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삶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스스로와 종족의 안전을 위하여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경험과 지혜를 획득시키는 것을 교육이라면 이러한 교육은 아주 오랜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현대적 의미의 “인간의 인격형성과 이러한 인격형성을 통하여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한편, 개개인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창조성과 다양성, 그리고 협동성과 합리성을 개발하는데 목적을 두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한다면, 대개 이러한 교육은 청동기시대 이후 역사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역사시대의 초기인 청동기시대에 개국한 고조선시대부터 인간의 인격형성과 이를 통하여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교육이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홍익인간” 이라는 이념적 지표를 부족의 교육목표로 설정할 정도의 수준 높은 교육철학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종래의 씨족 혹은 부족 중심의 사회구조에서 널리 인간세상 전체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적 지표를 표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구조를 구축하고, 나아가서 새롭게 변화하는 시대에 각 씨족 혹은 종족 단위의 좁은 인식체계를 국가 단위의 넓은 인식체계로의 전환을 가져오고자 하는데 목적을 둔 것으로, 이것 자체가 교육에서 얻어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우리나라 교육의 연원은 고조선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겠다.
이후 이러한 교육의 정신은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에 전해져 고구려에서는 태학(太學)과 경당(堂)으로 이어져 발전하였으며, 통일 전의 신라에는 화랑도로 전승되어 상무정신을 고양시키고, 삼국통일의 의지를 다지도록 하는 한편, 제도적으로는 국학으로 발전하여 통일 후의 행정관료들을 양성하는데 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한반도의 동남부 해안에 위치한 우리 지역에서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자기 방어와 자기 생존을 위한 교육과 훈련이 이루어져 왔을 것으로 보이나, 현대적 의미의 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대개 신라시대 이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상세한 자료가 없어 현재 이를 추정해 볼 아무런 근거가 없어 안타깝다. 그렇지만 우리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신라의 영역안에 위치한 관계로 신라가 고려에 멸망할 때까지 우리 지역의 교육제도는 신라의 중앙교육제도 혹은 지방교육제도에 커다란 영향을 받아 왔을 것이다.
1) 신라시대의 교육
한반도의 동남부인 경주에 자리를 잡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도 늦게 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관계로 모든 면에서 두 나라보다 늦게 출발하게 되었으며, 교육에 있어서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특히 새로운 대항집단의 성장에 반대하는 두 나라의 지속적인 공격과 압력으로부터 국가로써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단결과 인재의 양성이 무엇보다 필요하였는데, 신라는 이러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교육의 바탕으로 삼아 이를 이룩하고자 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결실을 맺으면서 신라정신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화랑도 교육이다.
세속오계 등의 화랑도 교육을 통하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치국의 학문으로써 새로이 유학을 받아들여 이를 고래의 전통적인 교육이념에 보태어 한차원 높은 교육철학의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를 경영하는데 많은 보탬을 받았는데,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 신문왕 2년(682)에는 국학(國學)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체계적으로 인재를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통일 전 인재양성의 보고이며, 전사집단이던 화랑도의 기본적 교육목표는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었다. 이들 화랑들은 심산유곡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양하고, 인격을 도야(陶冶)하였는데, 우리 지역에도 이들 화랑도들이 찾아와서 심신을 수양하고 인격을 도야하였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영덕읍 구미리와 지품면 삼화리 건너편의 야성(野城) 근방에서 마상궁술(馬上弓術)을 연마하던 화랑이 자기가 타고 다니던 애마(愛馬)를 자기의 만용(蠻勇) 때문에 목을 친 후 이를 애달파 여겨 애마를 묻고 용마총(龍馬塚)이라 하였다는 전설과 강구면 삼사리의 옛지명인 삼시랑의 유래 등은 신라의 화랑들이 우리 지역에 와서 신체단련과 학문을 닦으며, 자기 인격의 도야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특히 신라시대의 국사가 와서 설치하였다는 국사봉의 철마봉안당(鐵馬奉安堂)의 전설도 신라 화랑도들의 교육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신문왕 2년(682)에 설립된 국학은 통일 후 신라의 공교육의 골격을 이룬다. 국학은 그후 태학감(太學監)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국학으로 변경되기도 하였는데 국학에서 교육한 것은 주로 중국측의 예기나 논어 등의 유교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통일 신라의 국학은 당시 서울인 오늘날의 경주에 설치된 중앙의 관학(官學)으로 이것이 영덕과 같은 군현에까지 이러한 제도가 설치되었는지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국학의 입학자격이 6두품의 12등급인 대사(大舍) 이하부터 일반인들에게도 주어지고, 입학연령도 15세에서 30세까지인 것으로 보아 당시의 수도인 경주와 가까운 우리 지역에서도 다수의 학생들이 국학에서 수업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또한 우리 지역을 포함한 지방단위의 군현에서 중앙의 정령(政令)의 시행과 여타 행정업무를 펼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되는 외관 이외에 지방 토착 관원을 양성하기 위한 일종의 관학기관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어지나 현재는 자료가 없어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곤란하다.
2) 고려시대의 교육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우리 지역을 포함한 지방의 교육제도는 신라시대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시행하다가 점차 왕권이 안정되어 가자 교육제도를 고려의 건국이념에 맞게 새로이 편성, 시행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지방에는 3경 12목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하여 지방교육을 진흥시켰다.
대체로 고려시대의 교육제도는 크게 중앙과 지방의 교육제도로 구분하여 볼 수 있는데, 중앙에는 성종 11년(992)에 창설된 국자감(國子監)과 원종 2년(1261)에 설립된 동서학당(東西學堂), 그리고 공양왕대에 설립된 5부학당(五部學堂) 등이 중앙의 교육을 전담하였으며, 지방에는 고려 인종 5년(1127)부터 설립되기 시작된 향교와 문종 7년(1053)에 설립되어 충렬왕 3년(1277)에 폐지된 12도(徒)가 있어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한편 이러한 중앙과 지방의 교육제도 중에 우리 지역의 교육에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향교교육이다. 지역에 현존하는 향교는 영덕향교와 영해향교의 2개소가 있는데,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은 영해향교이다. 영덕향교는 조선시대에 창건되었다.
고려시대 향교는 대개 고려 인종 5년(1127)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인종은 재위동안 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는데, 이에 따라 각 군현에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향교제도 자체는 국가의 행정권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향교가 설립되기 시작한 당시의 사정으로는 아직도 각 지방 군현에 중앙정부의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곳이 많았으므로 향교에 대한 국가차원의 지원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향교제도 그 자체도 큰 활기를 갖지 못하고 쇠락(衰落)하기 시작하여 제18대 의종(1147∼1170)대에 이르러서는 기존에 건립되었던 향교도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영해향교는 충목왕 2년(1346)에 영해부의 장서기(掌書記) 이천년(李天年)의 주선으로 작지산(芍芝山) 아래에 터를 잡아 창설되었다. 물론 향교의 설립으로부터 영해에서 최초의 교육이 시작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부내에서는 여러가지 교육이 이루어져 왔으며, 다만 향교의 설립으로 정식적인 국가의 지원 아래에서의 관학이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해향교의 설립 전말에 대하여서는 가정 이곡(稼亭 李穀)이 쓴 「영해부신작소학기(寧海府新作小學記)」가 있어 당시의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다. 단지 이 기문에 의하더라도 향교의 운영이나 교과과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아 당시의 향교 운영 전반에 대하여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기문(記文)에 향교교육이 과거 공부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대하여는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아 시문과 문장을 짓는데 향교교육의 중점이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가정 이곡의 「영해부신작소학기문」이다.

寧海府新作小學記
禮州小學掌書記李天年之所作也李君旣佐府見諸生曰本國鄕校之制廟學同宮幾乎褻矣而又引諸童子使之群於大成之庭其爲褻益甚矣乃與諸生謀於父老卜地於府之東北役以農隙不日而成當中而殿以垂魯司寇之像左右爲以爲擊蒙之所廊垣旣輸旣奐於是擇諸生之稍長者爲之敎誨君日一至考旣勤慢而勸懲之雖祈寒暑雨不敢或怠由是凡民有子口可離乳者莫不就學焉居一年君捧霜賀丁亥正旦旣至京敎官有闕權補成均學諭一日塗遇寧海諸生之應擧赴京者曰而府之小學其規已成矣但其屋宇荀非時葺則易至於頹壞子宜託好文者錄其始末而示諸後使無墜成功諸生遂來求余記余惟本國文風之不振也久矣盖以功利爲急務敎化爲餘事自王宮國都以及州縣凡曰敎基鮮不廢墜李君乃能留意於斯可謂知先務矣獨不知小學之規當讀何書當肆何事若曰習句讀斯可矣何必問掃應對進退之節工篇翰則足矣何必禮樂射御書數之文此乃鄕風村學耳予爲諸生恥之諸生勉其屋宇之興廢當有任其責者玆不論
至正七年(1347)五月旣望

