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의 성곽

  영덕지역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서기 162년 신라 아달라왕 9년에 사도성(沙道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호명성(狐鳴城)·호산성(狐山城)이 영덕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사도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 미상지분(未詳地分)으로 남아있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조분왕 3년(232) 7월에 “이찬 우로가 사도성에서 싸울 때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배를 태우니 왜병들이 물에 뛰어 들어 모두 죽었다.” 유례왕 9년(292) 6월에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함락당하자 왕이 일길찬 대곡(大谷)을 시켜 성을 수복시키고, 다음해에 성을 개축하여 사벌주(지금의 상주)의 부호 80여호를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등의 기록으로 보아 상주와 가까운 영덕군내의 해안지역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지역 장사리의 옛 지명이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사동포(沙冬浦)이다. 따라서 사도(沙道)와 사동(沙冬)은 발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형 여건상 사도성이 있었던 것으로 확실시된다. 현재는 해수욕장으로만 이용되지만 조선시대 세종조까지는 포구로써의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바닷물이 남산 밑에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위의 삼국사기의 내용과 거의 맞아 떨어진다.
  따라서 사도성의 위치를 장사리의 남산으로 비정하고자 한다. 남산은 지금도 동해안의 중요한 해안방어의 요충지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호미곶에서부터 창포리에 이르는 모든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전망대와 왜구를 방비하는 요새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을 것이다.
 호암성과 호산성에 대한 기록은 소지왕 3년(481)에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의 호명 등 7성을 빼았은 후 미질부(지금의 흥해)에까지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호명성이 영덕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또 소지왕 11년(489)에 다시 호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과 우리 지역의 달로산성에 흥해와 청하의 군사창고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위 두성 중의 한 성이 위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 포성(蒲城)

                                                                                       포성(蒲城)
  포성은 일명 포산성(蒲山城)이라 하기도 하며, 병곡면 병곡리에 있다. 축성시기로는 선사시대 혹은 삼국시대로 보고 있으며, 현재는 흙으로 쌓은 성터만 남아 있다. 축성의 방법은 포곡식의 토축으로 성의 규모는 둘레가 2㎞ 정도이고, 폭이 4m, 높이는 2m로 추정된다. 전해지기를 이 성에는 4곳에 성문이 있었다고 하나 이를 추정해 볼 아무런 유지(遺址)도 남아 있지 않다.
영해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우시군국의 읍치(邑治)로 알려져 있으며, 이 성의 북쪽의 골짜기는 북문골로 불리고 있으며, 남쪽의 백석리 부근은 이 당시의 군사들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성의 북쪽인 금곡리의 고인돌 1기와 남쪽의 영 4리의 고인돌군과 사천리의 선사시대 유적으로 보아 이 포성은 고래(古來)로부터 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성으로 보인다.

2) 야성(野城)

  야성은 일명 야성고군지(野城古郡址), 또는 구읍골(舊邑谷)이라 하며, 삿갓봉(笠峰)의 자락이 동남으로 펼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오늘의 지품면 삼화리와 오천리 사이에서 오십천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있다.
  전하는 말로는 영덕의 읍치(邑治)가 야시홀시대의 지품면 지품리의 야시홀 구군지(舊郡址)에서 이곳으로 옮겨 새로운 영덕의 읍치(邑治)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 그 성터는 대부분 허물어지고 북서쪽의 일부분만 남아 있으며, 동남쪽은 밭으로 변하여 흔적만 조금 남아 있다.
  대체로 야성은 우리나라 산성이 지닌 요소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데, 남서쪽은 높고 험한 삿갓봉을 뒤로 하고, 동북쪽은 오십천이 가로막아 외성(外城)의 역할을 할 수 있어 적으로부터 침입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천연적인 요지(要地)에 자리잡고 있다.

