랑과 아랫방이 연접되어 있고, 작은사랑의 뒤로는 부엌으로 이어져 좌익사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로는 도장방과 안방, 부엌이 이어지면서 좌익사를, 우로는 상방과 고방이 우익사를 형성하였다.
대량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게 하고 종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한 간결한 구조의 5량가이다.
17) 영덕 번호댁(樊湖宅)
번호댁은 영해면 괴시리 583번지 상대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1987년 6월 19일 문화재자료 제379호로 지정되었으며, 효종 때의 유학자인 대은 권경(臺隱 權璟, 1604∼1666)의 3자의 가옥으로 18세기 말엽에 건립하였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침은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고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채를 꾸몄다.
사랑채는 작은사랑, 큰사랑, 사랑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랑마루는 우측으로 돌출되어 날개집을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의 전면과 측면에는 나지막한 난간을 두어 격식을 갖추고 있다.
대청은 3칸 규모로 되어 있으며 대청 좌측에는 웃방, 안방, 부엌이 연접되어 좌익사를 이루고 있으며, 우측에는 상방, 부엌, 아랫방이 우익사를 이루며 사랑채와 접하고 있다.
정침 우측에 위치한 사당은 단칸 규모의 맞배기와 집으로, 주위에는 방형의 토담을 둘렀으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건축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8) 정담 정려비(鄭湛 旌閭碑)
정담장군은 조선 명종 3년(1548)에 평해군 기성면 사동리(현 울진군)에서 태어났으며, 선조 16년(1583) 무과에 급제, 회령판관, 경원판관, 오위도총부 도사를 역임하고 선조 23년(1590) 청주목사로 임명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방위의 중책을 띠고 김제군수로 부임하여 웅치(熊峙)에 나가 의병장 황박(黃璞), 전라판관 이복남(李福南) 등과 연합하여 7월 7일부터 벌어진 왜적과의 격전 끝에 적의 주력부대를 격멸하고 마침내 화살이 떨어지자 육박전으로 싸워 적의 예봉은 꺽었으나 이튿날 정오경 45세의 일기로 순국하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왜병도 조선군의 충의에 감복하여 흩어진 시신을 거두어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충간의담(弔朝鮮忠肝義膽)”이라는 표말을 세웠다 라고 되어 있으며, 조정에서는 3등 공신으로 포상하고 선조 26년(1593)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에 증직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의 백사집(白沙集)에는 나의 장인 권율장군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의 공이 크다고 하지만, 그가 1,000명도 안되는 약한 군사를 데리고 10배가 넘는 대적을 맞아 잘 싸우다 죽었고, 그러므로 호남(湖南)이 보전되었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 하겠는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 및 「징비록」, 권율장군의 말, 이현일이 쓴 행장, 이휘일이 쓴 유사 등을 살펴볼 때 임진사에서 이순신, 권율, 신립 등에 못지않은 유공자로 평가되며, 영해의 향현사(鄕賢祠), 김제의 충렬사(忠烈祠), 영양의 명고서원(明皐書院)에 향사되었으나, 이들 사당은 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대부분 훼철되었다. 정려비는 1999년 12월 30일에 문화재 자료 380호로 지정되었으며, 창수면 인량리 255∼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려비는 숙종 16년(1690)에 교지가 내려와서 처음에는 인량리 가운데 목비로 세웠다. 이후에도 세차례에 걸쳐 목비로 세웠으나 퇴락함에 따라 정조 5년(1782) 마을 앞 길가에 석비로 다시 세웠다.
비의 높이는 1m, 이수고(首高)는 84cm, 좌대의 높이는 65.72cm이며,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주초 위에 원주를 세우고 정면과 측면에 홍살을 세워 내부의 비를 볼수 있게 하였고 배면은 벽체로 폐쇄하였다. 건축양식은 초익공으로 수서형 살미를 하나 얹고 주간 사이에는 소로를 2개 얹었으며 가구는 제형판대공을 세운 3량가이다. 지붕 양쪽에 풍판을 둔 맞배형이며, 내부에는 비석 1기와 정려제액문(旌閭題額文)이 뒷벽 상부에 걸려있다.
