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사법 행정

  사법제도가 오늘날과 같이 일반 민중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로 정착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사법이란 용어의 의미는 국가의 통치작용의 하나의 축인 사법을 통하여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사법제도의 전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1. 근대 이전의 사법제도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으로 제도화된 사법기관이 설치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인 고종 31년(1894)에 일어난 갑오경장에 따른 제도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된 법률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이 공포된 이후 부터이다.
  갑오경장 이전의 사법제도란 행정과 정치과정의 일부에 종속된 것으로 삼권의 분립이나, 사법권의 독립이란 개념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시대로 사법도 행정을 보조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따라서 민간의 분쟁의 해결과 처벌권을 중앙 또는 지방의 관리에게 위임하는 방식인 곧 사법과 행정이 1인의 관리에게 집중되어 있는 그러한 제도로 되어 있었다. 물론 이 당시에도 이에 해당되는 법령과 원칙이 있어 억울한 재판이 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인에 의한 기소권과 처벌권이 집중되어 있어 자의적 판단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대개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에 대한 것은 율령이 반포되는 시기를 사법제도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 율령체제가 성립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이다. 이에 관하여 우리 지역이 속하고 있는 신라에 국한시켜 본다면 신라는 법흥왕 7년(250)에 율령을 반포하고 있다. 물론 율령반포 이전에도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사법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흥왕대에 들어오면서 신라는 율령을 반포하는 한편, 이방부(理方府)라는 관청을 두어 법률, 소송, 형옥 등에 관한 사법업무를 담당할 본격적인 조직체를 구성하여 제도와 법률에 따른 정치를 비로소 하기 시작하였다.
  이방부는 처음에는 하나의 조직체였다가 나중에 두 개의 조직으로 분리되는데 진덕여왕 5년(651)에 둔 좌이방부와 문무왕 7년(667)에 설치된 우이방부가 이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앙관서에 형부(刑部, 뒤에 전법사, 형조, 언부, 이부로 개칭)를 두어 그 장관을 형부상서(刑部尙書)로 하고 장관이 중앙의 사법업무를 총괄하였으며, 각 지방은 지방의 수령이 1심 사법기관이었다. 주진(州鎭)에서는 병마사가 1심 사법기관이었으며, 중죄인일 경우 상급기관인 안렴사와 계수관(界首官)이 2차 심사기관이 되어 심판을 하였으며, 2차 심사에도 승복하지 못하면 국왕에게 상주(上奏)하여 국왕과 함께 재판을 하는 오늘날의 3심제도와 비슷한 삼복(三覆)제도가 있었다.
  또한 중앙에는 어사대(御使臺, 뒤에 금오대, 감찰부, 사헌부로 개칭)를 두어 공무원의 부정을 감찰하도록 하였으며, 형사재판에 있어서는 작은 사건은 5일, 큰 사건은 20일, 도형(徒刑) 이상 해당되는 죄는 30일 안에 판결하도록 하는 형사재판 정한법(定限法)이 시행되었다.
  예종 1년(1106)에는 고문금지를 위한 법령이 발표되는 등 나름대로 백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행정관이 사법관을 겸직하였으므로 행정과 사법의 분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행정관에 의한 독단이 많았다.
  조선시대의 사법행정제도는 고려시대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사법행정제도는 현대의 사법행정제도와 같이 완전히 독립적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민사와 형사사건의 구분 자체도 명확히 되지 않아 재판이라 하면 거의 형사재판을 지칭할 정도였다.
  재판기구에 있어서도 국가의 행정기관이 재판을 관장하였는데, 재판관은 국왕에 의하여 임명된 관료들, 즉 지방수령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도 사법업무는 행정의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즉 행정권 안에 사법권이 포함되어 있는 행정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사법기관으로는 중앙에 형조와 의금부, 한성부의 3법사(三法司)와 사헌부가 있었는데, 형조는 법률, 사송, 노비, 상언을 관장하는 사법행정의 최고감독기관이었으며, 의금부는 국왕의 명령에 의해서만 활동하는 특별기관이었으며, 사헌부는 공무원의 비위를 감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는 업무를 주로 하는 사법기관이었다. 지방에는 국왕이 임명하는 각급 단위의 수령들이 사송(詞訟)과 태형 이하에 해당하는 재판을 전결하는 등, 정해진 절차에 의하여 사법행정을 펼쳐나갔으며, 관찰사는 도형(徒刑) 이하에 해당하는 재판에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사송사건에는 제2심의 재판을 담당하였다.
  국왕은 모든 권한의 근원으로 최고, 최종의 재판권을 보유하는 것으로 필요하면 국왕이 직접 재판하는 친국청(親鞠廳)을 설치하여 재판에 간여하기도 하였다.

