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지역 상업의 일반적 개요
시장이 문헌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삼한시대이다. 그리고 신라 지증왕 10년(509)에는 경주에 동시(東市)를 설치하고 감독관을 두었다고 하며, 지방에도 향시(鄕市)가 있었다고 한다.
시장이란 인구증가와 산업의 발달로 각처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발전하게 된 유통체제의 하나로 삼국시대에는 방직기술과 금은세공, 나전칠기 등의 공예품 제조기술이 발달하여 이들 생산품이 시장의 중요한 교환품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칠기(漆기) 등 목공예품 제조와 제지(製紙)업의 융성과 고려 청자 등 자기 제조가 발달하여 이들 생산품의 교환과 판매를 위한 상업이 자연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고려는 해상을 통한 대외무역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인위적 계급의 구분으로 상업이 천시를 받아 상업에 종사하는 자체가 대접을 받지 못하였지만, 물자의 교류는 어느 시대에도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국가를 경영하기 위한 물자의 조달을 위해 서울에는 시전(市廛), 지방에는 향시(鄕市)를 두어 이들 물자의 조달 및 물물교환을 하는 등, 어느 시대보다 시장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중앙의 육의전 이외에 지방에서도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날에 모여 거래를 하는 장시의 개설이 있었는데, 그 시작은 성종 초부터 이루어졌다고 한다. 즉 성종 초에 전라도에서의 기근을 계기로 장문(場門)을 열어 물자의 교환과 판매를 허락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이어 중종과 명종조에 이르러 이 장문이 충청도와 경상도에 두루 파급되면서 점차 일반화되어 갔다고 한다.
이들 장시의 개시일은 대개 닷새만에 여는 5일장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며, 각 장시의 개시 장소와 거리는 30리 혹은 40리 정도로 하여 보부상인(褓負商人)들이 하루만에 장을 보고 다음 장으로 옮겨갈 수 있는 거리 정도에 개설하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상업의 발달에는 화폐의 발달이 필수적이었는데, 대체로 조선 중기까지는 농산물을 화폐 대신으로 사용하여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다가 차츰 주화(鑄貨)를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는 주로 봇짐장수들이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각종 상품을 사고 파는 무점포 보부상의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접어들면서 각 지방마다 상업을 전업으로 하는 지방상인이 늘어나면서 점포를 가지는 상업인이 생기기도 하였으며, 판매되는 상품의 종류로 일상 생활용품을 주로 하여 곡물, 옹기, 가축, 직물, 어물, 생약품 등으로 그 종류도 다양하여졌다.
특히 17세기 이후에 상업의 발달이 급속히 일어났는데, 이는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고, 농촌에서 유리된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상업인구가 늘어나면서 상품교환의 수요가 늘어나자, 시전상인 외에 사상(私商)이 생겼는데, 이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화를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으며, 청나라와 일본과의 대외무역에도 참여하여 부를 축적하는 등 상업으로 성공한 자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 각지에 장시가 더욱 발달하여 교역의 장소로 정보교환과 오락 장소로 쓰였으며, 도시에서는 상공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나타나 도고(都賈)라는 독점적 도매 상인도 나타났으며, 특히 대동법의 실시로 상품 조달을 위한 공인의 활동이 증가하면서 더불어 장시도 성장하여 갔다. 이렇게 번창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전국에 1천여 개소에 달할 정도로 번창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수많은 객주나 여각이 나타났고, 거간이 생겨 장시를 통한 유통구조는 보다 활성되어 갔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에 이르러 외국에 의한 강제 개항으로 외국상품의 수입과 미곡의 유출로 농촌 경제는 물론 상업도 심한 타격을 받았는데, 특히 청일전쟁이후 일본에 의한 무역독점, 이권탈취, 금융지배, 차관제공, 토지 약탈 등은 우리 나라의 상품유통구조에 심한 타격을 입혔으며, 나라 경제는 더욱 피폐해져 갔다.
이에 대하여 우리 민족은 방곡령 시행, 국채보상 운동 등, 경제적 침탈을 저지하려는 운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저항운동을 벌리는 한편, 각종의 근대적 회사와 공장, 은행 등을 설립하여 민족 자본에 의한 근대적 경제 체제를 이룩하려는 노력을 하였는데, 개항 이전에 일부 형성되었든 상업자본은 외국자본주의의 침략 앞에서 상권수호 운동을 전개하였고, 근대적 생산공장의 경영에 투자하기도 하였다. 자본 축적에 성공한 일부 상인은 상회사(商會社)를 설립하였고 우리 자본에 의한 은행도 설립하였지만 일제의 정치적 압력과 경제적 침탈에 의하여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리 영덕 지방은 옛부터 해안을 끼고 있는 곳이므로 상업의 타지에 비하여 매우 번성한 곳이었다. 농산물은 자급자족이 되지 못하는 고장이나 해산물이 풍부함에 따라 많은 외지의 곡상과 어상이 많이 몰려드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축산, 병곡, 창수를 제외한 각 면별로 시장(장날)이 개장되어 농수산물을 비롯한 일상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고 파는 5일 시장이 활발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여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읍면 소재지 마다 상설 매점이 운영되고 있는 현실이 되자, 5일 시장은 점차 쇠퇴하여 지금은 영덕, 강구, 남정(장사), 영해 시장만 운영되고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