19) 대봉재사(大峯齋舍)
대봉재사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육신 등과 화를 당한 충민공 권자신(忠愍公 權自愼, ?∼1456)을 주위(主位)로 모시고, 부제학 권자홍(權自弘)의 아들로 13세 때 영해로 유배되어 안동권씨 영해 입향조가 된 오봉 권책(五峯 權策, 1442∼?) 및 병자호란 때에 척화를 주장한 남곡 권상길(南谷 權尙吉, 1610∼1674)을 배향하는 건물이다.
창수면 미곡리 737∼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9년 12월 30일 문화재자료 제381호로 지정된 대봉재사는 입향조 묘하(墓下)의 재사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인 추감루(追感樓)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서산각 지붕인 아랫채로 구분되어 있으며, 재사 우측에는 사각문과 토장을 두른 경모재(景慕齋)가 자리잡고 있다. 높게 축대를 쌓은 후 건물을 앉힌 관계로 정면에서 볼 때는 중층 건물인성 싶다. 추감루 앞쪽에는 대문간 부분과 양익사로 구성된 ㄷ자형 아랫채가 합해져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추감루와 양익사 사이에는 담장으로 폐쇄하였고 우측에 협문을 두어 출입하게 하였다.
추감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로 전퇴간을 둔 중당협실형 평면이다. 가운데 마루방을 두고 좌우에 각 온돌방 1칸씩 두었으며, 뒤쪽으로 2자폭의 벽장을 내고 퇴간마루 전면에는 난간을 세웠다. 가운데 마루방은 전면쪽으로 4분합 들문을 두었으며, 뒤쪽에는 판벽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는데, 폭을 키워 제례시 이 문을 통해 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마루 좌우 협칸과 온돌방에는 고미반자를 두었으나, 어칸에는 두지 않았고 마루 좌우는 판장문으로 막았다.
추감루는 제향시 상어른이 기거하거나 제례공간으로 활용하는 중심건물로 이에 걸맞는 위계를 갖추고 있다. 아랫채는 대문간을 중심으로 우측은 수임방(受任房), 헌관방(獻官房)인 온돌방 2칸을 두면서 우익사와 연결된다. 우익사는 부엌과 유사실(有司室)을 두었으며, 대문칸 좌측으로는 참제인실(參祭人室)인 2통간의 온돌방과 재물창고 및 재물실로 이루어진 좌익사가 구성된다. 특히 재물창고에 궁널을 끼운 쌍여닫이문은 실의 용도를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전체가 3량 구조이나 서산각 지붕을 만들기 위해 양익사의 주고를 높혔다.
경모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루형 건물로 정면과 양측면에 퇴간을 두어 4칸 크기의 중앙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2칸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 평면이다. 2이익공 1고주 5량 구조집으로 치목수법이 매우 세밀하고 전면 내진주 3본은 모두 고주를 사용하여 퇴량은 고주 몸에 결구되고 대량은 고주 위에 얹혔다. 내진주와 결구되는 퇴량 하부에는 선각한 보아지로 보강하였으며, 종도리는 동자주 위에 장식없이 처리하였으며, 종도리는 제형판대공에 의해 지지되고 익공살미의 형상은 수서와 앙서도 구성되며 양두는 봉두로 장식하였다. 주간 사이에는 선각화반을 1구씩 넣었으며 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20) 영해 입천정(卄川亭)
입천정은 영해면 괴시리 7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2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 숙종 때 남붕익(南鵬翼, 1541∼1687)공이 1680년경에 건축한 정자로 건축 당시는 2∼3칸 규모였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건물이 퇴락하여 빈터만 남은 것을 그의 5대손 남흥수(南興壽)가 200년 정도 지난 후 퇴락한 입천정(卄川亭)을 둘러보고 한탄한 후 여러 친족들과 힘을 모아 1887년 3월에 착공하여 1888년 9월에 현재의 규모로 복원하였다고 전하나 현 건물의 상량에는 “숭정기원후 5임인년 8월15일 유시입주 동일시상량(崇禎紀元後 五壬寅年 八月十五日 酉時立柱同日時上樑)”이라 묵서한 것을 볼 때 이때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우측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오른 산허리에 3단으로 구성된 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입천정은 방형의 토담을 두르고 별도의 공간을 이루어 자리잡고 있고, 하단의 좌측에는 마계정사(磨溪精舍)가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고, 마계정사의 하단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자형 홑처마 맞배지붕의 고직사(庫直舍)를 두고 있다.
