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시대의 교육
조선시대의 교육은 충효와 삼강오륜, 그리고 상하의 계급과 신분의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써 성리학적 도학(道學) 중심의 교육이 교육이념의 중추를 이루며 지배계층인 양반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육이념을 배경으로 조선시대에는 관학으로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이보다 수준이 낮은 4학(四學)이 있었으며, 지방에는 관학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다. 그리고 사학(私學)으로는 1543년에 세워진 백운동서원을 효시로 하는 서원과 초등사립교육기관인 서당이 각 문중 혹은, 개인적으로 설치되어 문중의 자손 및 각 동리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방의 사립교육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의 교육제도 아래에서 우리 지역의 교육과 관련있는 것은 향교와 서원, 그리고 서당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우리 지역의 교육제도에 대해서 영해와 영덕의 향교와 지역에 설립되었던 여러 개의 서원과 사우(祠宇), 그리고 각 문중단위 혹은 개인적으로 설립한 서당을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선시대의 향교교육과 영덕의 향교제도 향교는 고려 인종대에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나 이후 고려의 정치이념이 불교중심인데다 정치적 권능이 지방에까지 크게 미치지 못하는 여건에 따라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퇴보하였다. 따라서 향교는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였다. 향교가 교육기관으로써 자리잡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이념이 유교적인 도학정신의 구현인데다 태조대부터 인재의 등용을 위한 과거제도의 적극적인 도입과 각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권능이 확실히 미칠 수 있는 지방제도의 정비로 향교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과거시험의 시험과목은 유교의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유학적 소양을 묻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자연히 유학 교육의 중심지인 향교가 그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향교의 운영을 위한 재정은 각 지역의 지방행정기관인 부와 군과 현에서 맡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것은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지방행정기관의 통제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여건을 갖추게 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향교가 지방교육기관의 중추기관으로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1) 영해향교 ① 연 혁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영해부의 중심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은 영해향교는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작지산 아래에 세워진 영해부 소학의 후신이다. 소학 건립 당시의 향교 규모는 대성전과 동서 좌우의 곁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중종 24년 (1529)에 부사 공서린(孔瑞麟)이 향내 사족(士族)들과 의논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의 위치로 이건된 후에 여러 번의 중수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는데, 선조 4년(1571)에 영해부사로 부임한 정세필(鄭世弼) 부사시절에 일부 개수(改修)가 이루어진 후, 선조 11년(1578)에 영해부사로 부임하여 온 김부인(金富仁) 부사시절에 서재(西齋)와 주사(廚舍)의 일부를 중수하였으며, 현종 12년(1671)에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이후 숙종 45년(1706)에 향중에서 대대적인 중건공사를 벌여 3년만에 이를 완공하였다. 이 당시에 중건한 건물로는 경각(經閣), 전사청(典祀廳), 주방(廚房), 별고(別庫), 하인청(下人廳) 등이었다. 영조 13년(1737)에 부임해 온 신이진(愼爾晋) 부사시절에 대성전의 중수가 있었으며, 순조 원년(1801)과 헌종 4년(1838)에도 향교 건물의 일부 보수가 있었다. 또 헌종 12년(1846)에 부임한 박희현(朴熙顯) 부사시절에도 담과 경각(經閣)의 일부 수리가 있었다. 이후 1895년에 이르러 전국적인 향교의 정비에 따라 각 처에서 봉납하는 진공(進貢)이 폐지되고, 향교에 딸린 전답은 군수가 장악하도록 하여 향교에서 임의대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향교에는 직원(直員, 首奴) 1인 만이 향교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는 1914년의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1읍1교(1邑1校)의 원칙에 따라 영해향교는 폐지되고 영덕향교에 합병되었다. 영해향교의 교육은 종6품인 교수 1명을 임명하여 향교의 교육을 전담하였으나, 이도 여러 사정에 의하여 여의치 못하여 영조대인 1725년 이후부터는 향교의 모든 교관제도가 없어지게 되어 학문을 배우려고 하는 자들은 서원이나 정사(精祠) 등으로 몰리게 되어 향교의 역할은 자연스레 축소되어 갔다. 이러한 영해향교의 교수 중에 가장 교육적인 공헌을 한 이는 유일재 김언기(惟一齋 金彦璣, 1520∼1588)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1567년에 생원시험에 급제한 후 영해향교의 교수가 되어 영해지역의 사족들에게 퇴계학문을 전달하였으며, 영해지역의 사족들을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의 사족들과의 교유(交遊)의 길을 트기도 하였다. 영해지역에 있어서 유일재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박의장(朴毅長)이 있다.
② 향교의 규모와 건축구조 영해향교의 규모는 고려시대 설립 당시에는 대성전과 동서무(東西), 그리고 행랑과 담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중종 24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겼다. 명종 19년(1564)과 선조 5년(1572) 사이에 태화루(太和樓)가 건립되었으며, 숙종 45년(1706)에는 경각, 전사청, 주방, 별고, 하인청 등이 건립되었다. 이후에 이들 건물의 중수 및 수선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대성전과 명륜당, 태화루, 동재, 서재, 그리고 관리사가 남아 있다.
