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전부와 조적

  고래(古來)로부터 국가의 근간(根幹)을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재정적 수요가 필요한 것이 필지(必知)의 사실이다. 현대의 산업사회와 달리 고대에는 토지에서 산출되는 임산물과 농산물이 주요한 재정수입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임산물과 농산물을 생산하는 토지에 부과하는 전부와,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토산물과 이들 토산물을 공물의 형태로 거두어들이는 공물(貢物)이 국가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재원(財源)이었다.
  따라서 고대 이래 일반 백성들은 전(田)에 부과되는 전조(田租)와 몸에 부과되는 신용(身庸), 그리고 각 호(戶)에 부과되는 호조(戶租)를 부담하며 국가의 재정적 책임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세가지 조세부담도 결국 토지에서 생산되는 생산물로 납부된 것으로 조세제도는 결국 토지제도와 연결된다.
  고래의 우리나라 토지제도는 국유제가 원칙이었다. 국가는 일반 백성들에게 토지의 경작권을 나누어 주어 생활권을 보장해 주는 대신에 일반 백성들은 국가에 대하여 조세를 부담하는 제도였다. 이러한 제도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기 시작한 1900년대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우리 지역에 있어서도 부족국가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강제력 있는 집단 혹은 국가에 의하여 위의 형태와 같거나 변형된 형태의 조세수취가 있어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의 우리 지역에서 이루어진 각종의 조세제도나 지방공물 혹은 토산품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서 지역의 조세부담 및 지역 토산품에 대하여 살펴보기는 사실상 곤란한 실정이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비교적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어 우리 지역에서 부담한 각종 조세와 공물, 그리고 토산품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우리 지역의 전부와 조적, 그리고 지방공물과 토산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전 부

1) 전기의 영덕의 전부

  조선시대 재정수입의 근간은 전조(田租)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전조의 기본이 되는 토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철저히 조사하여 조세의 증대와 조세의 형평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태종 1년(1401)에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을 만들어 흉작시(凶作時)에는 흉작에 다른 손실부분을 관리를 파견하여 정확히 조사하여 조세의 감소를 줄인다든가, 세종 12년(1430)에 수년간의 수확고를 평균하여 평년의 수확량을 책정하고 이를 기초로 전조율(田租率)을 정하는 “공법(貢法)”이란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는 등, 국가와 백성 상호간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세종 26년(1444)에 이르러 토지의 비척(肥瘠)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6등급으로 나누고, 매년의 풍흉(豊凶)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조세를 부과하는 “전분연분법(田分年分法)”을 시행하여 조세의 공평성 및 풍흉에 따른 일반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조절하기도 하였다. 전분 6등급이란 토지 1결의 면적을 측정하는 양척(量尺)의 길이를 6등급으로 나누어 측정하는 것으로 이것에 따라 1결(結)의 면적이 각각 달랐다. 그러나 수확되는 농산물에 대한 수조율(收租率)은 동일하였다. 조선시대의 1결은 10파(把)를 1속(束)으로 하며, 10속을 1부(負), 100부(負)를 1결(結)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 전기의 조세제도의 변천에 따른 우리 지역의 전조(田租)에 대한 부담인 전부(田賦)를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당시에 사용된 전분법에 의하여 조세의 우리 지역의 조세부담을 산정(算定)하여 보았다. 수조율의 산정기준은 논은 상상년(上上年)의 1등전 1결당 수확량을 쌀 40섬으로 하였으며, 밭은 피곡 80섬을 기준으로 하였다.