3) 달로산성(達老山城)

  달로산성은 달산면 봉산리에 속해 있으며, 현재 영덕에서 청송으로 넘어가는 양설령(兩雪嶺)에 위치하고 있다. 축조 연대는 삼국시대로 보고 있으며, 축조 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혼합식이다.
둘레가 대략 3㎞ 정도이며, 현재 성(城)의 대부분은 허물어지고 성의 기초석 일부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현의 서쪽 37리에 있다. 둘레가 510보(步)이며 아주 험하다. 성내에는 샘이 1개, 도랑이 1개가 있으며, 군사창고가 있다. 흥해와 청하의 군사창고를 이곳에 함께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8356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경국대전」의 주척(周尺, 현재 길이로 1척은 21.04㎝)을 기준하여 보면 약 1,738m 정도의 둘레가 된다.
  달로산성이 혁파된 시기는 「경상도 지리지」 영덕현조에 보면 세종대왕 19년(1437)에 혁파된 것으로 나온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왕 12년(1430)에 도순무사 최윤덕(都巡撫使 崔閏德) 장군이 직접 이 산성에 내려 와서 성을 살펴보고 성내가 험준하고 좁아서 사람과 물자를 많이 둘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 후 서울로 올라가서 세종대왕 19년(1437)에 이 산성을 폐성(廢城) 하였다고 한다.

4) 기타 고성(古城)

  현재 군내에는 미확인된 고성과 성지가 다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파악되고 있는 것은 영덕읍의 동문 밖의 법원 앞과 영덕중·고등학교 근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야성고성지(野城古城址)와 마고산성지(麻姑山城址)·오보성지·영해의 고성지가 있다.
 영덕읍의 야성고성지는 「해동지도」에 의하면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300척(在邑城東門外土築周三千三百尺今廢)” 이라 하였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지품면 눌곡리의 뒷산에 마고산성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그 유지를 찾을 수 없으며, 영덕읍 오보리의 오보성지는 현재 오보리 동제당 뒤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한편 영해지역에는 “영해부의 서쪽 15리에 흙으로 쌓은 성지(西十五里稱山城有土築遺址)가 있다.”는 「대동지지」의 기록이 남아 있으나 확인되고 있지는 않다.

2. 고려와 조선시대의 성곽

  고려는 국초부터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건국이념에 따라 국방을 중요시하였다. 특히 서경을 중심으로 하는 북변(北邊)을 고구려 고토회복의 전진기지로 삼는 한편, 거란· 여진 등을 방어하기 위하여 많은 성곽을 축조하거나 보수하였다.
  영덕과 영해지역의 축성 기록은 고려시대 초기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고려사 병지 2」의 현종 2년(1011)에 “청하·흥해·영일·울주·장기 등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고려사」의 현종 3년(1012) 5월 기사(己巳)조에 “동여진이 청하·영일·장기현에 침구(侵寇)하므로, 문연(文演)·강민첨(姜民瞻)·이인택(李仁澤)·조자기(曹子奇)를 파견하여 주군(州郡)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도들을 쳐 물리치게 하였다.”라는 기록과 권근의 「양촌집」 제21권 사재소감 박강전(朴强傳)에 “영해는 곧 옛적의 덕원도호부인데, 동여진이 침략할 때 성이 함락되었으므로 낮추어 지관(知官)으로 만들고 관할하던 보성을 복주에 귀속시켰다.”라는 것으로 보아 이 고장에도 외적의 침입이 빈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외적을 대비하기 위한 기존의 성곽의 개축 이외에 새로운 성을 쌓는 축성이 있었으리라 생각되어 진다.
  그러나 고려시대 중기 이후로는 거란·여진 등의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는 것이 국방의 일차적 목적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이 지역은 방어태세에 대한 준비가 소홀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고려조 후기에 들어오면서 그 상황이 달라지는데, 고려조의 후기인 충정왕 2년(1350) 5월부터 왜구들이 한반도 남서부 지역을 침구하기 시작하여 이후 공양왕 4년인 1392년에 이르기까지 동남서부 전지역에 걸쳐 약탈과 만행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동해안의 중요한 방어기지의 하나이고 내륙을 이어 주는 길목에 있던 영덕과 영해지역은 왜구들의 일차 침입지가 되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따라서 빈번히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하여 영해읍성과 축산성을 축조하여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였다.

