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염(製鹽)·공장(工匠)·도기소(陶器所)
바다를 끼고 있는 이 지역에서의 소금은 여타 해산물과 함께 주요한 특산물의 하나였다. 이 지역의 소금 제조방법은 간만의 차이가 많이 나는 서해안과는 달리 바닷물을 농축시킨 뒤 그 물을 끓여서 만드는 전오식(煎熬式) 자염분(煮鹽盆)이 대부분이었다. |
〈영덕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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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 |
조선시대 전기에 있어서 상공업은 자급자족적인 가내부업의 형태가 대부분이었으며, 이 중에 전업(專業)으로 수공업을 하는 자를 「공장(工匠)」이라 하였다. |
조선시대 전기에 있어서 영덕·영해지역의 달산 흥기· 축산 망골·지품 오천 등지에서는 민수용으로 많은 도기를 구어 내어 일반 백성들의 수요를 충당하였다. 2. 조선 후기의 지역시장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대토지 소유자에 의한 상업적 농업이 시작되고, 전업적 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교환하기 위한 상행위의 필요성이 높아져 갔다. 따라서 이들 생산품을 교환 또는 매매하기 위한 유통조직의 필요성이 점증하였다. |
위의 표〈35〉를 보면 영덕은 1832년 「경상도영덕읍지」에 의하면 3개의 장시가 개설되었던 것으로 나오며, 그 이후에 지품장·강구장이 추가되어 5개의 시장이 개설된 것으로 1935년에 나온 「영영승람」에 기록되어 나온다.
이는 개항 이후 강구항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하게 생산되는 해산물 교역의 필요성과 지품·신안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농·임산물의 생산이 활발하여 이의 교역의 필요성이 증대된 것이 이들 시장의 주요한 개설 원인으로 보여지며, 이를 보더라도 조선시대 후기에 있어서 이 지역의 상거래는 매우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해는 석보장이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영양으로 이전되어 가는 한편, 병곡장이 추가로 개설되어 시장의 숫자에는 변동이 없다. 그러나 영해부의 부시(府市)인 영해장은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거래규모가 큰 시장으로 멀리 영천에서 울진·영양·진보·안동에서 까지 상인들이 오는 대규모의 시장이었다. 조선시대 후기인 영조와 현종대의 인물인 서유구(徐有 1764∼1845)가 쓴 「임원경제지」 권 4 예규지(倪圭志) 화식(貨殖) 편에 의하면 당시 영덕읍내장과 영해부시에서 거래된 물품은 다음과 같다. |
〈영덕읍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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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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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의 장사장이나 식율장, 강구장, 병곡장에서 거래된 물품의 종류도 위의 두 장에서 거래된 물품의 범위에서 거래량의 다과(多寡)에 차이가 있을 것이나 대체로 위의 물품들이 거래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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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대토지 소유자에 의한 상업적 농업이 시작되고, 전업적 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교환하기 위한 상행위의 필요성이 높아져 갔다. 따라서 이들 생산품을 교환 또는 매매하기 위한 유통조직의 필요성이 점증하였다.
이러한 유통조직을 대표하는 것이 시장인데, 후기에 들어와서 이러한 시장의 개설이 전국 각지에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791년 신해통공 (申亥通共)을 계기로 정부의 사상(私商)과 도고(都賈), 장시(場市)에 대한 금압정책이 폐지되자 이러한 추세는 급류를 타게 되어 18세기 후반에는 전국적으로 1,000여개의 시장이 개설될 정도였다.
이와같은 흐름 속에 영덕·영해 지역도 여러 곳에 시장이 개설되어 지역민들의 경제활동에 많은 편리를 제공하였다.
우리 지역에 개설된 장시의 기원과 거래된 물품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미흡하여 추정하기가 곤란하나, 1832년의「경상도읍지」내의「영덕·영해읍지」의 장시조에 의하면 영덕은 읍내장·식율장·장사장, 영해는 부시(府市)·석보시 등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1800년대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지역민과 외지인들 간의 거래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조선시대 후기의 영덕·영해 지역의 시장에 대한 각종 기록을 도표화 한 것이다.
위의 표〈3–5〉를 보면 영덕은 1832년「경상도영덕읍지」에 의하면 3개의 장시가 개설되었던 것으로 나오며, 그 이후에 지품장·강구장이 추가되어 5개의 시장이 개설된 것으로 1935년에 나온「영영승람」에 기록되어 나온다.
이는 개항 이후 강구항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하게 생산되는 해산물 교역의 필요성과 지품·신안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농·임산물의 생산이 활발하여 이의 교역의 필요성이 증대된 것이 이들 시장의 주요한 개설 원인으로 보여지며, 이를 보더라도 조선시대 후기에 있어서 이 지역의 상거래는 매우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해는 석보장이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영양으로 이전되어 가는 한편, 병곡장이 추가로 개설되어 시장의 숫자에는 변동이 없다.
그러나 영해부의 부시(府市)인 영해장은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거래규모가 큰 시장으로 멀리 영천에서 울진·영양·진보·안동에서 까지 상인들이 오는 대규모의 시장이었다. 조선시대 후기인 영조와 현종대의 인물인 서유구(徐有1764∼1845)가 쓴「임원경제지」권 4 예규지(倪圭志) 화식(貨殖) 편에 의하면 당시 영덕읍내장과 영해부시에서 거래된 물품은 다음과 같다.
〈영덕읍내장〉
요미(饒米), 곡(穀), 면(綿), 마포(麻布), 방어, 청어, 광어, 사어( 魚), 대구어, 수미어(숭어), 팔초어(문어), 은구어, 자해, 건복(마른 전복), 해삼, 해의, 염(鹽, 소금), 석류, 유자(柚子), 유기, 철기, 목물(木物), 연초, 소, 송아지
〈영해부시장〉
요미(饒米), 두(荳), 모맥( 麥), 면포(綿布), 백저(白苧), 황저(黃苧), 명주(明紬), 방어, 광어, 공(홍)어( 魚), 청어, 대구어, 사어, 팔초어(八稍魚), 수미어(秀尾魚숭어), 북어(北魚말린 명태), 생복 (전복), 자해(紫蟹), 담채(淡菜홍합), 해삼, 해채(海菜미역), 염 (鹽), 꿩, 닭, 대추, 건시 (곶감), 지지(紙地), 연초(煙艸), 토기(土器), 소(牛), 송아지(犢), 해의(海衣김)
이외의 장사장이나 식율장, 강구장, 병곡장에서 거래된 물품의 종류도 위의 두 장에서 거래된 물품의 범위에서 거래량의 다과(多寡)에 차이가 있을 것이나 대체로 위의 물품들이 거래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