예주의 소학은 장서기 이천년이 지은 것이다. 이군은 전부터 부사를 보좌하고 있으면서 선비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나라의 향교제도는 사당과 교실이 한집에 같이 있어 버릇없이 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또 여러 아이들이 대성전 마당에까지 들어 와 시끄럽게 굴며 노는 것이 점점 더 심하여져 가고 있다”고 말하고는 부노(父老)들과 의논하여 부(府)의 동북쪽에 땅을 잡은 후 농한기에 일을 시작하여 며칠 안에 이를 완성시켰다.
당연히 가운데를 대성전으로 하여 노사구(魯司寇, 공자)의 상을 모시고, 좌우에 곁채()를 지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장소로 삼는 한편, 이어서 행랑을 만들고 담장을 둘러치니 일견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유생들 중에서 작고 큰 이들을 선택하여 학생들로 삼아 이군이 매일 한번씩 들러 그 부지런하고 태만한 것을 가려 이를 칭찬하여 권장하거나 징벌을 가하였으며,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더라도 이를 태만하지 않으니, 이를 보고 부민(府民)들은 자식이 젖을 뗄 정도면 소학에 보내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일년을 영해부에 지낸 후 이군은 정해년(1347) 설날을 축하하는 글을 올리기 위하여 미리 올라와서 서울(개성)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교관의 자리가 비어 있어 강권(强權)으로 성균학유(成均學諭)에 보임되었다. 하루는 과거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 도착한 영해의 유생들을 길에서 만나게 되어 이르기를 “영해부의 소학은 이미 완성되어 그 규모를 갖추었다. 단지 그 건물이란 때때로 수리하지 않으면 쉽게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대들은 마땅히 글을 좋아하는 이에게 부탁하여 소학의 시말(始末)을 기록하도록 하여 여러 후대들에게 보이도록 해야한다. 그래서 이룬 공(功)이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를 들은 영해 유생들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려 왔다. 나는 생각하길 우리나라에서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떨치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이는 대개가 이(利)를 다투는 것을 급선무로 하고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일로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왕궁이 있는 국도(國都)로부터 주현(州縣)에 이르기까지 향교의 기지(基地)가 파괴되지 않은 곳이 드문데, 이군이 능히 향교 건립에 뜻을 두었으니 가히 급히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하겠다.
떨어져 있어, 소학의 규범에 어떤 책을 당연히 읽어야 되고, 어떤 일을 마땅히 해야 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다만 소학의 규범이 구독(句讀)만 익히기만 하면 된다면 쇄소, 응대, 진퇴의 절도를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시문이나 짓고 편지글만 쓸 줄 알면 족하지 않은가, 어찌 예도와 음악과 활쏘기, 말타기, 서예와 산술의 육예(六藝)가 필요하겠는가, 이러한 것은 향촌의 풍습이며 시골의 학문일 뿐이다. 나는 여러 유생들을 위하여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여러 유생들은 더욱 더 힘써야 할 것이다.
소학 건물의 흥하고 폐하는 것은 마땅히 그 관리 책임을 맡은 자에게 있을 것이니, 여기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지정(至正) 7년(1347) 5월 기망(旣望, 16)에 쓴다.

2. 조선시대의 교육

조선시대의 교육은 충효와 삼강오륜, 그리고 상하의 계급과 신분의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써 성리학적 도학(道學) 중심의 교육이 교육이념의 중추를 이루며 지배계층인 양반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육이념을 배경으로 조선시대에는 관학으로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이보다 수준이 낮은 4학(四學)이 있었으며, 지방에는 관학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다. 그리고 사학(私學)으로는 1543년에 세워진 백운동서원을 효시로 하는 서원과 초등사립교육기관인 서당이 각 문중 혹은, 개인적으로 설치되어 문중의 자손 및 각 동리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방의 사립교육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의 교육제도 아래에서 우리 지역의 교육과 관련있는 것은 향교와 서원, 그리고 서당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우리 지역의 교육제도에 대해서 영해와 영덕의 향교와 지역에 설립되었던 여러 개의 서원과 사우(祠宇), 그리고 각 문중단위 혹은 개인적으로 설립한 서당을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선시대의 향교교육과 영덕의 향교제도
향교는 고려 인종대에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나 이후 고려의 정치이념이 불교중심인데다 정치적 권능이 지방에까지 크게 미치지 못하는 여건에 따라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퇴보하였다. 따라서 향교는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였다.
향교가 교육기관으로써 자리잡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이념이 유교적인 도학정신의 구현인데다 태조대부터 인재의 등용을 위한 과거제도의 적극적인 도입과 각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권능이 확실히 미칠 수 있는 지방제도의 정비로 향교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과거시험의 시험과목은 유교의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유학적 소양을 묻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자연히 유학 교육의 중심지인 향교가 그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향교의 운영을 위한 재정은 각 지역의 지방행정기관인 부와 군과 현에서 맡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것은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지방행정기관의 통제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여건을 갖추게 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향교가 지방교육기관의 중추기관으로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1) 영해향교
① 연 혁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영해부의 중심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은 영해향교는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작지산 아래에 세워진 영해부 소학의 후신이다. 소학 건립 당시의 향교 규모는 대성전과 동서 좌우의 곁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중종 24년 (1529)에 부사 공서린(孔瑞麟)이 향내 사족(士族)들과 의논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의 위치로 이건된 후에 여러 번의 중수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는데, 선조 4년(1571)에 영해부사로 부임한 정세필(鄭世弼) 부사시절에 일부 개수(改修)가 이루어진 후, 선조 11년(1578)에 영해부사로 부임하여 온 김부인(金富仁) 부사시절에 서재(西齋)와 주사(廚舍)의 일부를 중수하였으며, 현종 12년(1671)에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이후 숙종 45년(1706)에 향중에서 대대적인 중건공사를 벌여 3년만에 이를 완공하였다. 이 당시에 중건한 건물로는 경각(經閣), 전사청(典祀廳), 주방(廚房), 별고(別庫), 하인청(下人廳) 등이었다. 영조 13년(1737)에 부임해 온 신이진(愼爾晋) 부사시절에 대성전의 중수가 있었으며, 순조 원년(1801)과 헌종 4년(1838)에도 향교 건물의 일부 보수가 있었다. 또 헌종 12년(1846)에 부임한 박희현(朴熙顯) 부사시절에도 담과 경각(經閣)의 일부 수리가 있었다.
이후 1895년에 이르러 전국적인 향교의 정비에 따라 각 처에서 봉납하는 진공(進貢)이 폐지되고, 향교에 딸린 전답은 군수가 장악하도록 하여 향교에서 임의대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향교에는 직원(直員, 首奴) 1인 만이 향교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는 1914년의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1읍1교(1邑1校)의 원칙에 따라 영해향교는 폐지되고 영덕향교에 합병되었다.
영해향교의 교육은 종6품인 교수 1명을 임명하여 향교의 교육을 전담하였으나, 이도 여러 사정에 의하여 여의치 못하여 영조대인 1725년 이후부터는 향교의 모든 교관제도가 없어지게 되어 학문을 배우려고 하는 자들은 서원이나 정사(精祠) 등으로 몰리게 되어 향교의 역할은 자연스레 축소되어 갔다.
이러한 영해향교의 교수 중에 가장 교육적인 공헌을 한 이는 유일재 김언기(惟一齋 金彦璣, 1520∼1588)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1567년에 생원시험에 급제한 후 영해향교의 교수가 되어 영해지역의 사족들에게 퇴계학문을 전달하였으며, 영해지역의 사족들을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의 사족들과의 교유(交遊)의 길을 트기도 하였다. 영해지역에 있어서 유일재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박의장(朴毅長)이 있다.

② 향교의 규모와 건축구조
영해향교의 규모는 고려시대 설립 당시에는 대성전과 동서무(東西), 그리고 행랑과 담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중종 24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겼다. 명종 19년(1564)과 선조 5년(1572) 사이에 태화루(太和樓)가 건립되었으며, 숙종 45년(1706)에는 경각, 전사청, 주방, 별고, 하인청 등이 건립되었다. 이후에 이들 건물의 중수 및 수선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대성전과 명륜당, 태화루, 동재, 서재, 그리고 관리사가 남아 있다.

(1) 대성전(大成殿)
현재의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시멘트로 마감한 2중 기단 위에 자연석을 주춧돌로 하여 원주를 세워 만든 건물이다. 전면의 창문은 5칸 모두 4분합 문이며, 서까래양식은 초익공(初翼工)의 형태이며, 다섯 개의 대들보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심이 되는 대들보 위의 종량(宗樑)에 접시받침을 놓고 그 위에 十자형의 첨차와 양봉(樑奉)을 짠 후 아래의 접시받침 보다 큰 것을 올려서 종량을 받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붕은 전체적으로 맛배지붕을 하고 있으나 전면은 겹처마의 형태로, 뒷면은 홑처마의 형태로 하고 있으며, 양 측면에 풍경(風磬)을 달고 있다.

(2)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전면 5칸을 마루로 하고 좌우 양측칸에 온돌방을 설치하고 가운데 3칸을 역시 마루로 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형태로 홑처마를 구성하고 있다. 기단을 낮게 다진 후 주추를 놓고 둥근 원주를 세우고 마루를 4척 반 정도 높게 만들고 있어 분위기는 누각(樓閣)과 같다. 온돌방의 창문형태는 전면에는 쌍여닫이 세살문의 형태이고, 대청을 향한 좌우 벽면은 외여닫이 세살문의 형태이다.

(3) 동재와 서재
동재와 서재는 일자형(一字形)의 구조로 정면 5칸, 측면 1칸의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건물이다. 각 3칸씩 온돌방을 설치하고 있으며, 양 측칸에 모두 부엌을 설치하고 있으며,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다. 지붕은 맛배지붕으로 홑처마를 가지고 있다.

(4) 태화루
태화루는 누각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홑처마로 다섯 개의 대들보를 갖는 맛배지붕 건물이다. 밀암 이재(密庵 李栽)가 쓴 태화루 기문이 있다.

③ 향교의 배위(配位) 및 제의(祭儀)

(1) 향교의 배위 및 제의

ㄱ) 배위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4성(聖)의 위패와 십철(十哲), 그리고 송조(宋朝) 6현(賢)의 21위와 우리나라의 성현 18현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전(正殿)인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4성과 10철, 그리고 송조 6현의 21위를 모시고, 동·서무에 우리나라의 18현과 중국의 유현(儒賢) 94위를 포함하여 도합 112위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올렸으나, 1949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로 과거 동·서무에 봉안하였던 112위 중에 우리나라의 18현은 대성전에 종향(從享)하기로 하고 중국의 유현 94위는 매안(埋安)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전을 봉행하는 날은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하는데, 이 날을 택한 이유로는 2월은 우로기유(雨露旣濡)의 계절이고, 8월은 상로기강(霜露旣降)의 계절이므로 이 날을 정하였다. 봉행시간은 2월, 8월 상정일 초1각4경1점(初一刻四更一點)이다.
다음의 도〈6­1〉은 영해향교의 배위도차(配位圖次)이다.
중앙의 주벽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를 모시고 동배위(東配位)에는 연국복성공(國復聖公) 안자(顔子)와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자사(子思)를 모시고, 서배위에는 성국종성공(國宗聖公) 증자(曾子)와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맹자(孟子)를 모시고 있다.
또한 동배위에는 낙국공(洛國公) 정이(程), 신라의 홍유(弘儒) 설총, 고려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조선시대의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 문성공 이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경공 김집(金集),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배향하고 있다.
서배위에는 휘국공(徽國公) 주희, 신라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고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조선시대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정공 김인후(金麟厚),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정공 송시열, 문순공 박세채(朴世采)을 배향하고 있다.
영해와 영덕향교에서는 공문(孔門) 10철(十哲)을 제외한 소설위(小設位)로 중국의 5성위와 송조2현, 우리나라 18위를 포함하여 25위를 봉향하고 있다.