입천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퇴칸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퇴칸의 전면에는 계자각을 둘렀으며 마루의 전면에는 각 칸마다 4분합 들문을 설치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인데 대량(大樑)은 만곡(彎曲)된 자연재를 사용하였고 대공은 원형판대공이다.
마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퇴칸을 둔 중당협실형이며, 마루의 전면에는 4문합 들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꾸몄다.
21) 영해 주곡댁(注谷宅)
이 건물의 정확한 창건년대는 알 수 없으나 현소유자의 증조 남효순(南孝順, 1863∼1942)이 1919년 중수하였다 전한다. 영해면 괴시리 320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3호로 지정되었다.
주곡댁이란 택호는 소유자의 7대조인 증가선대부호조참판 남경괄(贈嘉善大夫戶曹參判 南景适, 1772∼1835)의 처가의 동명(妻家洞名,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조씨가)을 딴 것으로 창건시기는 1772년에서 1835년 사이인 것 같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정면 5칸, 측면 6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ㅁ자형 목조와가이다.
건물은 천전댁(문화재자료 제378호)의 전면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호지마을 주택 좌향(坐向)은 모두 서향인데 비해 도로의 서쪽에 자리한 천전댁과 주곡댁은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토담 사이로 난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침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간의 좌측에는 사랑채를 꾸미고 있고, 사랑채는 사랑마루 1칸과 사랑방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사랑마루방 뒤에는 감실방을 두어 익사를 이루며 통례칸과 연접하게 하였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고방과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은 대청쪽으로 반칸을 내밀어 1칸반 규모가 되게 하였으며, 고방의 전면에는 퇴칸과 같은 폭(幅)으로 통래마루를 두었다. 안방의 좌측에는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형성시켰다.
22) 물소와 서당(勿小窩 書堂)
물소와 서당은 좌승지에 추증된 남택만(南澤萬, 1729∼1810)공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약 150년 전에 건축한 것으로 한때는 사당으로 활용되었다고 전한다. 영해면 괴시리 334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4호로 지정되었다.
서당 좌측면에는 남택만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南有鎭)이 약 150년 전에 세운 물소와 고택(문화재자료 제198호)이 보존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영양남씨 괴시파종택(민속자료 제75호)의 우측에 서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 주변에는 방형의 토담을 둘렀고 정면 담장 사이에는 사주문을 세워 출입구로 삼았다.
평면은 전면에 퇴칸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퇴칸의 전면과 우측면 후면에는 툇마루를 둘렀으며 대청의 전면에는 4분합 들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으로 꾸몄다. 가구는 3량가(樑架)의 소박한 구조이다.
23) 영해 경주댁(慶州宅)
이 건물은 남세하(南世夏, 1490∼1572)공이 인량리에서 분가, 괴시로 이주할 때 함창김씨, 수안김씨, 영해신씨 등의 4성이 한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뒤 3성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어 남씨만 남아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경주댁은 그때의 수안김씨가 살았던 건물로 전하며, 호지마을에서 천전댁과 더불어 별도의 대문채가 있는 주택 중의 하나이다.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5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해면 괴시리 33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홑처마지붕을 가진 정침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침과 정서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 경주댁도 다른 주택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서향하면서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한 이 마을 특유의 배치유형에 따르고 있다.
사랑채는 중문 우측에 있는데, 작은사랑과 사랑마루의 측면이 연접되어 있으며, 작은 사랑방은 앞마당쪽으로 양개세살문을 달아 마당쪽에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사랑마루의 측면에서 우측 담장까지에는 앞마당과 사이에 담장을 설치하여 별도의 공간을 이루게 하였으며 담장 사이에는 작은 일각문을 세워 출입구를 만들었다. 사랑채는 좌로부터 1칸 규모의 사랑마루와 방, 반칸규모의 감실이 연접되어 있는데, 사랑마루의 전면과 좌측면에는 판벽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었으며,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 2칸의 대청을 꾸몄는데 대청의 좌우에는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다. 안채는 다른 주택들이 모두 반겹집, 겹집의 평면을 이루는데 비해 홑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고(柱高) 또한 다른 집에 비해 현저히 낮은 편이다.