2) 후기의 영덕의 전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시대 전기의 안정된 사회경제적 체제를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국가의 중요한 경제력인 농업에 있어서 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자작농의 몰락과 대토지 소유자에 의한 상업적 농업이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들어가지 못한 일부 농민들은 영세농과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등 농민층의 분해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상공업에서는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으로 전국 장시가 번성하여 상품유통이 활발하여져 지주층이나 농민층에서도 상업적 작물의 재배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수공업 분야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와 종래의 수공업이 농업생산 활동중에 여가를 이용한 부업의 형태로 이루어지던 것이 양난 이후에는 전문화된 점(店)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도자기와 쇠를 다루는 수공업 분야가 두드려지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양난으로 인하여 각종 장부류(帳簿類) 등과 같은 전적(典籍)의 산일(散逸)과 유민(流民)의 발생으로 인한 행정력의 마비와 조세의 수취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등의 혼란이 따랐으며, 부족한 군량미의 상납에 따른 서얼, 상민, 천민층의 신분상승이 일어났으며, 양반층 내에서도 이러한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양반층은 몰락하여 거의 영세농민의 처지로 조락(凋落)하기도 하는 등 신분계층 내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편 부세제도(賦稅制度)도 종래의 미곡이나 포(布)로 납부하던 것에서 전(錢)으로 공납을 대납케 하는 대동법이 시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종래에 2필을 납포(納布)하던 것을 1필로 경감(輕減)하여 균일화시켜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경감시켰다. 그리고 균역법(均役法)을 뒤이어 시행하여 이에 따른 부족분(不足分)은 국가가 다른 곳에서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도도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였는데, 대동법의 경우도 공물과 신역(身役)은 감소되었다고 하나 전답에서의 수세(收稅)는 더욱 무거워졌으며, 균역법의 경우에도 부족액을 보충하기 위하여 죽은 자나 어린이, 친족과 이웃에까지 부과하는 등 폐해가 점차 심대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각처에서 일어나는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와같은 배경 아래서 조선시대 후기에 영덕·영해지역에서 이루어진 전부·조적·부세 등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아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선조들의 삶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영덕현〉

(1832년의 영덕읍지)
〈전       부〉 원장부한전(元帳付旱田) : 1,500결 63부 1속(실경작 923결 64부 6속)
수전(水田) : 599결 51부 4속(실경작 445결 5부)
〈전세(田稅)〉 목(木,무명) 14동 1필,미(米) 138석 2두,
태(太,콩) 18 석, 2두1도(刀)5합(合) 6석(夕)―3월 수봉 4월 하납
〈대       동〉 목 28동 16필, 미 217석― 3월 수봉 4월 상납
〈조       적〉 군자창 : 미 497석 8두 2합 1석, 태 1두 6도 8합,
            조(租) 196석 10두 8도 5합 9석, 피모(皮牟,겉보리) 4두 9도 2합 6석.
좌수영 : 미 423석 3두
진   청 : 미 463석 12두 9도 6합 4석, 태 14석 8두 1도 7 합 2석,
            조 1석 1도 3합5석, 피모 9두 9도 9합 7 석.
정부(政府) : 미 80석 6두 1도 2합 4석, 태 82석 8합 7석,
                  조 17석 5두 7도 6합 4석, 피모 1석 6두 1도 7합 9석.
균군(均軍) : 미 38석 9두 8도 2합 3석,태 60석 7두 4도 6합,
                  조 7석 11두 7도 2합 3석, 피모 9두 2합 3 석.
혜청(惠廳) : 미 1,180석 8두 1도 6합 9석, 조 21석 11두 2도 2합.
수성(守成) : 미 12석 5두 2도 7합 2석, 조 23석 10두 2도 7합 3석.
삼사(三司) : 미 13석 11두 9도 5합 7석.
류향미(留餉米) : 1석 11두 9도 9합 3석.
관 리 미 : 11석 5두 7석.
○성미(○城米) : 1석 11두 9도 3합 7석.
호 조 미 : 5두 2합.
양진급대미(兩鎭給代米) : 16석 8두 8도 9합2석.
보향미(補餉米) : 16석 5도 7합 2석.
별회미(別會米) : 431석 12두 7도 1합 9석, 태 132석 1두 6도 2합 3석,
                         조 2석 4두 6도 5합, 피모 2,283석 7두 7도 2합 8석.
대구감모미(大丘減毛米) : 142석 8두 7도 6합 8석.
수 성 창 미 : 33석.
좌산성미(左山城米) : 154석, 태 53석 6두 1도 1합 5석.
사환미(社還米) : 2,400석.
(1935년의 영영승람)
〈전      부〉 원전답병(竝) : 1,912결 89부 5속내(內) 실전답 1,377결 87부 5속.
〈전      세〉 목(木, 무명) 13동 19필 21척 2촌,미 110석 7두 3승 9합 5작,
태18석 10두 4승 8합 8작 ― 3월 수봉 5월 상납.
〈대      동〉
목 15동 ― 3월 수봉 4월 상납. 미 792석 11두 4작내 350석은 목 15동으로 하고, 227석은 관수미 유청지사객지공(官需米油淸紙地使客支供)으로 공제하고, 여미(餘米) 215석 11두 4작은 저치(儲置)함.
< 조      적> 재곡(財穀)군자창미 : 피, 잡곡병 1,166석 6두 9합 8 작(勺).
상 평 창 : 소두 1석 4두 8승 9합 7작.
진 색 미 : 피,잡곡병(幷) 210석 3두 5승 2합 1작.
상평창미 : 피,잡곡병 451석 12두 5승 2합 5작.
〈균      세〉
선염(船鹽)·곽세(藿稅) : 1,715냥 3분에서 271냥 5전 11조 (條)와 86냥 1전 5분을 태가(價)로 공제후 실상납 1,357 냥 3전 9분-3월
  3월 수봉 4월 육로로 상납.
  위에서 1832년의 「영덕읍지」와 1935년도에 나온 「영영승람」에서 영덕현의 전부를 비교하여 보면 1832년의 2,100결 14부 1속< 한전(旱田)과 수전(水田) 합친 것임, 10파(把)를 1속, 10속을 1부(負), 100부를 1결이라함> 내에서 실제 경작되는 규모를 1,368결 69부 6속이라 하였는데, 1935년에는 원전답 1,912결 89부 5속내에 실제 경작되는 규모를 1,377결 87부 5속이라 하고 있다. 이와같이 두 기록 중에 실전답에 대한 규모는 거의 차이가 없는 반면, 1832년의 장부상 전답의 규모가 1935년의 기록에 와서는 187결 45부 5속이 줄어들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세의 부담이 그만큼 줄어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외에 1935년에는 균세(均稅)로 선염(船鹽)과 곽세(藿稅,미역채취세)가 1,715냥 3분이 조세로 수취되는 것으로 해안지역의 어민들에게도 상당한 정도의 부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해부〉
(1932년의 영해읍지)
〈전     부〉
원장부전답 : 1,993결 34부 7속내 775결 27부 9속을 양후(量後) 진잡탈로 공제, 실경작 1,218결 6부 8속내 330결 6속 각양면부세절수제(各樣免賦稅折受除)함.
〈전     세〉
총 888결 6부 2속 작미목(作米木) 하납동래, 404결 19 부 40속 각양면부세절수복호제함.
〈대     동〉 총 813결 87부 4속 작전목. 상납선혜청,116결 27부 1속 각양면부세제함.
〈균     세〉
총1,101결 79부 7속은 매결 5전 1분식 작전(作錢)하여 상납균역청.
화전세(火田稅) : 60부 작목대전(作木代錢)하여 15냥 3전 () 상납호조.
요역(田役) : 매호 춘추로 세곡 1두 3승, 매구(每口) 소목 (燒木)8지(支), 매부탄(每夫炭) 1석, 치(雉) 1수, 계(鷄) 1수, 고초(藁草) 200근(斤).
(1935년의 영영승람)
〈전     부〉 원장부 전 : 1,407결 23부 9속.
           답 : 586결 10부 8속
(합계 1.993결 34부 7속내에 908결 44부는 진잡탈(陳雜)로
 