ㄴ) 제의
향교의 제의의 절차는 각 향교의 역사와 여건에 맞추어 홀기(笏記)를 제정하여 홀기의 순서에 의하여 춘추제향을 드린다.

(2) 영덕향교
① 연 혁
1998년에 발간된 「영덕향교지」에 의하면 영덕향교의 창건연대를 조선 태종 3년(1403)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행히도 영덕향교에 대한 내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남아 있는 각종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조선시대 말기에까지 군의 동쪽 1리 허의 화림산 동지맥인 현 영덕초등학교 뒷편에 있던 것을 1914년 영덕공립보통학교의 교실로 사용하기 위하여 철폐지경에 이르러 군의 북쪽 화개동 토성리의 민가를 구입하여 봉향하다가 1924년에 학교가 이전하자 다시 종전의 향교를 보수하고 위패를 환안(還安)하였다.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대성전 및 명륜당 외 기타 부속 건물이 전소되어 폐교지경에 이르렀는데, 1965년 전교 신수원(申壽元)과 향중의 유림들이 성금을 각출하여 화개리 현위치의 고가(古家)를 구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후임 전교 박종대(朴鍾大)의 주선으로 대성전 4칸 반과 명륜당 4칸을 개축하였으며, 1970년에는 전교 김우영(金羽英)의 주선으로 대성전 5칸 반과 툇마루를 개축하고, 서재 4칸과 정문 3칸을 신축하고, 동재를 수리하였으며, 기타 부속 건물을 중수하고 전기를 가설하였다.

② 향교의 규모와 건축구조
영덕향교의 창건 당시의 기록이 없어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없다. 다만 「영영승람」에 의하면 1950년 6.25한국전쟁에 의해 건물이 소진되기까지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는데, 대성전·명륜당·양호루·동재실·전사청·하인청·주사(廚舍)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설립 당시에도 이 정도의 규모를 가진 향교로 출발하여 중간 중간에 수차례 중·개축을 거치면서 6.25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내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향교의 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동·서재와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1) 대성전
대성전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전면 가운데 3칸은 쌍여닫이문을 하고 있으며, 기둥은 전면은 원주(圓柱)의 형태로 하였으며, 측면과 뒷면은 방주(方柱)의 형태로 세웠다. 주춧돌은 시멘트 기단 위에 놓은 5량(樑) 가량의 납도리 집이다.

(2) 명륜당
명륜당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마루이며, 양 측면에는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마루의 전·후면에는 유리문을 하고 있으며, 방 전면은 2짝 띠살문을 하고 있다. 정면은 원주로 기둥을 하고 있으며, 측면과 뒷면은 방주형의 기둥으로 명륜당도 5량의 납도리 집이다.

(3) 동·서재
동·서재의 건물도 정면 4칸과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서재는 현재 관리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재는 4칸 모두가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재의 가운데 2칸은 뒤로 물려 마루를 두고, 1칸은 부엌을 두고 있다.

(4) 대문채
대문채는 솟을대문으로 한 맛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가운데 칸은 문으로 하고 좌우의 양측 칸은 방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③ 향교의 배위(配位) 및 제의(祭儀)
영덕향교의 배위와 제의의 절차는 위의 영해향교의 배위와 제의의 절차와 대동소이하다. 조선시대 영덕향교에는 종9품의 훈도가 파견되어 향교의 교육과 운영을 책임졌다. 그러나 이들 훈도의 선발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는 지역의 향교에 훈도의 파견이 폐지되기도 하였다. 영덕향교에서 훈도의 파견이 언제부터 폐지되었는지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어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곤란하다. 순조대에 발간된 「영덕읍지」에 벌써 향교의 훈도가 폐지된 것으로 나오는 걸 보아서 그 이전부터 향교의 훈도가 파견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영덕향교의 석전대제의 축문과 홀기, 그리고 진설도는 다음과 같다.
〈영덕향교석전대제축문〉

維歲次 月 朔初 日 丁丑

            ○   ○   ○              敢昭告于
先聖  大成至聖  文宣王  伏以  道冠百王
萬世之師  玆値  上丁  精?  是宜  謹以牲
幣  醴齊  ?盛  庶品  式陳明薦  以
先師  성國  復聖公  顔氏
      國  宗聖公  曾氏
      沂國  述聖公  孔氏
      鄒國  亞聖公  孟氏  配尙饗

〈석전대제홀기〉

○ 제생은 모두 나아가서 문밖에 늘어선다.
○ 찬인(贊人)은 각 위치에 진설(陳設)하고 나아가서 독()을 연다.
○ 마치면 돌아 나온다.
○ 집례(執禮)는 알자(謁者)와 찬인을 데리고 계단 아래 배위(拜位)에 순서대로 선다.
○ 사배(四拜)하고 각 위치로 나아간다.
○ 찬인이 축 및 제집사 유생을 인도하여 각기 위치에 나아가게 한다.
○ 찬인이 각 헌관을 인도하여 모시고 배위에 나아간다.
○ 헌관은 모두 사배하고 각기 위치에 나아간다.
○ 알자가 초헌관의 좌편에 나아가 향사를 거행하기를 청한다.

< 행전폐례(行奠幣禮)>

○ 알자는 초헌관을 모시고 손을 씻을 자리로 인도하여 홀을 앞섶에 꼽고 손을 씻게 한 후
   홀을 잡고 인도해 나아가서 공자 신위 앞에 끓어 앉게 한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하게 한다.
○ 초헌관은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고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안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끓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한다.
○ 폐백을 받아 신위 전에 올린 후,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증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한 후,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린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자사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한 후,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린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맹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세번 분향한 후,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린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행초헌례(行初獻禮)>

○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공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앉게 한다.
○ 초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올린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일어서서 조금 물러나 꿇어 앉는다.
○ 대축은 초헌관의 좌편에 나아가 동편을 향해 꿇어앉은 다음 축문을 읽는다.
○ 대축은 원위치로 돌아간다.
○ 초헌관은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초헌관은 안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은 후,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초헌관은 증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초헌관은 자사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초헌관은 맹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초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행아헌례(行亞獻禮)>

○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관세 위치로 인도한다.
○ 아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손을 씻은 후, 홀을 잡고 공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아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 안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은 후,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증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자사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맹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행종헌례(行終獻禮)>

○ 알자가 종헌관을 모시고 관세 위치로 나아간다.
○ 종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손을 씻은 후, 홀을 잡고 공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종헌관은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증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자사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에는 맹자님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는다.
○ 홀을 앞섶에 꼽고 잔을 받아 헌작한다.
○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알자는 종헌관을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간다.

< 행분헌례(行分獻禮)>

○ 찬인은 동서분헌관을 각각 인도하여 관세(洗)의 위치에 나아간다.
○ 분헌관은 홀을 앞섭에 꼽고 손을 씻는다.
○ 분헌관이 홀을 잡은 후, 찬인은 동서 분헌관을 인도하여 동서종향
   신위 앞에 꿇어 앉게 한다.
○ 분헌관은 홀을 앞섭에 꼽은 후, 세번 분향을 한다.
○ 잔을 받아 헌작한 후,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다음 각위의 행사는 위의 의례와 같이 행한다.
○ 알자는 분헌관을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진설을 각 위치에서 거두어들이고 독을 덮는다.
○ 대축이 올라가 변두(豆)를 거둔다.
○ 헌관 및 참사자 전원은 사배(四拜)를 한다.

< 행음복례(行飮福禮)>

○ 알자는 초헌관을 모시고 음복할 위치로 나아간다.
○ 초헌관은 서편을 향해 꿇어 앉은 후 홀을 섶에다 꼽는다.
○ 대축은 초헌관의 좌편에 나아가 동편을 향해 꿇어 앉는다.
○ 대축은 잔을 헌관에게 드린다.
○ 헌관은 잔을 받아 음복을 마치고 주효를 받는다.
○ 초헌관은 홀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반 굽힌 후 몸을 바로 세운다.
○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행망료례(行望燎禮)>

○ 알자는 초헌관을 모시고 망료 위치로 인도한다.
○ 초헌관은 북을 향하여 서고
○ 대축은 광주리에 축판 및 폐백를 담고 서편 계단에 설치해 놓은
   구덩이에 축문을 불사른다.
○ 미리 준비해 둔 흙으로 반 덮는다.
○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원위치로 돌아간다.
○ 알자는 초헌관의 좌편에 나아가서 예가 마쳤음을 사뢴다.
○ 찬인은 각 헌관을 인도하여 모시고 나간다.
○ 대축 이하 제집사 유생 차례대로 나간다.
○ 찬을 주장(主掌)하는 자는 속한 이들을 데리고 예찬을 철하고
   대성전 문을 닫고는 물러난다.

2) 조선시대의 서원과 사우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는 중종 38년(1543)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영주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여 고려의 학자 안유를 배향하고, 지역의 유생들을 가르친 것이 그 효시이다. 한편 사우의 기원은 삼국시대에 까지 소급할 수 있으나, 전국적으로 크게 번성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 후기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전해진 이후였다. 결국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유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사우도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서원은 대개 유학의 진흥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강학(講學)과 장수(藏修), 선현봉사를 위주로 하여 제향인물도 유학자들을 위주로 하였다. 따라서 건물의 구조도 사(祠), 강당(講堂), 재(齋), 서고(書庫), 기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우는 조상을 숭배하고, 성현을 숭상하며, 세상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여 성현을 제향하는 곳으로 주로 충신, 열사를 모신다. 건물의 구조는 제향할 수 있는 사(祠)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서재나 정사 등이 있으나, 이들은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독서나 교육을 위주로 하는 것으로 대개 서재 혹은 정사라 하는 단출한 구조의 건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 지역에도 1568년 남강서원(南江書院)의 설립을 필두로 여러 개의 서원이 설립되었으며, 사우로는 1650년에 설립된 향현사(鄕賢祠))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사우가 설립되어 조선시대 후기의 지역의 교육 및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풍속교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오면서 서원의 남설(濫設)과 서원 설립목적인 강학과 장수유식처(藏修遊息處)로서의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문중 혹은 자파의 세력기반처로써 역할을 하는 등 파벌과 당쟁을 조장하는 폐해가 속출하여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에 의하여 전국에 27개의 서원과 20개의 사(祠)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었다.
따라서 우리 지역의 서원과 사우들도 이 당시에 대부분 훼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우리 지역에 설립되었던 남강서원과 향현사을 비롯한 서원과 사우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 여기서는 영덕현, 영해부 등의 조선시대 읍호에 의거하여 구분하였다.