(1) 대성전(大成殿) 현재의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시멘트로 마감한 2중 기단 위에 자연석을 주춧돌로 하여 원주를 세워 만든 건물이다. 전면의 창문은 5칸 모두 4분합 문이며, 서까래양식은 초익공(初翼工)의 형태이며, 다섯 개의 대들보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심이 되는 대들보 위의 종량(宗樑)에 접시받침을 놓고 그 위에 十자형의 첨차와 양봉(樑奉)을 짠 후 아래의 접시받침 보다 큰 것을 올려서 종량을 받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붕은 전체적으로 맛배지붕을 하고 있으나 전면은 겹처마의 형태로, 뒷면은 홑처마의 형태로 하고 있으며, 양 측면에 풍경(風磬)을 달고 있다.
(2)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전면 5칸을 마루로 하고 좌우 양측칸에 온돌방을 설치하고 가운데 3칸을 역시 마루로 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형태로 홑처마를 구성하고 있다. 기단을 낮게 다진 후 주추를 놓고 둥근 원주를 세우고 마루를 4척 반 정도 높게 만들고 있어 분위기는 누각(樓閣)과 같다. 온돌방의 창문형태는 전면에는 쌍여닫이 세살문의 형태이고, 대청을 향한 좌우 벽면은 외여닫이 세살문의 형태이다.
(3) 동재와 서재 동재와 서재는 일자형(一字形)의 구조로 정면 5칸, 측면 1칸의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건물이다. 각 3칸씩 온돌방을 설치하고 있으며, 양 측칸에 모두 부엌을 설치하고 있으며,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다. 지붕은 맛배지붕으로 홑처마를 가지고 있다.
(4) 태화루 태화루는 누각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홑처마로 다섯 개의 대들보를 갖는 맛배지붕 건물이다. 밀암 이재(密庵 李栽)가 쓴 태화루 기문이 있다.
③ 향교의 배위(配位) 및 제의(祭儀)
(1) 향교의 배위 및 제의
ㄱ) 배위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4성(聖)의 위패와 십철(十哲), 그리고 송조(宋朝) 6현(賢)의 21위와 우리나라의 성현 18현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전(正殿)인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4성과 10철, 그리고 송조 6현의 21위를 모시고, 동·서무에 우리나라의 18현과 중국의 유현(儒賢) 94위를 포함하여 도합 112위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올렸으나, 1949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로 과거 동·서무에 봉안하였던 112위 중에 우리나라의 18현은 대성전에 종향(從享)하기로 하고 중국의 유현 94위는 매안(埋安)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전을 봉행하는 날은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하는데, 이 날을 택한 이유로는 2월은 우로기유(雨露旣濡)의 계절이고, 8월은 상로기강(霜露旣降)의 계절이므로 이 날을 정하였다. 봉행시간은 2월, 8월 상정일 초1각4경1점(初一刻四更一點)이다. 다음의 도〈61〉은 영해향교의 배위도차(配位圖次)이다. 중앙의 주벽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를 모시고 동배위(東配位)에는 연국복성공(國復聖公) 안자(顔子)와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자사(子思)를 모시고, 서배위에는 성국종성공(國宗聖公) 증자(曾子)와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맹자(孟子)를 모시고 있다. 또한 동배위에는 낙국공(洛國公) 정이(程), 신라의 홍유(弘儒) 설총, 고려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조선시대의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성공 이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경공 김집(金集),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배향하고 있다. 서배위에는 휘국공(徽國公) 주희, 신라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고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조선시대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 김인후(金麟厚),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정공 송시열, 문순공 박세채(朴世采)을 배향하고 있다. 영해와 영덕향교에서는 공문(孔門) 10철(十哲)을 제외한 소설위(小設位)로 중국의 5성위와 송조2현, 우리나라 18위를 포함하여 25위를 봉향하고 있다.
ㄴ) 제의 향교의 제의의 절차는 각 향교의 역사와 여건에 맞추어 홀기(笏記)를 제정하여 홀기의 순서에 의하여 춘추제향을 드린다.
(2) 영덕향교 ① 연 혁 1998년에 발간된 「영덕향교지」에 의하면 영덕향교의 창건연대를 조선 태종 3년(1403)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행히도 영덕향교에 대한 내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남아 있는 각종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조선시대 말기에까지 군의 동쪽 1리 허의 화림산 동지맥인 현 영덕초등학교 뒷편에 있던 것을 1914년 영덕공립보통학교의 교실로 사용하기 위하여 철폐지경에 이르러 군의 북쪽 화개동 토성리의 민가를 구입하여 봉향하다가 1924년에 학교가 이전하자 다시 종전의 향교를 보수하고 위패를 환안(還安)하였다.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대성전 및 명륜당 외 기타 부속 건물이 전소되어 폐교지경에 이르렀는데, 1965년 전교 신수원(申壽元)과 향중의 유림들이 성금을 각출하여 화개리 현위치의 고가(古家)를 구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후임 전교 박종대(朴鍾大)의 주선으로 대성전 4칸 반과 명륜당 4칸을 개축하였으며, 1970년에는 전교 김우영(金羽英)의 주선으로 대성전 5칸 반과 툇마루를 개축하고, 서재 4칸과 정문 3칸을 신축하고, 동재를 수리하였으며, 기타 부속 건물을 중수하고 전기를 가설하였다.