2. 근대 이후의 사법제도

  근대의 사법제도는 고종 31년(1894)에 일어난 갑오경장의 후속조치인 제도개혁에 의해서이다. 동년 3월 25일 법률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되었는데, 이 법에 의하여 지방재판소, 개항시장재판소, 순회재판소, 고등재판소, 특별법원의 5종2심제를 예정하고 있었으나, 이 법은 종래의 군수나 감사에게 맡겨졌던 업무의 대부분인 재판업무를 빼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지방수령들의 상당한 저항이 있었다. 그래서 한성재판소만이 겨우 독립재판소로 설치되었을 뿐, 나머지는 종래대로 지방관이 재판업무를 취급하고 권한을 행사하였다.
  특히 대한제국 말엽인 1905년 11월 17일에 일제의 야욕에 의한 강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제에 의한 사법 간섭이 시작되었는데, 일제는 한국의 사법제도를 개혁한다는 명목으로 고문정치를 재판소에까지 확대하여 법부에 일본인 고문관을 두었으며, 각 도재판소, 각 개항장재판소 등에 일본인 법무보좌관 등을 두어 재판에 대한 간섭을 하였다.
  1907년 6월에 일본은 헤이그밀사사건을 트집잡아 「정미7조약」, 「한일신협약」을 맺어 일본인을 한국관리로 임명하는 권한과 이 조약의 부속서류인 「실행각서」로 재판제도를 일본의 재판제도와 같이 대심원, 공소원, 지방재판소, 구재판소와 같은 3심급 4종의 각급 재판소를 신설하여 사법권의 실질적인 강탈을 하였다.
  1909년 7월 12일에는 「한국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를 강제로 교환케 하였다. 이는 한국재판소를 없애고 일본법에 의한 일본재판소를 신설하는 것으로 사법권의 탈취가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이해 11월 1일에 시행된 「통감부재판소령」에 의하여 일본에 의한 고등법원, 공소원, 지방재판소 및 구재판소가 개설되면서 한국정부의 대심원, 공소원, 지방재판소 및 구재판소가 모두 폐지되어 한국의 재판업무는 일본에 넘어갔다.
  1909년 10월에는 「통감부변호사규칙」을 새로이 공포하여 한국인 변호사뿐만 아니라 일본인 변호사도 등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변호사 제도는 일본이 1905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 체결과 때를 같이하여 「변호사법」이 공포되면서부터 최초로 도입되게 된 사법제도의 근대화를 나타내 주는 제도였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늑탈로 한일병탄이 이루어지게 되어 총독부가 설치되었으며, 이해 10월 1일 총독부재판소령에 의하여 모든 사법행정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12년 3월 12일에는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을 개정하여 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의 3급3심제로 정비하였는데, 종래의 지방재판소를 지방법원으로 구재판소를 지방법원지원으로 개편하였다.
  위와 같은 일제하의 각종 사법제도는 1944년 3월에 “재판소전시특례“를 제정 공포하여 민형사 사건을 2심제로 할 때까지 계속 존속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광복된 후 미군정기간 동안의 중요한 사법제도의 변천은 1946년 12월의 사법부장의 명령으로 검찰기관을 재판소 부설로부터 독립시킨 것으로 이것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있다.
  1948년 5월 4일에는 미군정법령 제129호에 의한 「법원조직법」과 「사법서사법」을 이 해 7월에 「변호사법」을, 8월에는 「검찰청법」을 제정, 공포하여 대한민국의 수립을 기다렸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사법권의 획기적인 전환기가 된 것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미군정청이 관할하던 사법권을 되찾아 오면서 명실상부한 사법권의 독립이 이루어지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7월에는 일본제국주의 강점 이래 종전까지 재판업무에 적용하여 오던 기본법의 제정 움직임이 있었는데. 먼저 「구법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하고 구법정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해 12월까지 일제치하의 모든 법령과 미군정치하의 군정법령을 모두 정리하여 기본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 명령, 규칙, 규정 등을 우리실정에 맞게 새로이 고쳐서 공포하고 나머지는 폐기처분 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구법을 완전히 정리하여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법률체계를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