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의 성곽
영덕지역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서기 162년 신라 아달라왕 9년에 사도성(沙道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호명성(狐鳴城)·호산성(狐山城)이 영덕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사도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 미상지분(未詳地分)으로 남아있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1) 포성(蒲城) |
포성(蒲城) |
포성은 일명 포산성(蒲山城)이라 하기도 하며, 병곡면 병곡리에 있다. 축성시기로는 선사시대 혹은 삼국시대로 보고 있으며, 현재는 흙으로 쌓은 성터만 남아 있다. 축성의 방법은 포곡식의 토축으로 성의 규모는 둘레가 2㎞ 정도이고, 폭이 4m, 높이는 2m로 추정된다. 전해지기를 이 성에는 4곳에 성문이 있었다고 하나 이를 추정해 볼 아무런 유지(遺址)도 남아 있지 않다.
영해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우시군국의 읍치(邑治)로 알려져 있으며, 이 성의 북쪽의 골짜기는 북문골로 불리고 있으며, 남쪽의 백석리 부근은 이 당시의 군사들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성의 북쪽인 금곡리의 고인돌 1기와 남쪽의 영 4리의 고인돌군과 사천리의 선사시대 유적으로 보아 이 포성은 고래(古來)로부터 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성으로 보인다. 2) 야성(野城) 야성은 일명 야성고군지(野城古郡址), 또는 구읍골(舊邑谷)이라 하며, 삿갓봉(笠峰)의 자락이 동남으로 펼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오늘의 지품면 삼화리와 오천리 사이에서 오십천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있다. 3) 달로산성(達老山城) 달로산성은 달산면 봉산리에 속해 있으며, 현재 영덕에서 청송으로 넘어가는 양설령(兩雪嶺)에 위치하고 있다. 축조 연대는 삼국시대로 보고 있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혼합식이다. 4) 기타 고성(古城) 현재 군내에는 미확인된 고성과 성지가 다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파악되고 있는 것은 영덕읍의 동문 밖의 법원 앞과 영덕중·고등학교 근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야성고성지(野城古城址)와 마고산성지(麻姑山城址)·오보성지·영해의 고성지가 있다. |
2. 고려와 조선시대의 성곽
고려는 국초부터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건국이념에 따라 국방을 중요시하였다. 특히 서경을 중심으로 하는 북변(北邊)을 고구려 고토회복의 전진기지로 삼는 한편, 거란· 여진 등을 방어하기 위하여 많은 성곽을 축조하거나 보수하였다. 1) 영해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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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과 남문 그리고 권근의 “서루기(西樓記)”로 유명한 서문이 있었으며, 왜구를 막기 위하여 축성한 대표적인 고려시대 성지(城池)의 하나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세종 30년(1448)에 영해부사 박쟁시(朴時)에 의하여 다시 수축(修築)이 되었다. 2) 축산성 축산성은 우왕 10년인 1384년에 축성된 것으로 규모는 둘레가 약 700m, 높이가 약 2.3m, 면적이 12,650㎡ 이다. 3) 영덕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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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책에 의하면 읍성의 규모는 둘레가 931척, 높이가 15척이며, 군창(軍倉)과 우물, 그리고 못이 각 1개소가 있었으며, 겨울과 여름에도 이들 우물과 못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석성으로 둘레가 141보인데, 성안에는 우물이 1개가 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397척이고 높이가 12척이며 성안에는 우물과 못이 각 1개소가 있다고 하였다. 「영영승람」에는 둘레가 2,397척이고, 높이가 12척이며, 성안에는 우물이 1개소와 못이 1개소가 있으며, 곡성(曲城, 굽은 성곽)이 6개소가 있다고 하였다. 양촌 권근(陽村 權近)이 쓴 「객사기문(客舍記文)」과 소한당 권람(所閑堂 權擥)과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가 쓴 「청심루기문(淸心樓記文)」이 있다. |
4) 오포 수군 만호성 오포성은 오포만호진이 자리한 성이다. 현재 강구면 오포 1리 원통사 주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중종(1506∼1544) 때에 성을 쌓았다(中宗朝築城周一千四百九十尺)”라고 하는 것과 순변사 고형산(高荊山, 1453∼1528)이 기존의 오포영이 해로(海路)와는 통하지 않아 현재의 오포영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아마도 순변사 고형산이 오포영을 옮길 때 새로이 축성한 것으로 봄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순변사 고형산이 오포영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에는 현의 남쪽 13리에 본래의 오포영이 있었다고 하는데, 소월리 앞의 선병들에 있었다. 이는 오십천 제방이 생기기 전의 소월리의 지형이 오포영이 있었을 정도의 지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웃의 둔리는 지명 자체가 군대의 주둔지를 의미하고 있으며, 군인들의 둔전으로 이용됨에 따라 붙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