② 향교의 규모와 건축구조 영덕향교의 창건 당시의 기록이 없어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없다. 다만 「영영승람」에 의하면 1950년 6.25한국전쟁에 의해 건물이 소진되기까지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는데, 대성전·명륜당·양호루·동재실·전사청·하인청·주사(廚舍)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설립 당시에도 이 정도의 규모를 가진 향교로 출발하여 중간 중간에 수차례 중·개축을 거치면서 6.25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내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향교의 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동·서재와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1) 대성전 대성전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전면 가운데 3칸은 쌍여닫이문을 하고 있으며, 기둥은 전면은 원주(圓柱)의 형태로 하였으며, 측면과 뒷면은 방주(方柱)의 형태로 세웠다. 주춧돌은 시멘트 기단 위에 놓은 5량(樑) 가량의 납도리 집이다.
(2) 명륜당 명륜당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마루이며, 양 측면에는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마루의 전·후면에는 유리문을 하고 있으며, 방 전면은 2짝 띠살문을 하고 있다. 정면은 원주로 기둥을 하고 있으며, 측면과 뒷면은 방주형의 기둥으로 명륜당도 5량의 납도리 집이다.
(3) 동·서재 동·서재의 건물도 정면 4칸과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서재는 현재 관리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재는 4칸 모두가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재의 가운데 2칸은 뒤로 물려 마루를 두고, 1칸은 부엌을 두고 있다.
(4) 대문채 대문채는 솟을대문으로 한 맛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가운데 칸은 문으로 하고 좌우의 양측 칸은 방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③ 향교의 배위(配位) 및 제의(祭儀) 영덕향교의 배위와 제의의 절차는 위의 영해향교의 배위와 제의의 절차와 대동소이하다. 조선시대 영덕향교에는 종9품의 훈도가 파견되어 향교의 교육과 운영을 책임졌다. 그러나 이들 훈도의 선발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는 지역의 향교에 훈도의 파견이 폐지되기도 하였다. 영덕향교에서 훈도의 파견이 언제부터 폐지되었는지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어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곤란하다. 순조대에 발간된 「영덕읍지」에 벌써 향교의 훈도가 폐지된 것으로 나오는 걸 보아서 그 이전부터 향교의 훈도가 파견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영덕향교의 석전대제의 축문과 홀기, 그리고 진설도는 다음과 같다. 〈영덕향교석전대제축문〉
維歲次 月 朔初 日 丁丑
○ ○ ○ 敢昭告于 先聖 大成至聖 文宣王 伏以 道冠百王 萬世之師 玆値 上丁 精? 是宜 謹以牲 幣 醴齊 ?盛 庶品 式陳明薦 以 先師 성國 復聖公 顔氏 國 宗聖公 曾氏 沂國 述聖公 孔氏 鄒國 亞聖公 孟氏 配尙饗
〈석전대제홀기〉
○ 제생은 모두 나아가서 문밖에 늘어선다. ○ 찬인(贊人)은 각 위치에 진설(陳設)하고 나아가서 독()을 연다. ○ 마치면 돌아 나온다. ○ 집례(執禮)는 알자(謁者)와 찬인을 데리고 계단 아래 배위(拜位)에 순서대로 선다. ○ 사배(四拜)하고 각 위치로 나아간다. ○ 찬인이 축 및 제집사 유생을 인도하여 각기 위치에 나아가게 한다. ○ 찬인이 각 헌관을 인도하여 모시고 배위에 나아간다. ○ 헌관은 모두 사배하고 각기 위치에 나아간다. ○ 알자가 초헌관의 좌편에 나아가 향사를 거행하기를 청한다.
< 행전폐례(行奠幣禮)>
○ 알자는 초헌관을 모시고 손을 씻을 자리로 인도하여 홀을 앞섶에 꼽고 손을 씻게 한 후 홀을 잡고 인도해 나아가서 공자 신위 앞에 끓어 앉게 한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하게 한다. ○ 초헌관은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고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안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끓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한다. ○ 폐백을 받아 신위 전에 올린 후,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증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한 후,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린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자사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한 후,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린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맹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한 후,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린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행초헌례(行初獻禮)>
○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공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앉게 한다. ○ 초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올린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일어서서 조금 물러나 꿇어 앉는다. ○ 대축은 초헌관의 좌편에 나아가 동편을 향해 꿇어앉은 다음 축문을 읽는다. ○ 대축은 원위치로 돌아간다. ○ 초헌관은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초헌관은 안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은 후,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초헌관은 증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초헌관은 자사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초헌관은 맹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초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행아헌례(行亞獻禮)>
○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관세 위치로 인도한다. ○ 아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손을 씻은 후, 홀을 잡고 공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아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안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은 후,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증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자사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맹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행종헌례(行終獻禮)>
○ 알자가 종헌관을 모시고 관세 위치로 나아간다. ○ 종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손을 씻은 후, 홀을 잡고 공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종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증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자사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맹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알자는 종헌관을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간다.
< 행분헌례(行分獻禮)>
○ 찬인은 동서분헌관을 각각 인도하여 관세(洗)의 위치에 나아간다. ○ 분헌관은 홀을 앞섭에 꼽고 손을 씻는다. ○ 분헌관이 홀을 잡은 후, 찬인은 동서 분헌관을 인도하여 동서종향 신위 앞에 꿇어 앉게 한다. ○ 분헌관은 홀을 앞섭에 꼽은 후, 세번 분향을 한다. ○ 잔을 받아 헌작한 후,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 각위의 행사는 위의 의례와 같이 행한다. ○ 알자는 분헌관을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진설을 각 위치에서 거두어들이고 독을 덮는다. ○ 대축이 올라가 변두(豆)를 거둔다. ○ 헌관 및 참사자 전원은 사배(四拜)를 한다.