(1) 영덕현의 서원
① 남강서원(南江書院)
(1) 연 혁
남강서원은 선조 원년(1568)에 영덕현령 정자(鄭磁)와 향내의 김난서(金鸞瑞), 신귀년(申龜年), 신홍제(申弘濟), 신경제(申經濟), 박인걸(朴仁傑) 등이 의논하여 우곡리에 창건하였다. 천계(天啓) 원년 신유년인 광해 13년(1621) 3월 15일(음력)에 현(縣)의 북쪽 5리의 엄곡산 아래로 옮겼다가 숙종 26년(1700)에 다시 우곡리로 이건하기로 하고 숙종 28년(1702) 10월 10일(음력)에 이건을 완료한 후, 문원공 이언적과 문순공 이황 양 선생을 봉안하였다. 건물들은 중·개수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까지 내려오다가 대원군에 의하여 고종 8년 (1871)에 훼철되었다.

(2) 서원의 규모
남강서원의 규모로는 설립 당시에는 동쪽에 온돌방과 서쪽에 서늘한 마루가 있었으며, 가운데 회우지당(會友之堂)과 보곡(寶穀)을 저장하는 창고와 곁채와 문, 그리고 포주(廚) 등이 있었으며, 주위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광해 13년(1621)에 화림산의 한줄기인 엄곡산으로 이건되었다가 숙종 28년(1702)에 우곡리로 다시 이건되면서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어 서원으로써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이후에 창건된 건물의 명칭과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체인묘(일명 尙德祠, 體仁廟)가 3칸, 전교당(일명 明敎堂, 典敎堂)이 8칸, 망도루(일명 遊藝樓, 望道樓)가 6칸, 정문이 3칸, 직방재(直方齋) 3칸, 광풍실(光風室) 3칸, 장서각 3칸, 포사(舍) 14칸 등의 규모였다.
서원의 관련기록으로는 현령 정자(鄭磁)가 쓴 기문이 있으며, 현감 김하구(金夏九)가 지은 상덕사(체인묘)의 중수상량문이 있으며, 신임상(申任商)이 쓴 명교당(전교당) 중수기문이 있다.

(3) 서원의 배향인물과 원의 규범

〈배향인물〉
남강서원의 배향인으로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과 문순공 퇴계 이황선생 두분이다. 두분에 대한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 : 학문의 배움과 학문의 연원이 깊으시며, 도덕이 높고 두터우사 우리 동방을 영세토록 계도하심이여(文學文淵深道德高厚啓我大東永世攸久)
문순공 퇴계 이이황 선생 : 공자와 맹자의 도를 마음으로 전하사, 정주와 주자의 학문을 이어 크게 이루시니, 동방 유학의 큰 기둥이 되심 이여(心傳孔孟道紹洛集成大東斯文準極)

〈서원의 원규(院規)〉
남강서원의 원규로는 ○ 읍에 거주하는 생원과 진사, 그리고 과거급제자 중에 학문이 있고, 근면한 이를 원장으로 간택하고, 또 일인을 부원장으로 하여 원의 일을 주무(主務)토록 한다. 원의 일을 주무하는 이로는 학문을 하는 이가 아니면 불가하다. 원내 유생들의 영수(領袖)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이가 아니면 원의 일을 주재(主宰)할 수 없다.
○ 원장은 원중의 보곡(寶穀, 교육재정)을 통할(統轄)하고 검속(檢束)하여야 한다.○원장은 원중의 서책과 원의 담장과 건물을 검속하고 살펴야 한다. ○ 원에 들어오는 유생 중에 원에서 공부할 유생수를 정한다. ○ 유리걸식하는 자들과 한가로이 노는 잡인들의 원내의 출입을 보호하기 위하여 원중에 수직을 세운다. ○ 읍의 수령 자제들이 원내에 거처하는 것을 금한다. ○ 읍의 수령 자제들이 마음대로 원의 서책을 가져갈 수 없도록 한다. ○ 원중에 여색을 출입시킬 수 없다. ○ 원에서 접대할 유생들의 출입을 자주 시켜서는 안된다. ○ 원중에서 잔치나 바둑 또는 장기를 두어서는 안된다. ○ 원장은 유생을 접대하는 것과 해세(海稅)로 바치는 것을 회계하여야 한다. ○ 원중의 서책은 외부로 갖고 갈 수 없으며, 원의 보곡은 사사로이 대여할 수 없으며, 원의 잡물은 타인에게 빌려줄 수 없다. ○ 원의 앞산에는 일체의 벌채를 할 수 없으며, 짐승을 먹일 수 없다. ○ 봄 가을로 대(臺) 위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과 서로 싸우는 것, 그리고 서로 모함하는 것은 중히 다스린다. ○ 원에 거처하는 유생들은 성현의 말씀을 규범과 잠언으로 삼아야 한다. ○ 원장의 교체 때에는 원중의 물건을 서로 주고 받는다. 유사(有司)의 교체 때에는 보곡의 부족이 있으면 교체를 하지 못하며 이의 완납이 있어야 교체를 한다. ○ 원교(院校)에 서로 표리가 있으면 유생들은 서로 규책(糾責)을 받아야 한다. ○ 영해부에서 봄 가을로 소금 4석을 받는다. ○ 청하현에서 봄 가을로 소금 4석을 받는다. ○ 흥해군에서 어물 5종을 받는다. ○ 영덕현에서 어물 7종을 받는다. 서적 및 기타 기물(器物)을 받는다.

② 신안서원(新安書院)

(1) 연 혁
신안서원은 인조 6년(1628)에 영덕현의 서쪽 50리인 북면(현재 지품면) 신안동 주산(朱山) 아래에서 권수암 상하(權遂菴 尙夏), 정 장암(鄭 丈巖) 등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숙종 28년(1702)에는 현의 북쪽 5리 군자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영조 6년(1730)에 현의 동쪽 1리인 토성리(현 화개리)로 옮겼다. 이후의 중·개축 여부는 자료의 미비로 알 수 없으며, 대원군에 의하여 고종 8년(1871)에 훼철되었다.

(2) 서원의 규모
창건 당시의 규모는 자료의 미비로 알 수 없다. 다만 1730년에 토성리로 옮긴 후의 규모로는 집성사(集成祠), 신안서당, 장서각(동재), 양사재(養士齋: 서재), 경광루(鏡光樓), 정문 3칸, 포사(舍) 16칸 등이 있었다.
작자 미상의 청액소(請額疏)가 있으며, 동계 유진성(東溪 柳晉成)의 중수기가 있다.

(3) 서원의 배향인물과 원의 규범

〈배향인물〉
서원의 배향인물은 회암 주부자와 문정공 우암 송시열 두분이다. 창건시에 수암 권상하가 지은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상향축문은 다음과 같으며, 이외에 1730년 이건 후 운석 조인영(雲石 趙寅永)이 지은 주부자와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이건(移建) 봉안문이 있다.

문정공 우암 송시열 상향축문: 의리와 춘추학으로 무이의 도를 따라 여러 유생들을 모아 이루니 백세의 스승이 됨이여(義秉春秋學遵武夷集儒成爲百世師)

〈서원의 원규(院規)〉
신안서원의 원규에 대해서는 상세한 자료가 없어 살펴볼 수 없다. 다만 여기서는 「영영승람」에 기록된 원의 재정규모와 일부 원의 규범을 싣는데 그치기로 한다.
○ 보곡은 조(租) 80석, 태(太:콩) 9석 3두, 대지 16두락, 채전 8두락, 대전(垈田)은 관둔(官屯)으로 조(粟) 2결로 환산한다. 복호(復戶)가 48부(夫), 곽전(藿田)이 1잠(岑)이다. ○ 원 아래의 16호는 역을 없애고 원우(院宇)의 청소와 수리 및 수호(守護)를 하도록 한다. ○ 원중에 속하는 육지와 바다에 따르는 원래의 역(役)은 다른 역이 침범할 수 없으며, 얻은 대로 보존해야 한다. ○ 배 4척과 원안(院案) 외에 1척, 해속(海屬) 11명, 가속(假屬) 22명, 원생 4명, 노(奴) 2구(口), 비(婢) 2구 ○ 태부(太夫, 대부)의 지세(址貰) 봄 가을로 각 50냥 ○ 봄 가을 향사시(享祀時) 청련암에서 도벽지(塗壁紙) 각 9속(束), 4계절의 초하루(朔)에 별혜(別鞋) 20부(部), 백지(白紙) 4속 ○ 개인사(開印寺) 백지 3속, 장지(壯紙) 2장(章) ○ 사자암 및 정수사(淨水寺)에서 손님을 접대시에 장지 2속과 훈장 별혜 1부와 서적 기타 기물을 상납받는다.

(2) 영덕현의 사우
① 수정서사(水晶書祠)
군의 북쪽 5리 화림산 아래 구미리에 있다. 주부 신희(主簿 申禧), 군수 신종부(郡守 申從溥), 증검상 신규년(贈檢詳 申年) 세분을 제향하였다. 묘(廟)를 세덕사(世德祠)라 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고 없으며, 현재는 서사 내에 숙종 5년(1679)에 지었다는 사경재(思敬齋)와 주성재(主誠齋)가 있으며, 담원 홍수보(澹園 洪秀輔)의 기문이 있다.

② 세현사(世賢祠)
세현사는 군의 북쪽 20리 마고산 아래에 장령 김을진(掌令 金乙軫)과 첨추 김주린(僉樞 金周麟)을 제향하기 위하여 창건된 사우이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현재 폐지되고 없다.

③ 모현사(慕賢祠)
군의 북쪽 눌곡리에 있었다. 양몽재 김재락(養蒙齋 金在洛)과 삼오당 김세락(三吾堂 金世洛)을 배향하였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현재는 폐지되었다.