좌익사는 마루바닥을 한 안고방과 안방, 부엌이 연접되어 있다.
24) 영해 구계댁(邱溪宅)
이 건물은 졸헌 남경악(拙軒 南景岳, 1763∼1821)공이 1805년경에 건축하였으며, 그의 현손(玄孫)인 남경목(南敬穆)이 1910년경 중수하였다고 한다. 영해면 괴시리 351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에 문화재자료 제396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6칸의 홑처마 지붕으로 호지마을의 다른 주택들이 자연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서향하여 자리잡은 관계로 종택을 제외하고는 채광을 고려하여 사랑채 부분은 우측에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구계댁도 마찬가지로 서향하면서 사랑채는 남향하여 배치한 이 마을 특유의 배치유형을 따르고 있다.
남향한 사랑채는 전면에 정면 3칸 규모인데 좌측의 사랑마루는 정면쪽으로 1칸이 돌출되어 있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으며, 사랑마루방의 전면의 마루는 퇴칸보다 다소 길게 내밀었다.
안채의 평면은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평면은 마당폭과 같은 정면 2칸을 2통칸의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꾸미고 안방의 좌측에는 부엌을, 우측에는 건너방을 각각 배치하였다.
부엌의 뒤에는 마루를 깐 고방을 두어 안방에서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건너방 앞에는 1칸 규모의 마루를 깔고 마루의 전면에는 난간을 세웠다. 건너방 앞에 이러한 마루는 영덕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통래마루칸(통칸)으로 볼 수 있는데, 보통의 경우 이런 마루는 반칸 규모인데 비해 이 집에서는 1칸 규모의 넓은 마루를 채택하였고, 따라서 대청은 전체적으로 ㄴ자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25) 괴시리 괴정(槐亭)
이 정자는 조선 영조42년(1766)에 괴정 남준형(槐亭 南峻衡)공이 고려말 명유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名儒 稼亭 李穀, 牧隱 李穡)의 유허지인 이곳에 괴정을 창건하여 경목재(景牧齋)라 하고, 연못을 파고 괴류(槐柳)를 심고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한다.
공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상전(桑田)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 가난과 고달픔을 극복하여 꿋꿋하게 살았다 하며, 영조 29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경전과 역사를 깨우치며 자오(自娛)하였다 하며, 부(府)의 상혜청(常惠廳) 재산이 아전들의 사유로 농락되자 향노(鄕老)들과 의논하여 이들 바로잡고 절약하여, 백성들의 세금를 감면케 하는 등 민생에 전력하여 향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2000년 9월 4일에 문화재자료 제397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해면 괴시리 30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4칸, 측면 2칸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괴정 중건기(重建記)에 의하면 순조17년(1817)에 중건하였고 이후에 고종13년(1876)에 중수하였다 하며 이때 지은 주사 (廚舍)는 1960년도에 도괴되었고, 상량문에 “영묘병술창건후 231년 세차병자윤 3월 13일중건진시입주(英廟丙戌創建後 二百三十一年 歲次丙子閏三月十三日 重建辰時立柱)”라 되었는데, 잘못된 기록으로 보이며, 현재의 건물은 창건 당시의 원형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은 정자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면에 반칸 폭의 퇴칸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가운데 2칸 마루는 앞쪽으로 4분합 들문을 달고 뒤쪽에는 파문과 판벽을 설치하여 외관상 폐쇄된 마루방이나 필요시 공간을 개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좌우에는 동일 규모의 온돌방을 두면서 출입이 용의하도록 퇴를 설치하여 앞쪽 퇴칸과 연결시켜 측면 동선이 원활하게 하였다.
입면은 전면 주열(柱列)만 원주를 세워 정면성이 강하며 상부가구는 판대공을 세운 5량 구조이다.
전면과 퇴칸 양측면 및 마루 배면쪽은 무익공 소로수장으로 장식하였고 방 부분은 굴도리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종량은 접시받침으로 지지되고 있으며, 양방향과 도리방향으로는 선각하지 않은 뺄목으로 보강하였다.