< 행음복례(行飮福禮)>
○ 알자는 초헌관을 모시고 음복할 위치로 나아간다. ○ 초헌관은 서편을 향해 꿇어 앉은 후 홀을 섶에다 꼽는다. ○ 대축은 초헌관의 좌편에 나아가 동편을 향해 꿇어 앉는다. ○ 대축은 잔을 헌관에게 드린다. ○ 헌관은 잔을 받아 음복을 마치고 주효를 받는다. ○ 초헌관은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행망료례(行望燎禮)>
○ 알자는 초헌관을 모시고 망료 위치로 인도한다. ○ 초헌관은 북을 향하여 서고 ○ 대축은 광주리에 축판 및 폐백를 담고 서편 계단에 설치해 놓은 구덩이에 축문을 불사른다. ○ 미리 준비해 둔 흙으로 반 덮는다. ○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알자는 초헌관의 좌편에 나아가서 예가 마쳤음을 사뢴다. ○ 찬인은 각 헌관을 인도하여 모시고 나간다. ○ 대축 이하 제집사 유생 차례대로 나간다. ○ 찬을 주장(主掌)하는 자는 속한 이들을 데리고 예찬을 철하고 대성전 문을 닫고는 물러난다.
2) 조선시대의 서원과 사우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는 중종 38년(1543)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영주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여 고려의 학자 안유를 배향하고, 지역의 유생들을 가르친 것이 그 효시이다. 한편 사우의 기원은 삼국시대에 까지 소급할 수 있으나, 전국적으로 크게 번성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 후기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전해진 이후였다. 결국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유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사우도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서원은 대개 유학의 진흥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강학(講學)과 장수(藏修), 선현봉사를 위주로 하여 제향인물도 유학자들을 위주로 하였다. 따라서 건물의 구조도 사(祠), 강당(講堂), 재(齋), 서고(書庫), 기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우는 조상을 숭배하고, 성현을 숭상하며, 세상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여 성현을 제향하는 곳으로 주로 충신, 열사를 모신다. 건물의 구조는 제향할 수 있는 사(祠)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서재나 정사 등이 있으나, 이들은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독서나 교육을 위주로 하는 것으로 대개 서재 혹은 정사라 하는 단출한 구조의 건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 지역에도 1568년 남강서원(南江書院)의 설립을 필두로 여러 개의 서원이 설립되었으며, 사우로는 1650년에 설립된 향현사(鄕賢祠))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사우가 설립되어 조선시대 후기의 지역의 교육 및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풍속교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오면서 서원의 남설(濫設)과 서원 설립목적인 강학과 장수유식처(藏修遊息處)로서의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문중 혹은 자파의 세력기반처로써 역할을 하는 등 파벌과 당쟁을 조장하는 폐해가 속출하여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에 의하여 전국에 27개의 서원과 20개의 사(祠)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었다. 따라서 우리 지역의 서원과 사우들도 이 당시에 대부분 훼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우리 지역에 설립되었던 남강서원과 향현사을 비롯한 서원과 사우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 여기서는 영덕현, 영해부 등의 조선시대 읍호에 의거하여 구분하였다.
(1) 영덕현의 서원 ① 남강서원(南江書院) (1) 연 혁 남강서원은 선조 원년(1568)에 영덕현령 정자(鄭磁)와 향내의 김난서(金鸞瑞), 신귀년(申龜年), 신홍제(申弘濟), 신경제(申經濟), 박인걸(朴仁傑) 등이 의논하여 우곡리에 창건하였다. 천계(天啓) 원년 신유년인 광해 13년(1621) 3월 15일(음력)에 현(縣)의 북쪽 5리의 엄곡산 아래로 옮겼다가 숙종 26년(1700)에 다시 우곡리로 이건하기로 하고 숙종 28년(1702) 10월 10일(음력)에 이건을 완료한 후, 문원공 이언적과 문순공 이황 양 선생을 봉안하였다. 건물들은 중·개수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까지 내려오다가 대원군에 의하여 고종 8년 (1871)에 훼철되었다.
(2) 서원의 규모 남강서원의 규모로는 설립 당시에는 동쪽에 온돌방과 서쪽에 서늘한 마루가 있었으며, 가운데 회우지당(會友之堂)과 보곡(寶穀)을 저장하는 창고와 곁채와 문, 그리고 포주(廚) 등이 있었으며, 주위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광해 13년(1621)에 화림산의 한줄기인 엄곡산으로 이건되었다가 숙종 28년(1702)에 우곡리로 다시 이건되면서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어 서원으로써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이후에 창건된 건물의 명칭과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체인묘(일명 尙德祠, 體仁廟)가 3칸, 전교당(일명 明敎堂, 典敎堂)이 8칸, 망도루(일명 遊藝樓, 望道樓)가 6칸, 정문이 3칸, 직방재(直方齋) 3칸, 광풍실(光風室) 3칸, 장서각 3칸, 포사(舍) 14칸 등의 규모였다. 서원의 관련기록으로는 현령 정자(鄭磁)가 쓴 기문이 있으며, 현감 김하구(金夏九)가 지은 상덕사(체인묘)의 중수상량문이 있으며, 신임상(申任商)이 쓴 명교당(전교당) 중수기문이 있다.