(3) 영해부의 서원
① 단산서원(丹山書院)

(1) 연 혁
단산서원은 선조 41년(1608)에 향내의 사림들이 의논하여 당시의 영해부사 노경임(盧景任)에게 요청을 하고, 죽노 신정립(竹老 申立, 뒤에 활(活)로 개명)이 관찰사에 글을 올려 의논을 정한 후에 오늘날의 창수면 인량리 석대봉(石帶峯) 아래 영귀정의 동쪽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좨주 우탁(祭酒 禹倬)을 봉향하였으나, 인조 9년(1631)에 사림들의 의논에 의하여 문정공 목은 이색을 같이 봉향하였다. 그후 1656년 9월에 목은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으며, 1667년에는 서원이 좁고, 건물이 퇴락하여 이건할 것을 합의하고 관찰사 이태연(李泰淵)과 부사 김옥현(金玉鉉)의 찬조와 도움을 받아 봉황산 밑의 가사리(가산리)에 이건하였다. 이건 후 1668년 1월 17일에 문효공 가정 이곡을 추봉(追奉)하였다.
단산서원은 창건된 지 260년 동안 굉장한 규모와 엄격한 기율, 그리고 인재의 양성과 출입하는 선비들의 정중함은 영남 바닷가의 으뜸으로 교육과 선현봉사의 중심 역할을 하여 오다가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이후 서원에 속한 재산은 신법에 의하여 설립된 학교에 편입되게 되었다.

(2) 서원의 규모
서원의 규모로는 묘당(廟堂)인 상현사(尙賢祠)가 3칸, 강당인 명교당(明敎堂)이 8칸, 동재인 사물재(四物齋)와 서재 삼성재(三省齋)가 각 4칸, 루(樓)인 남덕루(覽德樓)가 10칸, 문(門)인 입도문(入道門)이 3칸, 전사청이 4칸, 주사가 18칸이다. 그외에 묘정(廟庭)의 좌우에 각 1칸을 두어 동쪽 건물을 장서각으로 하고 서쪽의 건물을 영정각이라 하였다.
현종 4년(1663) 겨울에 불이 나 서문루와 동서재, 그리고 전사청 등이 모두 타서 없어짐에 따라 다음해인 1664년에 사람들이 의논하여 가정(嫁亭)의 후손인 관찰사 이경재(李景在)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기부금을 각출하여 새로이 중건하였으며, 목은의 영정도 모사(摹寫)하여 봉안하였다.
야은 남몽양(野隱 南夢陽)의 남덕루 중수기문이 전하고 있다.

(3) 서원의 배향인물과 원의 규범
단산서원의 배향인물은 문희공 우탁과 문효공 가정 이곡, 그리고 문정공 목은 이색의 세분이다. 세분의 상향축문은 다음과 같다.

문희공 역동 우탁 : 정직한 조행(操行)과 신명(神明)의 학문으로 후세들을 크게 계도하사 영세토록 일깨움이여(正直之操神明之學啓休後人永世無)

문효공 가정 이곡 : 효를 인의 근본으로 삼고, 학문으로 도를 실었으니, 향내(鄕內)에 그윽한 향기를 남겼도다. 사림들의 애절한 추모함이여(孝本爲仁文以載道鄕遺仍芬士切追慕)

문정공 목은 이색 : 위도(衛道)의 학문과 경천(擎天)의 의리로 묘당에 숭상되니, 우리로 하여금 격식을 갖추어 제사지내게 함이여(衛道之學擎天之義崇以廟貌格我祀)

② 구봉서원(九峯書院)
구봉서원은 부의 서쪽 10리인 현재 영해면 원구리 중구봉 아래에 현종 6년(1665)에 농은 백동현(聾隱 白東賢)이 당시 영해부사에 청하여 창건하였으며, 1666년에 무의공 박의장과 목사 박홍장을 입향하였다.
정충묘(精忠廟)와 구봉사(九峯祠), 그리고 돈전당(敦典堂)이 있었으며, 서원의 규모로는 묘우 3칸, 중문 3칸, 강당 8칸, 대문 3칸, 주사 12칸의 규모였다. 1998년 현재에는 서원의 건물이 퇴락한 채 원구리 앞의 영해에서 창수로 가는 도로 오른쪽에 남아 있다.

③ 인산서원(仁山書院)
숙종 22년(1696)에 사림들이 공론하여 창수면 인량리에 창건하였다. 존재 이휘일, 문경공 갈암 이현일을 제향하였다.
영조 13년(1737)에 부의 북쪽 항리(項里: 사천리)로 옮겼다가 1741년에 훼철되었다. 다시 1774년에 복설(復設)하였다가 이후에 훼철되었다.

④ 운산서원(雲山書院)
운산서원은 순조 12년(1812)에 사림들의 의논에 의하여 당시 영해부의 북쪽 10리 원황촌 뒤에 세웠다.
충간공 담암 백문보(忠簡公 淡庵 白文寶)와 성헌 백현룡(惺軒 白見龍)을 제향하였으며, 경덕묘(景德廟)가 3칸, 입도문(入道門)이 3칸, 그리고 직방재(直方齋:동재)가 3칸, 박약재(博約齋:서재)가 3칸, 운산서원(강당)이 8칸, 문루가 6칸, 경각이 2칸, 주사가 12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종 5년 (1868)에 훼철되었으며, 대한제국 광무 4년(1900)에 후손인 백순지(白淳志) 등이 재건하여 운산서당으로 개칭하고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충간공 담암 백문보의 상향축문은 다음과 같다.

충간공 담암 백문보 : 사도를 멀리하고 정도를 보호하며, 인군을 바르게 인도하고 약속함에 의연히 우뚝 솟은 정절이여, 우리 후인들을 일깨우도다 (斥邪衛道納約匡君屹爲砥柱起我後人)
⑤ 운계서원(雲溪書院)
운계서원은 순조 24년(1824) 사림의 의논에 따라 영해부의 북쪽 30리 보곡, 즉 현재의 병곡면 영리에 창건하였다. 제향인으로는 충열공 박제상(忠烈公 朴堤上)과 시중 박세통(侍中 朴世通), 그리고 처사 박응천(處士 朴應天) 세분이다.
상현묘와 운계사가 3칸, 강당이 8칸, 대문이 3칸, 주사가 10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서편에 어제각(御製閣)이 있어 숙종과 정조의 시(詩)를 봉안하였다.
충열공 박제상의 상향축문은 다음과 같으며, 현재는 일부 건물과 유지가 거무역리에 남아 있다.

충열공 박제상 : 월성의 충신이요, 일본 땅의 의사이니, 일월과 더불어 만고에 광명을 다투는도다.(月城忠臣日域義士其與日月萬古爭光)

⑥ 대봉서원(大峯書院)
대봉서원은 헌종 13년(1847) 영해부의 서쪽 25리 대봉산 아래에 사림들의 의논에 따라 창건되었다. 지금의 창수면 미곡리이다. 충장공 권자신(忠莊公 權自愼)과 오봉 권책(五峯 權策), 남곡 권상길(南谷 權尙吉) 세분을 제향하였다.
충현묘와 대봉정사가 3칸, 그리고 전교당이 8칸, 대문이 3칸, 주사가 14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으며, 1924년에 경모재를 창건하여 오봉 권책의 분암소(墳庵所)로 삼았으며, 대봉정사는 서당으로 개칭하여 후진 양성을 하였다.

⑦ 인계서원(仁溪書院)
인계서원은 창수면 인천리에 있었으며, 문정공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인계서원의 창건연대는 헌종 14년(1848)이다. 이는 「교남지」에 나온 기록이나, 각종 기록에 1840년 영해향변의 주요 기반처로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840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다.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4) 영해부의 사우
① 도계정사(陶溪精祠)
도계정사는 영해부의 남쪽 10리 도곡에 있었다. 숙종 14년(1688)에 사림의 합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도와 박선(陶窩 朴璿)을 배향하였으나, 숙종 37년(1711)에 대은 권경(臺隱 權璟)을 추향하였다.
묘를 경현이라 하고, 사를 도계라 하였다. 규모로는 묘우가 3칸, 중문이 3칸, 강당이 10칸, 대문이 3칸, 주사가 12칸이었다. 현재는 폐지되었다.

② 향현사(鄕賢祠)
향현사는 영해부의 남쪽 성(城) 밖의 옛 향사당(鄕射堂)에 있었다. 숙종 15년(1689)에 창건되었으며, 1690년에 도사 박종문(都事 朴宗文)과 참판 정담(參判 鄭湛) 두분을 배향하였다.
묘(廟)를 충열이라 하고 사(祠)를 향사라고 하였으며, 고종 원년(1864)에 부사 김희주(金熙周)와 사림의 합의로 중수하였다. 묘우가 3칸, 향사당이 8칸, 주사가 12칸 규모였다. 현재는 폐지되고 없다.

③ 미산정사(眉山精祠)
순조 3년(1803)에 창수면 미곡리에서 사림들의 합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죽노 신활을 배향하였다. 묘를 상현(尙賢)이라 하고, 사를 미산이라 하였으며, 규모로는 묘우가 3칸, 묘문이 3칸, 강당이 8칸, 대문이 8칸, 주사가 10칸이다. 봉안문과 상향축문은 참판 김희주가 지었다. 현재는 폐지되고 없다.