26) 각리 언곡재(角里 彦谷齋)
이 재사는 안동권씨 부정공파(安東權氏 副正公派) 영해입향조인 오봉 권책(五峯 權策)의 아들 권인형(權仁衡)과 손자 권세평(權世平)의 분암(墳庵)이다. 권인형과 권세평은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학덕을 쌓는 한편, 부모의 생존사후(生存死後)를 한결같은 지극한 효성으로 원근에 이름이 났다 한다.
병곡면 각리 668번지에 위치하며, 2000년 9월 4일 문화재자료 제39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홑처마 와가지붕으로 대지의 경사에 따라 기단을 조성한 후 건물을 앉히고 있다.
평면구성은 전면 통래칸을 중심으로 우측에 2칸 온돌방, 좌측의 마구자리는 현재는 부엌으로 개조되었다. 우측사는 앞쪽의 온돌방 보다 방바닥이 2자 정도 높으나 과거에는 앞쪽 온돌방과 높이가 같았다 하며, 용도는 유사실이라 한다. 유사실과 연하는 뒷방은 재물고라 한다. 유사실과 재물고는 통래칸을 통하지 않고 바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우측쪽으로 출입문을 하나씩 두었다.
일반적인 재물고인 경우 수장기능에 맞게 판벽과 마루로 이루어지나 이곳에서는 온돌방과 심벽, 세살문으로 이루어져 개조된 듯하다.
부엌과 연결되는 좌익사에는 부엌과, 익사와 정침이 걸쳐진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정침부분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자리하는 일반적인 평면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대청 뒤쪽 벽체가 판벽으로 마감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여기에서는 폐쇄성이 강한 심벽으로 마감되었고 하부에 마름을 두었다.
상부구조는 전체가 3량가이며, 정침 대청상부만 판대공을 두고 그 외 부분은 방형동자주를 얹었으며 정침 양쪽 온돌방은 더그매가 노출되어 있다.
27) 오촌리 갈암고택(葛菴古宅)
갈암고택은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영남학파의 거두인 성리학자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 1627∼1704)의 고택으로 갈암선생이 중형인 존재 이휘일공과 임난으로 황폐화된 오촌리 마을 개척 때에 건축된 것이라 하며, 거주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수면 오촌리 229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0년 9월 4일에 문화재자료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홑처마 목조와가로 ㅁ자형 건물이다. 오촌리 마을 뒷편에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남서향으로 배치되었으며 마을의 입구에는 존재종택(문화재자료 제293호)이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ㅁ자형 정침만 있으나 전에는 정침 좌측에 방앗간채, 우측 뒷편에 사당이 있었다 한다. 사당은 1998년 8월 태풍으로 붕괴되었다.
건물의 구성은 뒷편 안채부분이 높고 앞부분이 낮은 지붕구조이나, 전면 우측의 사랑방은 팔작으로 따로 지붕을 높다랗게 구성하여 사랑공간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어 조선 후기 이후 사랑채가 발달한 상류 주거모습을 보여준다.
평면구성은 건물 앞쪽에는 각 2칸의 사랑방 및 사랑대청을 꾸몄다. 사랑대청이 2칸일 경우 사랑방과 평행하게 배치하여 날개집으로 꾸미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러한 통례를 따르지 않고 90도 꺽어 사랑대청을 꾸몄다. 이러한 연유로 대청 상부구조의 결구가 비정상적으로 처리되었다. 사랑대청끝에 중방을 두어 사랑공간에 포함시켰으며, 사랑방 배면에 1칸 규모의 반침이 설치되어 있다.
안채부분은 정면이 5칸인 관계로 안방을 가로로 두지 못하고 세로로 배치하였는데, 그 때문에 안대청이 3칸으로 넓직하게 되었다. 안방 뒤에는 뒤주를 설치하였고, 대청 우측에 건너방을 마련하고 앞에는 영덕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부와 연결되는 좁다란 통래마루를 두었다. 안방 뒤주 상부에는 수장고를 만들었으나, 건너방 상부는 수장시설이 없고 더그매도 치지않아 상부가구의 결구된 모습이 노출되어 있다.
안채, 외양간 기둥 등에서 자귀를 사용한 치목수법이 보이나 사랑대청과 사랑방쪽에는 부재상태 및 대공의 형태에서 조선 말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어 사랑채 부분이 후대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