(3) 서원의 배향인물과 원의 규범
〈배향인물〉 남강서원의 배향인으로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과 문순공 퇴계 이황선생 두분이다. 두분에 대한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 : 학문의 배움과 학문의 연원이 깊으시며, 도덕이 높고 두터우사 우리 동방을 영세토록 계도하심이여(文學文淵深道德高厚啓我大東永世攸久) 문순공 퇴계 이이황 선생 : 공자와 맹자의 도를 마음으로 전하사, 정주와 주자의 학문을 이어 크게 이루시니, 동방 유학의 큰 기둥이 되심 이여(心傳孔孟道紹洛集成大東斯文準極)
〈서원의 원규(院規)〉 남강서원의 원규로는 ○ 읍에 거주하는 생원과 진사, 그리고 과거급제자 중에 학문이 있고, 근면한 이를 원장으로 간택하고, 또 일인을 부원장으로 하여 원의 일을 주무(主務)토록 한다. 원의 일을 주무하는 이로는 학문을 하는 이가 아니면 불가하다. 원내 유생들의 영수(領袖)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이가 아니면 원의 일을 주재(主宰)할 수 없다. ○ 원장은 원중의 보곡(寶穀, 교육재정)을 통할(統轄)하고 검속(檢束)하여야 한다.○원장은 원중의 서책과 원의 담장과 건물을 검속하고 살펴야 한다. ○ 원에 들어오는 유생 중에 원에서 공부할 유생수를 정한다. ○ 유리걸식하는 자들과 한가로이 노는 잡인들의 원내의 출입을 보호하기 위하여 원중에 수직을 세운다. ○ 읍의 수령 자제들이 원내에 거처하는 것을 금한다. ○ 읍의 수령 자제들이 마음대로 원의 서책을 가져갈 수 없도록 한다. ○ 원중에 여색을 출입시킬 수 없다. ○ 원에서 접대할 유생들의 출입을 자주 시켜서는 안된다. ○ 원중에서 잔치나 바둑 또는 장기를 두어서는 안된다. ○ 원장은 유생을 접대하는 것과 해세(海稅)로 바치는 것을 회계하여야 한다. ○ 원중의 서책은 외부로 갖고 갈 수 없으며, 원의 보곡은 사사로이 대여할 수 없으며, 원의 잡물은 타인에게 빌려줄 수 없다. ○ 원의 앞산에는 일체의 벌채를 할 수 없으며, 짐승을 먹일 수 없다. ○ 봄 가을로 대(臺) 위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과 서로 싸우는 것, 그리고 서로 모함하는 것은 중히 다스린다. ○ 원에 거처하는 유생들은 성현의 말씀을 규범과 잠언으로 삼아야 한다. ○ 원장의 교체 때에는 원중의 물건을 서로 주고 받는다. 유사(有司)의 교체 때에는 보곡의 부족이 있으면 교체를 하지 못하며 이의 완납이 있어야 교체를 한다. ○ 원교(院校)에 서로 표리가 있으면 유생들은 서로 규책(糾責)을 받아야 한다. ○ 영해부에서 봄 가을로 소금 4석을 받는다. ○ 청하현에서 봄 가을로 소금 4석을 받는다. ○ 흥해군에서 어물 5종을 받는다. ○ 영덕현에서 어물 7종을 받는다. 서적 및 기타 기물(器物)을 받는다.
② 신안서원(新安書院)
(1) 연 혁 신안서원은 인조 6년(1628)에 영덕현의 서쪽 50리인 북면(현재 지품면) 신안동 주산(朱山) 아래에서 권수암 상하(權遂菴 尙夏), 정 장암(鄭 丈巖) 등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숙종 28년(1702)에는 현의 북쪽 5리 군자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영조 6년(1730)에 현의 동쪽 1리인 토성리(현 화개리)로 옮겼다. 이후의 중·개축 여부는 자료의 미비로 알 수 없으며, 대원군에 의하여 고종 8년(1871)에 훼철되었다.
(2) 서원의 규모 창건 당시의 규모는 자료의 미비로 알 수 없다. 다만 1730년에 토성리로 옮긴 후의 규모로는 집성사(集成祠), 신안서당, 장서각(동재), 양사재(養士齋: 서재), 경광루(鏡光樓), 정문 3칸, 포사(舍) 16칸 등이 있었다. 작자 미상의 청액소(請額疏)가 있으며, 동계 유진성(東溪 柳晉成)의 중수기가 있다.
(3) 서원의 배향인물과 원의 규범
〈배향인물〉 서원의 배향인물은 회암 주부자와 문정공 우암 송시열 두분이다. 창건시에 수암 권상하가 지은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상향축문은 다음과 같으며, 이외에 1730년 이건 후 운석 조인영(雲石 趙寅永)이 지은 주부자와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이건(移建) 봉안문이 있다.