④ 광산정사(光山精祠)
광산정사는 순조 12년(1812) 영해면 묘곡리에서 사림들의 합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난고 남경훈(蘭皐 南慶薰)과 안분당 남길(安分堂 南佶) 두분을 봉안하였다. 묘를 세덕이라하고 사를 광산이라 하였다. 규모로는 묘우가 3칸, 강당이 8칸, 대문이 3칸, 주사가 12칸이었다. 현재는 폐지되었다.
3) 서당교육(書堂敎育)
서당이란 지역내의 사족들이 문중 혹은 개인 차원에서 자제들과 일반 백성들의 자제들을 훈육한 사립 초등교육과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서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설이 없으나, 대체로 고구려의 경당(堂)을 서당제도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특히 우리가 속하였던 신라에도 설총이 경서(經書)를 이두로 풀어서 생도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서당형태의 사설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송나라 사람인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 세집 건너서 서로 바라보고 민간의 미혼자제들이 무리를 모아 선생에게 경서(經書)를 배우고 좀 성장하게 되면 절간으로 가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오동치(卒伍童穉)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서당의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초에는 정치이념이 된 유학의 장려를 위하여 각 군현마다 향교가 설립되어 사립 교육제도의 성립은 미미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정계 일선에 등장하는 중종대에 들어와서는 서당이 향촌사회의 중심적인 교육기관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사림파들의 향약 보급운동과 함께 유학의 사상적 이념을 펼칠 수 있는 도구로써 서당교육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이후 근대의 학교교육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사립교육의 대부분을 담당한 서당의 발달은 16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서당의 인적구성은 훈장(訓長), 접장(接長) 생도로 조직되었으며, 교육내용는 천자문(千字文), 무제시(無題詩),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통감(通鑑)을 비롯하여 경서의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 등의 3학과를 가르쳤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사족의 자제들은 서당을 거쳐 서원, 향교 또는 사학(四學)에 진학하여 과거시험을 대비하거나 수준 높은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조선시대의 사립교육기관으로 향촌사회의 중요한 구심적 역할을 하던 서당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사회경제적인 제도의 문란에 기인한 것으로 매관매직을 통한 관직의 획득 등에 따라 정상적인 교육에 의한 입신출세의 불가능으로 서당교육은 단지 문자해독 정도의 교육으로 전락하였으며, 또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서원들에 의하여 서당교육제도는 자연스레 쇠퇴하여 갔으며, 특히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서당교육은 거의가 사라지게 되었다.
일제(日帝)는 서당교육이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의식의 앙양을 담당하는 불온한 곳으로 보아 탄압책을 펼쳤는데, 일제는 1918년에 「서당규칙」을 만들어 서당교육에 대한 그들의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한 때는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 서당을 경영한 때가 있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소위 보통학교 제도가 설치되어 서당교육은 점차적으로 쇠퇴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어 1918년 8월 총독부가 발표한 기록에 따라 전국적으로 2만 4294개소에 학생수 26만 4835명이던 서당규모가 1940년에는 전국적으로 4105개소에 학생수 15만 8320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교육제도의 확립으로 서당교육은 점차 사라지게 되어 현재는 서당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거의 없게 되었다. 현재는 깊은 농촌마을에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이가 가끔씩 한문강좌를 개설하여 서당식 교육을 펼치고 있는 경우도 있다.
(1) 영덕·영해의 서당
영덕과 영해의 서당교육에 대한 자료는 매우 소략하다. 특히 조선시대 전기와 중기에 있어서의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영덕군향토사」의 창수면 미곡리 편에 “중고서당(重皐書堂)이 있었는데, 광해조에 건립하였으며, 중고 김빈(重皐 金玭)의 연거(燕居)의 장소이다.”라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광해군 이전부터 지역에 서당의 제도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 내려와서 남정면 도천리에도 1800년대에 서당이 세워져 지역 학동들의 훈육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조선시대 후기에 영덕과 영해에 설립되었던 서당목록이다.

3. 근대의 교육

  근대의 교육제도란 1884년의 갑신정변, 갑오경장(1894),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여 1910년 일제에 의하여 대한제국이 몰락할 때까지의 개화기와 1910년 이후에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의 일제 식민지시대의 교육제도를 지칭한다고 하겠다.
조용한 군자의 나라였던 조선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로 개화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사상과 문물이 밀려왔다. 따라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와같이 밀려오는 서구의 사상과 문물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민족의 역량을 신장하기 위하여 근대적 의미의 교육기관을 관립으로 설립하였으며, 또한 민간에는 종교계와 선각자들에 의한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민중들의 교육을 담당하여 많은 민중들을 계몽시켰다. 특히 고종 32년인 1895년의 교육조서(敎育詔書)는 이러한 흐름에 분수령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에 의하여 설립된 관립학교는 주로 관리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교육이 이루어 졌으므로 급변하는 주변정세와 점증하는 백성들의 욕구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선교사 및 지방의 뜻있는 인사에 의하여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민족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 학교의 중요한 교육목표는 민족의식의 고취와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이후 민족의 수난기와 일제의 침략과정에 끝없는 저항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대부분 이들 학교에서 길러졌다할 정도로 민족교육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립교육도 일제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하기 시작(1) 영덕·영해의 서당
영덕과 영해의 서당교육에 대한 자료는 매우 소략하다. 특히 조선시대 전기와 중기에 있어서의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영덕군향토사」의 창수면 미곡리 편에 “중고서당(重皐書堂)이 있었는데, 광해조에 건립하였으며, 중고 김빈(重皐 金玭)의 연거(燕居)의 장소이다.”라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광해군 이전부터 지역에 서당의 제도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 내려와서 남정면 도천리에도 1800년대에 서당이 세워져 지역 학동들의 훈육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조선시대 후기에 영덕과 영해에 설립되었던 서당목록이다.하는 1905년을 기점으로 이러한 사립교육이 그들의 식민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점차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09년 사립학교령을 제정하여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일제의 통감부는 이에 반발하는 많은 학교를 폐교시켜 민족의 교육을 황폐화시켰다.
1910년 한일병탄 후에도 일제는 민족운동의 터전인 사립학교를 계속 폐교시키면서 1910년대에는 6면(面) 1교제, 1920년대에는 3면 1교제로 하여 한국인에 의한 애국교육을 계속적으로 억제하였다. 따라서 지각있는 선각자들에 의하여 전국 각처에서 야학운동이 일어나 일제강압하의 민중들을 계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강압적인 일제도 우리 민족의 강렬한 교육욕구에 밀리어 1930년대에 이르러 겨우 1면 1교제 혹은 1면 2교제를 추진하였지만 이 역시 전국민의 교육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이러한 영향이 해방 이후의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고급 인력의 부족을 가져왔다.
개화기에는 새로운 신식학문을 수용하고 새로운 시대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학교의 설립을 장려함에 따라 전국 각지에 사립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0년 한일병탄 후에는 일제의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다수의 공·사립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때 군내에도 각종 사립 및 공립학교가 설립되어 지역민들의 신식교육과 식민교육이 실시되었다. 특히 일제는 영덕·강구·영해에 공립 심상고등소학교를 세워 일본인 자녀들만의 교육을 별도로 하는 등 민족차별 교육을 실시하였다.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아래 군내에서 이루어진 교육에 대하여 크게 학원과 야학 등의 사립교육과 일제 당국에 의하여 설립된 공립교육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사립교육은 주로 야학과 학원이란 명칭으로 지역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공립교육은 주로 일제의 교육당국에 의하여 설립된 보통학교, 간이소학교, 심상소학교, 심상고등소학교 등의 명칭으로 1면 1교 혹은 1면 2교로 설립되어 지역민들의 교육열을 충족시켰다.

1) 개화기의 교육
본격적인 일제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기 전의 영덕의 교육에 대하여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영덕지역에서의 개화기 교육제도로 처음 보이는 기록은 「산남창의지」의 이한구(李韓久) 조에 1906년 11월 정미(丁未)에 “영덕읍에 들어가 일어학교를 파괴하고 교사 원이하(元以夏)가 왜적에 붙은 죄를 규책(糾責)하였다.”는 구절이다. 이를 보아 1900년대 초에 영덕에는 벌써 개화문물의 유입에 따른 외국어 학원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1908년에는 남정면 장사리의 장사교회에서 장사학교를 설립하여 장사리 인근의 개화기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1909년 5월에는 영해에 김유진(金有鎭) 외에 34명이 출연하여 사립 위산학교(爲山學校, 뒤에 영해공립보통학교로 개칭)를 설립하여 영해지역의 신식교육을 펼치기 시작하였으며, 1910년 6월 21일에는 영해면 성내리에 협창학교가 사립으로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이후 협창학교는 재정의 곤란으로 1910년 7월 24일 영해공립보통학교로 흡수되었다. 또한 지품면 낙평리에도 일신의숙(一新義塾)이 세워져 지품면 내의 교육 일부를 담당하였다.
또한 영덕에는 사립 영신(盈新)학교가 설립되어 지역의 학동들에게 신식교육을 펼치다가 1912년에 영덕공립보통학교에 흡수되기도 하였다.