1) 영해읍성

  영해읍성은 우왕 10년인 1384년 7월에 경상도 부원수인 윤가관(尹可觀) 장군의 건의에 의하여 경주와 안동의 군사 2천명이 동원되어 한달 안에 축성을 마쳤다.
  영해읍성의 면적은 약 74,440㎡, 둘레는 약 1,040m, 높이는 2.6m이다. 이 중 둘레는 대부분 무너지고 현재는 약간의 석축만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1,278척이고 높이가 13척, 성안에 우물이 3개, 못이 1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영영승람」 원영해편의 성지조에 의하면 둘레가 2,078척이고, 높이가 12척이며, 성안에는 3개소의 우물과 1개소의 못이 있다고 하였다.
  영해읍성의 축조 방법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경사지게 쌓아 올린 내탁법(內托法)으로 쌓았다.
영해읍성

  동문과 남문 그리고 권근의 “서루기(西樓記)”로 유명한 서문이 있었으며, 왜구를 막기 위하여 축성한 대표적인 고려시대 성지(城池)의 하나로 유명하다.
  영해읍성의 축성과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권근의 “서루기”에 의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왜구가 일어나고부터 날로 쇠체(衰替)하더니, 신유년(1381)에는 그 화가 더욱 격렬하였다. 성과 읍은 폐허가 되고 민가는 불타버렸다. 두어해 동안을 적의 소굴이 되게 내버려두니, 관리들은 다른 고을에 가서 붙어살게 되고, 범과 산돼지는 옛 마을에 와서 깃들었다. 변방이 이미 무너졌으니 왜구의 침입은 더욱 심하여 져서 , 계해년 (1383년) 여름에는 원주와 춘천을 거쳐서 철원의 경계를 침노하였으며, 양주. 광주를 침노하고, 공주에서는 수령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왜구는 모두 축산도를 거쳐서 들어 온 것이다. 한 읍이 수비를 잃어 삼도(三道)가 해를 입었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다는 것은 이처럼 참혹한 것이다. 다음해 갑자년 (1384)에 원수 윤가관(尹可觀)공이 합포에 나아가 진수(鎭守)하면서 바다를 따라 북으로 올라와서 마침내 이 고을에 이르렀다.
 가시덤불 속에 원수의 절월(節鉞)을 멈춰 세우고 둘러보며 탄식을 거듭하였다. 곧 성을 쌓아서 변방의 방비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여 즉시 역전(驛傳)을 통하여 계문(啓聞)하였더니, 묘당의 의논이 좋다고 하면서도 원(守)을 보낼 일이 걱정이었는데, 김군 을보가 자청하고 나서므로 부월과 인절을 주어 많은 장정들을 부리게 하니, 계림과 안동의 사졸 2천명을 출동시켜, 왜적들이 침노하는 속에서 한편으로 방어하고 한편으로 성을 쌓았는데, 7월에 시작하여 한달 만에 마치었다.
 또한 축산도에 배를 준비하고 수비를 견고히 하니 왜적들이 이곳에 다시 오지 못하게 되어 한 고을이 다시 번성하였다. 이로써 여러 고을이 편안하게 되어지니 모두 윤공이 성을 쌓게 한 덕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세종 30년(1448)에 영해부사 박쟁시(朴時)에 의하여 다시 수축(修築)이 되었다.