문정공 우암 송시열 상향축문: 의리와 춘추학으로 무이의 도를 따라 여러 유생들을 모아 이루니 백세의 스승이 됨이여(義秉春秋學遵武夷集儒成爲百世師)
〈서원의 원규(院規)〉 신안서원의 원규에 대해서는 상세한 자료가 없어 살펴볼 수 없다. 다만 여기서는 「영영승람」에 기록된 원의 재정규모와 일부 원의 규범을 싣는데 그치기로 한다. ○ 보곡은 조(租) 80석, 태(太:콩) 9석 3두, 대지 16두락, 채전 8두락, 대전(垈田)은 관둔(官屯)으로 조(粟) 2결로 환산한다. 복호(復戶)가 48부(夫), 곽전(藿田)이 1잠(岑)이다. ○ 원 아래의 16호는 역을 없애고 원우(院宇)의 청소와 수리 및 수호(守護)를 하도록 한다. ○ 원중에 속하는 육지와 바다에 따르는 원래의 역(役)은 다른 역이 침범할 수 없으며, 얻은 대로 보존해야 한다. ○ 배 4척과 원안(院案) 외에 1척, 해속(海屬) 11명, 가속(假屬) 22명, 원생 4명, 노(奴) 2구(口), 비(婢) 2구 ○ 태부(太夫, 대부)의 지세(址貰) 봄 가을로 각 50냥 ○ 봄 가을 향사시(享祀時) 청련암에서 도벽지(塗壁紙) 각 9속(束), 4계절의 초하루(朔)에 별혜(別鞋) 20부(部), 백지(白紙) 4속 ○ 개인사(開印寺) 백지 3속, 장지(壯紙) 2장(章) ○ 사자암 및 정수사(淨水寺)에서 손님을 접대시에 장지 2속과 훈장 별혜 1부와 서적 기타 기물을 상납받는다.
(2) 영덕현의 사우 ① 수정서사(水晶書祠) 군의 북쪽 5리 화림산 아래 구미리에 있다. 주부 신희(主簿 申禧), 군수 신종부(郡守 申從溥), 증검상 신규년(贈檢詳 申年) 세분을 제향하였다. 묘(廟)를 세덕사(世德祠)라 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고 없으며, 현재는 서사 내에 숙종 5년(1679)에 지었다는 사경재(思敬齋)와 주성재(主誠齋)가 있으며, 담원 홍수보(澹園 洪秀輔)의 기문이 있다.
② 세현사(世賢祠) 세현사는 군의 북쪽 20리 마고산 아래에 장령 김을진(掌令 金乙軫)과 첨추 김주린(僉樞 金周麟)을 제향하기 위하여 창건된 사우이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현재 폐지되고 없다.
③ 모현사(慕賢祠) 군의 북쪽 눌곡리에 있었다. 양몽재 김재락(養蒙齋 金在洛)과 삼오당 김세락(三吾堂 金世洛)을 배향하였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현재는 폐지되었다.
(3) 영해부의 서원 ① 단산서원(丹山書院)
(1) 연 혁 단산서원은 선조 41년(1608)에 향내의 사림들이 의논하여 당시의 영해부사 노경임(盧景任)에게 요청을 하고, 죽노 신정립(竹老 申立, 뒤에 활(活)로 개명)이 관찰사에 글을 올려 의논을 정한 후에 오늘날의 창수면 인량리 석대봉(石帶峯) 아래 영귀정의 동쪽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좨주 우탁(祭酒 禹倬)을 봉향하였으나, 인조 9년(1631)에 사림들의 의논에 의하여 문정공 목은 이색을 같이 봉향하였다. 그후 1656년 9월에 목은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으며, 1667년에는 서원이 좁고, 건물이 퇴락하여 이건할 것을 합의하고 관찰사 이태연(李泰淵)과 부사 김옥현(金玉鉉)의 찬조와 도움을 받아 봉황산 밑의 가사리(가산리)에 이건하였다. 이건 후 1668년 1월 17일에 문효공 가정 이곡을 추봉(追奉)하였다. 단산서원은 창건된 지 260년 동안 굉장한 규모와 엄격한 기율, 그리고 인재의 양성과 출입하는 선비들의 정중함은 영남 바닷가의 으뜸으로 교육과 선현봉사의 중심 역할을 하여 오다가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이후 서원에 속한 재산은 신법에 의하여 설립된 학교에 편입되게 되었다.
(2) 서원의 규모 서원의 규모로는 묘당(廟堂)인 상현사(尙賢祠)가 3칸, 강당인 명교당(明敎堂)이 8칸, 동재인 사물재(四物齋)와 서재 삼성재(三省齋)가 각 4칸, 루(樓)인 남덕루(覽德樓)가 10칸, 문(門)인 입도문(入道門)이 3칸, 전사청이 4칸, 주사가 18칸이다. 그외에 묘정(廟庭)의 좌우에 각 1칸을 두어 동쪽 건물을 장서각으로 하고 서쪽의 건물을 영정각이라 하였다. 현종 4년(1663) 겨울에 불이 나 서문루와 동서재, 그리고 전사청 등이 모두 타서 없어짐에 따라 다음해인 1664년에 사람들이 의논하여 가정(嫁亭)의 후손인 관찰사 이경재(李景在)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기부금을 각출하여 새로이 중건하였으며, 목은의 영정도 모사(摹寫)하여 봉안하였다. 야은 남몽양(野隱 南夢陽)의 남덕루 중수기문이 전하고 있다.
(3) 서원의 배향인물과 원의 규범 단산서원의 배향인물은 문희공 우탁과 문효공 가정 이곡, 그리고 문정공 목은 이색의 세분이다. 세분의 상향축문은 다음과 같다.