2) 일제 강점하의 교육

(1) 사립교육
  1910년의 한일병탄 후의 영덕의 사립교육은 각 면내의 선각자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서당을 이용하거나 새로이 학원(學院)을 세워서 공립교육으로부터 소외된 군민들을 대상으로 신식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점증하는 군민들의 교육적인 열망과 민중의 계몽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선각자들의 의욕이 상승하면서 기존의 서당이나 학원에서 수용되지 못한 군민들을 위하여 각 처에 야학을 설치하여 군민들을 계몽하는 교육과 민족의식을 앙양시켰다.
① 학 원
영덕지역에서 일제 강점하의 학원의 시초에 대한 자료는 없다. 다만 일제하에 발행된 여러 신문에 의하면 1926년 창포리의 동지학원(東知學院)에서 야학을 개설하였다는 기록과 1926년 3월 7일에 달산면 대지리에서 일신학원(日新學院)을 개원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남정면 도천리에서 1927년 가을에 진명학원(進明學院)을 개원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 지역도 늦어도 1919년 3월 1일의 3.1독립만세의거 이후 민족실력양성을 위한 민중교육운동이 전개될 당시부터 사립학원이 설립되어 성인 및 청소년들을 위한 단기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1) 동명학원(東明學院)
동명학원은 1929년 3월 축산면 도곡리에서 박종석(朴鍾碩) 외에 지방 유지(有志)들과 지방인사들이 협찬하여 육영사업의 하나로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당시의 교사로는 박순종(朴舜鍾)과 박동진(朴東振)이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은 보통학교조차 없었으며, 각 동리마다 있었던 서당마저 폐쇄되어 농촌 청소년들의 교육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따라서 동명학원의 설립은 이 지역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사상고취와 독립정신을 앙양시켜 주는 정신교육장이 되었다.
더욱이 신간회 사건 이후로는 일제 경찰과 당국의 감시와 탄압으로 인하여 교육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명학원은 무수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지방인사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명맥을 이어 오다가 마침내 1934년 4월 1일에 축산보통학교(축산초등학교의 전신)가 개교되면서 이 학교에 흡수 통합되었다.
출된 학생수가 무려 수천명에 달하였다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졸업생 중에 많은 인사들이 독립운동 및 사회의 지도자로서 앞장섰던 인물이 많았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 학원은 폐쇄되었으나 마을 유지들의 열의로 육영사업 차원에서 유치원을 운영하였으며, 수년 만에 이것마저도 폐쇄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3) 융덕학원(隆德學院)
영덕읍내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1930년 3월에 융덕학원을 설립하였다. 영덕읍내에 1911년 2월 15일에 영덕공립고등소학교, 1913년 3월 13일 영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일제 총독부 주도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이러한 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가난한 농어민의 자녀들과 일반성인들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였다. 따라서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착안하여 융덕학원을 설립하였다.
융덕학원을 설립한 인사로는 정재홍(鄭才泓), 홍영표(洪永標) 등이 있었으며, 교사로는 정계만(鄭桂滿) 강호근(姜浩根) 주병호(朱秉豪) 등이 있었다. 학생수는 백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학생들에게는 학자금을 받지 않는 무상교육이며 교사들도 보수없이 운영하여 왔다. 그러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사상주입의 교육내용을 주로 다루었기에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으로 2년도 못가서 폐지되고 말았다.
그후 일성야학(一成夜學), 계성야학(桂成夜學)으로 개칭하며, 지역민들의 교육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재정적 뒷받침의 부족과 일경(日警)의 감시와 탄압으로 결국은 폐지되었다.
이 학원에서 배출된 학생수가 무려 천 여명에 이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4) 광덕학원(廣德學院), 경신학원(景新學院)
광덕학원은 지품면 송천 2리에 설립되었던 학원이다. 그 설립연대는 미상이다. 혹자는 1919년이라고 하나 광덕학원의 교사 중에 구세군의 권태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믿기 어렵다. 3.1독립만세의거 당시 권태원의 나이가 29세로 이 때 2년형을 선고받고 있다. 이를 보아 광덕학원의 설립은 1919년 이전이던가 1919년 이후일 것으로 판단된다.
광덕학원은 김수홍(金壽洪), 김우현(金禹鉉) 양인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것으로 초대 학원장은 김수홍이었으며, 교사로는 권태원과 축산 화천(현 영덕 화천)의 김형동(金炯東)이 있었고, 2대 원장에는 일제 강점하의 면장을 역임한 김정헌(金廷憲)이었다. 경신학원은 일제 강점하의 당시 지품면장이던 김정헌의 주도하에 지품면사무소 내에 설치되었다.

(5) 경흥학원(慶興學院), 명륜원(明倫院), 동창학원(東昌學院)
경흥학원은 1928년 10월 15일에 2학급으로 편성 운영되다가 1929년 병곡공립보통학교에 흡수되었다. 명륜원은 1931년 문덕일(文德一)이 창립하여 지역의 신식교육을 담당하였으나, 1934년 원전간이보통학교에 흡수되었다. 동창학원은 창수면 창수리에 설립되었던 것으로 일명 점구(店邱) 동창학원이라 하였다. 마을 유지들이 협찬하여 1935년에 설립하여 초대 원장으로 김윤덕(金潤德)이 취임하였으며, 문명퇴치 및 신식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1938년에 폐지되었다.

② 야학운동(夜學運動)
야학은 야간에 근로청소년이나 교육을 받지 못하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비정규적인 학교제도이다. 주로 일제 강점기 중의 1919년 3.1독립만세의거 후에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야학의 설립도 1913년에 공포된 「사설학술강습회에 관한 건」이란 법률에 의하여 심한 제약을 받았다.
야학은 크게 농어민을 대상으로 하는 농어민야학과 근로대중을 위한 노동야학, 그리고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야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 우리 지역에서 설립 운영된 야학은 대개 노동야학과 근로야학이다.
1930년 9월 5일자 중외일보에 의하면 영덕지역에는 당시 40여개 소에 이르는 노동야학이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영덕군 내에는 노동야학 이외에 농어민을 위한 야학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 9개 면 전체에 걸쳐 야학활동이 맹렬히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다만 현재에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그 전모를 밝힐 수가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음의 표〈6­2〉는 일제 강점기 아래서의 우리 지역의 야학관련 자료이다. 표에 의하면 1925년 11월 23일에 병곡면 병곡리에서 학생수 50여명을 대상으로 노동야학이 설립된 이래 1931년 강구면 강구리에서 강구야학이 설립될 때까지 다수의 야학이 설립되어 향학열에 목마른 지역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한편, 민족교육과 계몽교육을 펼쳤다.
특히 창포야학은 동리 내에 두 군데에 있던 서당이 폐지되면서, 동지학원이 설립되어 인근 동리의 청소년과 성인들을 대상으로 신식교육을 실시하였으나, 학비 등에 부담을 느낀 일부 동민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이 학원에다 야학강좌를 개설하여 20여명의 남녀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일 2∼3시간에 이르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야학활동도 일제 당국에 의하여 잦은 탄압을 받았는데, 주로 노동야학이 그 대상이었다. 근로자들에게 민족의식의 고취나 사회주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면 이를 빌미로 하여 폐쇄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30년도의 도(道)의 인가가 없는 40여 개소에 이르는 노동야학들의 폐지이다. 이때에 1928년 7월 8일에 창립한 송천야학도 폐쇄되었다.

(2) 공립교육
일제에 의한 공립교육은 한일병탄 전인 통감부시대부터 일제의 위정자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부임하여 갑오경장 이후에 개편된 학제(學制)를 새로이 개편하는 한편, 1908년 8월에 「사립학교령」및 「교과용 도서검정 규정」과 「학회령(學會令)」을 제정 공포하여 한국인의 자주성을 빼앗고 일제의 교육방침을 한국인들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이후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1910년 한일병탄이 되자 일제 통감부의 제3대 통감을 역임하고 초대 조선총독으로 온 데라우찌마사다께(寺內正毅)는 한국인에게 저급한 실업교육과 실용주의적 교육을 해야 한다는 교육정책을 내세워 6개 면에 1개의 공립학교를 건립하는 제도를 추진하였다. 따라서 영덕에서도 북부를 대표하여 영해에 영해공립보통학교를 1910년 5월 26일에 세웠으며, 남부를 대표하여서는 영덕에 영덕공립보통학교를 1913년 3월 13일에 설립하여 지역에서의 공립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후 1920대에는 3면 1교제로 정책이 바뀌어 남정과 병곡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1면 1교제가 실시되어 군내의 각 면에서 보통학교 혹은 간이학교란 명칭으로 여러 학교가 설립되었다.
표〈6­3〉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 지역에 설립되었던 공립학교의 명단이다. 표에 의하면 우리 지역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공립학교는 1910년의 영해공립보통학교이다. 영해공립보통학교는 1910년 초에 영해 성내동에서 세워진 협창학교가 재정난으로 운영이 곤란해지자 1910년 7월 24일(「경북대감」에는 5월 26일로 기록됨)에 공립보통학교 설립을 인가 받아 이해 9월 개교했으며 1920년에 교사를 신축 이전한 곳이 현재의 위치이다. 1936년 당시에 교장과 선생은 모두 10명이었고 9학급에 학생수는 603명이었다.
학교 부지는 31,975평이나 되었는데, 이것은 향교재산을 공립학교 재산으로 얻어 왔기에 부지가 많았다. 나중에 향교재산이 본래의 소유주인 향교에 귀속되자 학교 부지는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영덕공립보통학교는 사립 영신학교를 흡수하여 1912년 3월 31일에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 미처 교사가 준비되지 않아 영덕향교의 건물을 빌려 가교사(假校舍)로 사용하다가 1922년에 유지 강계홍(姜桂弘)의 사재 2천원의 찬조와 학부형들로 구성된 후원회에서 경비를 모금하여 교실 3칸을 신축하여 현 위치로 옮겼다.
1936년 당시 교장과 선생이 10명이었으며, 이 중에 여선생이 2명이 있었으며, 9학급에 학생수가 663명이고 학교 부지는 29,380평이었다.
남정공립보통학교는 1921년 6월 25일에 인가를 받아 1922년 5월 21일에 교사를 신축하고 같은 날에 낙성식과 더불어 개교하였으며, 4년 뒤인 1926년에는 교실을 증축하여 학교 면모를 일신시켰다. 1936년 당시 학교 부지는 37,294평이었으며, 교장과 선생이 6명, 6학급에 학생수는 333명이었다.
병곡공립보통학교는 1928년 8월 27일에 2학급 규모의 사립 경흥(慶興)학원을 흡수하여 병곡공립보통학교로 명칭을 바꿔 개교하였다. 1936년 당시 교장과 교사는 3명이었으며, 3학급에 학생수는 모두 210명이었다.
지품공립보통학교는 1931년 3월 3일에 신안리 현 위치에 설립하였으며, 이 해 4월 15일에 개교하였다. 1936년 당시 학생수는 2학급에 160명이었고 교장과 선생 2명이 가르쳤다.
축산공립보통학교는 1932년 4월 10일에 설립하여 그해 10월 27일에 개교하였다. 1936년 현재 2명의 교사가 155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원전간이보통학교는 1931년에 유지 문덕일(文德一)이 창립한 명륜원(明倫院:五美)이란 사립학원을 흡수하여 1934년 원전간이보통학교로 개명하고 4월 10일에 개교하였다. 1936년 당시 교사는 1명이었으며, 1학급에 학생수는 40명이었다.
매정간이보통학교는 영덕공립보통학교 부설로 매정에 설립된 것으로 1934년 4월 10일에 설립인가를 받고 1학급 편성으로 경영해 오다가 1944년 3월 31일에 매정공립국민학교로 승격인가를 받아 그해 5월 8일에 개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인천간이보통학교는 1936년 5월 5일에 창수공립국민학교 부설 간이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6월 5일에 1학급 편성으로 개교하여 1942년 3월 20일에 제5회 졸업식을 끝으로 1943년 5월 7일에 인천공립국민학교로 승격인가를 받았다.
화천간이보통학교는 1937년 9월 9일에 축산공립보통학교 부설 화천간이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2학년제 2학급을 편성하여 운영해 오다가 1945년 10월 5일자로 축산서부국민학교로 승격인가를 얻었다.
이외에도 일제는 1906년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1910년에 한일 병탄조약이 강제로 조인되자 총독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곳곳에 헌병을 주차(駐箚)시켜 한민족을 저들의 식민지 백성으로 삼고자 광분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한반도 곳곳에 그들의 식민통치를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하여 행정, 교육 및 각 분야에 일본인들을 파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권의 침탈을 위한 일본인들의 자발적인 한반도 진출도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한반도에 거주하게 된 자국민 아동들을 위하여 일제 당국은 일본인만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1911년 2월 15일에 영덕공립심상고등소학교(盈德公立尋常高等小學校)를 세워 5월 20일에 개교하였다. 이들 학교의 규모는 1936년 당시 선생 2명, 2학급에 학생수가 53명이나 되었다. 이로 보아 1936년 당시 일본인이 영덕에 많이 상주(常住)한 것으로 볼수 있으며, 설립 후에 보습과(補習科)와 고등과(高等科)를 새로 두어 일본인 아동의 교육을 하였다.
영해에도 1916년 8월 9일에 영해공립심상고등소학교를 세웠으며, 1936년 당시 2명의 선생과 2학급에 45명의 학생을 입학시켜 교육을 하였으며, 강구에서도 강구공립심상고등소학교를 1917년 3월 20일에 설립하여 4월 20일에 개교를 하였다. 1936년 당시에 학교규모로는 선생 2명, 1학급 26명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다.
1936년 당시 한국인이 다닐 수 있었던 영덕군내의 공립보통학교 1학급의 평균 학생수가 69명에 달하는데 비하여 일본인 학교인 심상소학교의 1학급 평균학생수는 25명으로 일제의 교육적 차별이 극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1937년도에 들어와서 점증하는 한국인들의 교육열을 충족시키면서 그들 식민통치의 당위성과 한국인들의 일본인화를 위한 의식화를 시키고자 하여 종전의 1면 1교제 대신에 1면 2교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지역에서도 1937년 9월 9일의 화천간이보통학교의 설립을 시작으로 1944년 3월 31일의 매정공립보통학교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무려 10개교의 간이 혹은 보통학교가 설립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교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학교시설은 엄청나게 부족하여 수많은 군민들