2) 축산성

  축산성은 우왕 10년인 1384년에 축성된 것으로 규모는 둘레가 약 700m, 높이가 약 2.3m, 면적이 12,650㎡ 이다.
  축산성의 축조방식은 양면을 돌로 쌓고 가운데 흙을 채워 놓는 협축식(俠築式) 방식으로 축성하였으며, 치첩(雉堞)이 설치된 점이 특이하다.
  영해읍성과 축산성은 약 8㎞ 정도 거리를 가지는데, 이와 같은 짧은 거리에 두 개의 성을 축성한 자체가 왜구들의 침입이 얼마만큼 급박하였는가를 이야기하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선의 상륙지역인 축산성은 권근의 「양촌집」에 의하면 축산도병선도관령(丑山島兵船都管領)이란 벼슬의 관리가 주둔하면서 왜적의 침입을 저지한 최전방기지로 이 기지가 함락되면 제2의 방어진지인 영해읍성에서 적을 격퇴할 수 있도록 영해읍성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되도록 두 성을 축조한 것 같다.
  따라서 이 두성이 축조된 후에는 이 지역을 통하여 침입한 왜구들의 중요한 약탈지였던 안동·영양·평해·울진·춘천·원주 등지의 안전이 확보되어 백성들이 생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

3) 영덕읍성

  영덕읍성은 현 영덕군의 청사가 자리잡은 남석1리 주변에 쌓은 성곽으로 서쪽으로는 오십천의 깎아지른 절벽이 천연의 방패가 되어 주고, 북으로는 화림산으로부터 내려 오는 무둔산이 울타리가 되어 주며, 동남으로는 영덕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에 축조된 성이다. 본래 영덕읍성이 자리잡은 곳은 흥덕사(興德寺)란 절이 있던 자리이다. 이 절의 창건연대와 폐찰연대, 그리고 절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읍성의 규모를 보아 상당할 정도의 규모를 가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축성연대는 창왕 원년(1389)에 흙으로 축조된 토성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 세종 9년(1427)에 돌로 다시 개축하였다. 현재 영덕군 청사와 영덕지원의 동편 담장 밑으로 이들 석성(石城)의 일부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개축하여 오다가 일제 치하에 대부분의 성곽 및 관아 건물이 해체되었다.
영덕읍성
  앞의 책에 의하면 읍성의 규모는 둘레가 931척, 높이가 15척이며, 군창(軍倉)과 우물, 그리고 못이 각 1개소가 있었으며, 겨울과 여름에도 이들 우물과 못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석성으로 둘레가 141보인데, 성안에는 우물이 1개가 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397척이고 높이가 12척이며 성안에는 우물과 못이 각 1개소가 있다고 하였다. 「영영승람」에는 둘레가 2,397척이고, 높이가 12척이며, 성안에는 우물이 1개소와 못이 1개소가 있으며, 곡성(曲城, 굽은 성곽)이 6개소가 있다고 하였다.
  양촌 권근(陽村 權近)이 쓴 「객사기문(客舍記文)」과 소한당 권람(所閑堂 權擥)과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가 쓴 「청심루기문(淸心樓記文)」이 있다.

4) 오포 수군 만호성

  오포성은 오포만호진이 자리한 성이다. 현재 강구면 오포 1리 원통사 주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중종(1506∼1544) 때에 성을 쌓았다(中宗朝築城周一千四百九十尺)”라고 하는 것과 순변사 고형산(高荊山, 1453∼1528)이 기존의 오포영이 해로(海路)와는 통하지 않아 현재의 오포영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아마도 순변사 고형산이 오포영을 옮길 때 새로이 축성한 것으로 봄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순변사 고형산이 오포영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에는 현의 남쪽 13리에 본래의 오포영이 있었다고 하는데, 소월리 앞의 선병들에 있었다. 이는 오십천 제방이 생기기 전의 소월리의 지형이 오포영이 있었을 정도의 지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웃의 둔리는 지명 자체가 군대의 주둔지를 의미하고 있으며, 군인들의 둔전으로 이용됨에 따라 붙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오포성의 규모는 둘레가 1,490척이고, 높이가 9척이라 하는데, 「경국대전」의 주척(周尺, 현재의 길이로 1척은 21.04㎝)에 의하여 계산하여 보면, 둘레는 약313.5m이고 높이는 약 1.9m으로 비교적 소규모의 성곽이다.
  현재 오포성의 유적이나 유지(遺址)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 진 바가 없다. 앞으로 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