문희공 역동 우탁 : 정직한 조행(操行)과 신명(神明)의 학문으로 후세들을 크게 계도하사 영세토록 일깨움이여(正直之操神明之學啓休後人永世無)
문효공 가정 이곡 : 효를 인의 근본으로 삼고, 학문으로 도를 실었으니, 향내(鄕內)에 그윽한 향기를 남겼도다. 사림들의 애절한 추모함이여(孝本爲仁文以載道鄕遺仍芬士切追慕)
문정공 목은 이색 : 위도(衛道)의 학문과 경천(擎天)의 의리로 묘당에 숭상되니, 우리로 하여금 격식을 갖추어 제사지내게 함이여(衛道之學擎天之義崇以廟貌格我祀)
② 구봉서원(九峯書院) 구봉서원은 부의 서쪽 10리인 현재 영해면 원구리 중구봉 아래에 현종 6년(1665)에 농은 백동현(聾隱 白東賢)이 당시 영해부사에 청하여 창건하였으며, 1666년에 무의공 박의장과 목사 박홍장을 입향하였다. 정충묘(精忠廟)와 구봉사(九峯祠), 그리고 돈전당(敦典堂)이 있었으며, 서원의 규모로는 묘우 3칸, 중문 3칸, 강당 8칸, 대문 3칸, 주사 12칸의 규모였다. 1998년 현재에는 서원의 건물이 퇴락한 채 원구리 앞의 영해에서 창수로 가는 도로 오른쪽에 남아 있다.
③ 인산서원(仁山書院) 숙종 22년(1696)에 사림들이 공론하여 창수면 인량리에 창건하였다. 존재 이휘일, 문경공 갈암 이현일을 제향하였다. 영조 13년(1737)에 부의 북쪽 항리(項里: 사천리)로 옮겼다가 1741년에 훼철되었다. 다시 1774년에 복설(復設)하였다가 이후에 훼철되었다.
④ 운산서원(雲山書院) 운산서원은 순조 12년(1812)에 사림들의 의논에 의하여 당시 영해부의 북쪽 10리 원황촌 뒤에 세웠다. 충간공 담암 백문보(忠簡公 淡庵 白文寶)와 성헌 백현룡(惺軒 白見龍)을 제향하였으며, 경덕묘(景德廟)가 3칸, 입도문(入道門)이 3칸, 그리고 직방재(直方齋:동재)가 3칸, 박약재(博約齋:서재)가 3칸, 운산서원(강당)이 8칸, 문루가 6칸, 경각이 2칸, 주사가 12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종 5년 (1868)에 훼철되었으며, 대한제국 광무 4년(1900)에 후손인 백순지(白淳志) 등이 재건하여 운산서당으로 개칭하고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충간공 담암 백문보의 상향축문은 다음과 같다.
충간공 담암 백문보 : 사도를 멀리하고 정도를 보호하며, 인군을 바르게 인도하고 약속함에 의연히 우뚝 솟은 정절이여, 우리 후인들을 일깨우도다 (斥邪衛道納約匡君屹爲砥柱起我後人) ⑤ 운계서원(雲溪書院) 운계서원은 순조 24년(1824) 사림의 의논에 따라 영해부의 북쪽 30리 보곡, 즉 현재의 병곡면 영리에 창건하였다. 제향인으로는 충열공 박제상(忠烈公 朴堤上)과 시중 박세통(侍中 朴世通), 그리고 처사 박응천(處士 朴應天) 세분이다. 상현묘와 운계사가 3칸, 강당이 8칸, 대문이 3칸, 주사가 10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서편에 어제각(御製閣)이 있어 숙종과 정조의 시(詩)를 봉안하였다. 충열공 박제상의 상향축문은 다음과 같으며, 현재는 일부 건물과 유지가 거무역리에 남아 있다.
충열공 박제상 : 월성의 충신이요, 일본 땅의 의사이니, 일월과 더불어 만고에 광명을 다투는도다.(月城忠臣日域義士其與日月萬古爭光)
⑥ 대봉서원(大峯書院) 대봉서원은 헌종 13년(1847) 영해부의 서쪽 25리 대봉산 아래에 사림들의 의논에 따라 창건되었다. 지금의 창수면 미곡리이다. 충장공 권자신(忠莊公 權自愼)과 오봉 권책(五峯 權策), 남곡 권상길(南谷 權尙吉) 세분을 제향하였다. 충현묘와 대봉정사가 3칸, 그리고 전교당이 8칸, 대문이 3칸, 주사가 14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으며, 1924년에 경모재를 창건하여 오봉 권책의 분암소(墳庵所)로 삼았으며, 대봉정사는 서당으로 개칭하여 후진 양성을 하였다.
⑦ 인계서원(仁溪書院) 인계서원은 창수면 인천리에 있었으며, 문정공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인계서원의 창건연대는 헌종 14년(1848)이다. 이는 「교남지」에 나온 기록이나, 각종 기록에 1840년 영해향변의 주요 기반처로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840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다.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4) 영해부의 사우 ① 도계정사(陶溪精祠) 도계정사는 영해부의 남쪽 10리 도곡에 있었다. 숙종 14년(1688)에 사림의 합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도와 박선(陶窩 朴璿)을 배향하였으나, 숙종 37년(1711)에 대은 권경(臺隱 權璟)을 추향하였다. 묘를 경현이라 하고, 사를 도계라 하였다. 규모로는 묘우가 3칸, 중문이 3칸, 강당이 10칸, 대문이 3칸, 주사가 12칸이었다. 현재는 폐지되었다.