이 문맹으로 남아 있었으며, 열화같은 군민들의 교육열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였다. 이러한 것은 이후 광복된 조국을 건설하는데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으며, 지역의 군민들을 비롯하여 전국민들이 골고루 교육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은 결국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부터라고 할 수 있다.

4. 현대의 교육

1) 광복 이후의 교육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게 패망을 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통치의 폭압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으로 삼천리 방방곡곡은 희망에 가득 찼다.
그러나 연합군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에 의하여 3년간의 군정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민족 스스로 자율적인 교육을 펼칠 수 없는 불행한 시대가 일제통치에 이어 미군정 기간동안에도 있게 되었다. 미군정 장관으로 임명된 아놀드는 리카아드 대위를 한국의 교육부문 담당관으로 임명하고 한국의 교육계에서 지도자를 선출하여 한국교육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가 미군정청 교육담당관의 고문이 되어 미군정기 초기의 교육제도의 확립에 일조를 하였다. 당시 군정청의 교육담당부서는 학무국이었다.
1945년 11월 23일에 군정청 학무국에서는 교육계와 학계의 인사 100여명을 초청하여 「조선국교육심의회」를 구성하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우리나라 교육이념과 제도 및 방향을 협의, 결정하기 위하여 10개 분과위원회를 두고 매주 1∼3회의 회의를 열었다. 이때 교육이념을 다루는 제1분과위에서 결정된 “홍익인간”이 오늘날까지 교육의 기본이념이 되고 있다.
1946년 3월 29일에는 군정법령 제64호로 군정청 학무국이 문교부로 승격하여 7국, 1실, 21과, 20계로 나뉘어 군정기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7년 11월 23일에는 대한교육연합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대한교육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48년 문교부에서는 중등 입시지능고사를 창안 발표하였으며, 이해 5월 10일에는 유엔감시 아래 총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의 초대 문교부장관에 안호상(安浩相)이 임명되고, 문교정책은 민주주의와 민족교육을 바탕으로 반공정신을 확립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특히 민주주의 사상을 보급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후 1949년 12월 31일에 전문과 10장 177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교육법」이 공포되어 명실상부하게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군정 기간 동안 영덕에서는 2개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946년 1월 7일에 설립된 원구국민학교와 1946년 11월 6일에 설립된 원황국민학교이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중학교가 설립되지 않은 지역을 중심으로 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되어 지역의 중등교육을 담당하였는데, 1947년 김진대, 배석령, 오태창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병곡고등공민학교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2) 정부수립 이후 현대의 교육
1948년 8월 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됨에 따라 광복된 지 3년만에 유엔의 승인을 받은 독립국가로서 자유우방과 어깨를 함께 하게 되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문교부의 직제는 1실 5국으로 개편되고 1949년에 공포된 「교육법」에 의하여 6,3,3,4학제로 교육단계를 확정하였는데, 이후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학제의 근간이 되었다.
이후 문교부에서는 인격교육을 중시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 가져야 할 품격앙양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두면서, 국민경제의 부흥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1인1기 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남북대치관계의 영향으로 국방교육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학교의 교육과정 운영과 학습지도에 새로운 교육방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정부 수립 후 우리 군에서는 기존의 국민학교 이외에 1949년 10월 1일에 영해동부국민학교가 설립되어 영해면 소재지내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민주교육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 하나씩 교육의 기틀을 잡아가던 중, 6·25 한국전쟁이 1950년에 발발하여 조금씩 갖추어 가던 모든 교육시설들이 파괴되고, 인적자원들이 살상되는 등 교육계 전반에 큰 피해를 미치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6.25한국전쟁이 끝나자 정부는 교육시설의 복구와 교육과정의 생활화와 과학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6.25한국전쟁 이후 제2공화국이 성립하는 1960년까지 군내에서도 위의 영향을 받아 다수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특히 증등교육기관이 이때부터 설립되었는데, 광복 전의 영덕공립농업실수학교의 후신으로 현 영덕종합고등학교가 1951년 8월 30일에 설립되었으며, 뒤 이어 영덕중학교가 1951년 9월 1일에, 영해중학교가 1951년 10월 30일에 설립되었으며, 1953년 4월 1일에는 강구중학교가, 1955년 5월 19일에 영해고등학교가, 1955년 5월 19일에는 병곡중학교가 각각 설립되어 지역 국민학교 졸업생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다수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지역의 향학열을 충족시켰는데, 1955년 3월 9일의 성호국민학교(축산 칠성)의 설립, 1956년 1월 12일의 경정국민학교, 1956년 3월 5일의 오천(지품면)국민학교, 1957년 3월 9일의 신리(창수면)국민학교, 1957년 9월 12일의 오촌(창수면)국민학교, 1959년 7월 13일의 야성국민학교, 1959년 7월 13일의 옥산(달산면)국민학교 등이 설립되어 지역 곳곳에서 군민들의 교육의 열기를 충족시켜 주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에 따른 4.19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시대에는 학원분규, 학생데모, 농촌계몽운동, 교원노조 문제 등의 여러 문제가 불거져 나와 교육계 전반이 어수선한 분위기 였으나, 문교 당국은 민주사회의 건설이란 4.19이념에 따라 민주교육의 실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우리나라의 교육은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군사쿠데타를 기점으로 많이 변모하였는데, 쿠데타를 일으킨 주체세력들은 문교 행정의 기본방향을 인간개조, 빈곤타파, 간첩침략의 분쇄, 문화혁명에 두고, 그 실천방안으로 반공교육의 강화, 협동정신의 앙양, 민족정기의 진작, 근로정신의 실천 배양에 두어 각 일선 학교에 이를 실천하도록 하였다. 1963년에는 사립학교법을 제정 공포하여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하면서 일제의 잔재를 일소시키기도 하였으며, 특히 3공화국 기간 중에 이루어진 국민교육헌장의 공포와 이의 실천을 위한 각급 학교 단위 행사 등은 참으로 볼만 하였다.
3공화국시대에 우리 군에서 설립된 학교는 영해여자상업고등학교(현재 영해여자정보고등학교)가 1967년 3월 6일에 설립되었으며, 강구상업고등학교(현재 강구종합고등학교)가 1967년 11월 29일에 설립되었다. 중학교로는 영해여자중학교가 1964년 1월 11일에, 영덕여자중학교가 1967년 8월 25일에, 남정중학교가 1969년 11월 17일에, 지품중학교가 1971년 1월 25일에 각각 설립되었다.
국민학교로는 도천국민학교가 1965년 6월 30일에, 직천국민학교가 1967년 8월 3일에, 1970년 3월 1일에 인량국민학교가 설립되었다.
제3공화국의 교육은 1973년 10월에 있었던 10월유신에 의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으며, 이러한 것은 1980년대의 제5공화국의 탄생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당시의 교육정책은 강력한 정부 통제하에 이루어진 통제식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교육적인 환경의 개선은 눈부실 정도로 이루어졌으나, 한편으로는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는 산업화의 영향으로 농촌인구의 대도시 유출이 일어나서 1980년대 이후 지역의 아동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1990년대 각 농촌지역의 폐교의 발단을 제공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설립된 군내의 학교로는 1975년 11월14일의 영덕여자고등학교의 설립과 1974년 4월 1일의 축산중학교의 설립, 1974년 12월 27일의 창수중학교의 설립, 1975년 3월 1일에 달산중학교의 설립이 있었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 50여년 동안의 한국교육을 시기적으로 크게 나누어 보면, 미군정기와 과도정부 기간의 교육제도의 개편기, 대한민국 수립 후 6·25한국전쟁까지의 정초기(定礎期), 이후 4·19혁명까지의 양적 팽창기, 짧은 민주당 집권기간 중의 민주교육 이념 내지 교육방법의 반성기, 5·16군사쿠데타 이후의 교육비판기, 1968년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선포를 계기에 따른 한국교육의 혁신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며, 이후 1970년대, 1980년대를 통하여 교육의 질적, 양적 발전의 계기를 가져온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 군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지금은 군내의 인구의 유출로 여러 지역에서 학교가 폐쇄 또는 폐교의 지경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새로이 지역의 교육적 환경을 개선하고, 지역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제도와 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과감한 교육적 투자가 있어야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