제함). 실제 경작은 1,084결 90부 7속으로 이중 141결 5부 8속은 면부세(免賦稅)로 공제함.
〈전     세〉
총계 943결 34부 9속인데, 미목(米木)으로 동래에 하납. 그중 146결 36부 5속은 각양복호(各樣復戶)에 공제하고, 대동총계 796결 98부 4속은 전목(錢木)으로 만들어 상납 선혜청 함.
화전세 : 66부 작목대전(作木代錢)하여 25냥 3전 상납 호조.
〈균     세〉
678냥 5전 1분(분:푼) 상납 균역청.
요역 : 매호하추로세곡(每戶夏秋路貰穀) 각 1두 3 승,
매호 소목(燒木) 18지, 매부탄(每夫炭) 1석, 치(雉) 1 수,
계 1수, 고초(藁草) 200근.
  조선시대 후기의 영해부의 전부와 전세의 변화를 살펴보면 1832년 당시의 전부는 1,993결 34부 7속내에 실제 경작은 1,218결 6부 6속에 전세가 부과되는 것은 888결 6부 2속이며, 1935년의 「영영승람」에 나온 기록을 보면 전답(田畓)을 합쳐 전부는 1993결 34부 7속으로 1832년도와 같다.
  그러나 실제 경작에 있어서는 1,084결 90부 7속으로 133결 71부 9속이 줄어들고 있으며, 전세에 있어서도 실제 줄어든 경작지에 비해 늘어나고 있다. 즉 1832년의 888결 34부 7속보다 1935년의 기록에는 943결 34부 9속으로 오히려 55결 99부 2속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이 지역 백성들에게 조세의 부담이 과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