② 향현사(鄕賢祠) 향현사는 영해부의 남쪽 성(城) 밖의 옛 향사당(鄕射堂)에 있었다. 숙종 15년(1689)에 창건되었으며, 1690년에 도사 박종문(都事 朴宗文)과 참판 정담(參判 鄭湛) 두분을 배향하였다. 묘(廟)를 충열이라 하고 사(祠)를 향사라고 하였으며, 고종 원년(1864)에 부사 김희주(金熙周)와 사림의 합의로 중수하였다. 묘우가 3칸, 향사당이 8칸, 주사가 12칸 규모였다. 현재는 폐지되고 없다.
③ 미산정사(眉山精祠) 순조 3년(1803)에 창수면 미곡리에서 사림들의 합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죽노 신활을 배향하였다. 묘를 상현(尙賢)이라 하고, 사를 미산이라 하였으며, 규모로는 묘우가 3칸, 묘문이 3칸, 강당이 8칸, 대문이 8칸, 주사가 10칸이다. 봉안문과 상향축문은 참판 김희주가 지었다. 현재는 폐지되고 없다.
④ 광산정사(光山精祠) 광산정사는 순조 12년(1812) 영해면 묘곡리에서 사림들의 합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난고 남경훈(蘭皐 南慶薰)과 안분당 남길(安分堂 南佶) 두분을 봉안하였다. 묘를 세덕이라하고 사를 광산이라 하였다. 규모로는 묘우가 3칸, 강당이 8칸, 대문이 3칸, 주사가 12칸이었다. 현재는 폐지되었다. 3) 서당교육(書堂敎育) 서당이란 지역내의 사족들이 문중 혹은 개인 차원에서 자제들과 일반 백성들의 자제들을 훈육한 사립 초등교육과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서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설이 없으나, 대체로 고구려의 경당(堂)을 서당제도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특히 우리가 속하였던 신라에도 설총이 경서(經書)를 이두로 풀어서 생도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서당형태의 사설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송나라 사람인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 세집 건너서 서로 바라보고 민간의 미혼자제들이 무리를 모아 선생에게 경서(經書)를 배우고 좀 성장하게 되면 절간으로 가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오동치(卒伍童穉)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서당의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초에는 정치이념이 된 유학의 장려를 위하여 각 군현마다 향교가 설립되어 사립 교육제도의 성립은 미미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정계 일선에 등장하는 중종대에 들어와서는 서당이 향촌사회의 중심적인 교육기관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사림파들의 향약 보급운동과 함께 유학의 사상적 이념을 펼칠 수 있는 도구로써 서당교육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이후 근대의 학교교육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사립교육의 대부분을 담당한 서당의 발달은 16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서당의 인적구성은 훈장(訓長), 접장(接長) 생도로 조직되었으며, 교육내용는 천자문(千字文), 무제시(無題詩),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통감(通鑑)을 비롯하여 경서의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 등의 3학과를 가르쳤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사족의 자제들은 서당을 거쳐 서원, 향교 또는 사학(四學)에 진학하여 과거시험을 대비하거나 수준 높은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조선시대의 사립교육기관으로 향촌사회의 중요한 구심적 역할을 하던 서당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사회경제적인 제도의 문란에 기인한 것으로 매관매직을 통한 관직의 획득 등에 따라 정상적인 교육에 의한 입신출세의 불가능으로 서당교육은 단지 문자해독 정도의 교육으로 전락하였으며, 또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서원들에 의하여 서당교육제도는 자연스레 쇠퇴하여 갔으며, 특히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서당교육은 거의가 사라지게 되었다. 일제(日帝)는 서당교육이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의식의 앙양을 담당하는 불온한 곳으로 보아 탄압책을 펼쳤는데, 일제는 1918년에 「서당규칙」을 만들어 서당교육에 대한 그들의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한 때는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 서당을 경영한 때가 있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소위 보통학교 제도가 설치되어 서당교육은 점차적으로 쇠퇴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어 1918년 8월 총독부가 발표한 기록에 따라 전국적으로 2만 4294개소에 학생수 26만 4835명이던 서당규모가 1940년에는 전국적으로 4105개소에 학생수 15만 8320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교육제도의 확립으로 서당교육은 점차 사라지게 되어 현재는 서당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거의 없게 되었다. 현재는 깊은 농촌마을에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이가 가끔씩 한문강좌를 개설하여 서당식 교육을 펼치고 있는 경우도 있다. (1) 영덕·영해의 서당 영덕과 영해의 서당교육에 대한 자료는 매우 소략하다. 특히 조선시대 전기와 중기에 있어서의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영덕군향토사」의 창수면 미곡리 편에 “중고서당(重皐書堂)이 있었는데, 광해조에 건립하였으며, 중고 김빈(重皐 金玭)의 연거(燕居)의 장소이다.”라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광해군 이전부터 지역에 서당의 제도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 내려와서 남정면 도천리에도 1800년대에 서당이 세워져 지역 학동들의 훈육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조선시대 후기에 영덕과 영해에 설립되었던 서당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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