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봉수제
1) 전기의 봉수제 조선시대의 봉수제는 고려의 4거(炬,햇불) 구분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오다 세종조에 이르러 5거로 세분하여 시행하였다. 이러한 5거의 구분도 바다와 육지로 나누어서 시행 하였는데, 바다에서는 평상시에는 1거를 올리고,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를 올렸으며, 해안에 적이 접근하면 3거를 올려 위급을 알렸으며, 아군의 전함과 외적의 전함이 접전하여 전투가 벌어지면 4거를 올렸다. 그리고 외적이 해안에 상륙하여 아군의 육지방어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5거를 올려 급보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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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영해)→남각산(진보)→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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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산(청하)→황석산(영덕)→별반산(영덕)→대소산(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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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리산(후포) |
위에서 보듯이 전기에 있어서 우리 지역의 봉수선로는 오늘의 부산 다대포를 시발로 동해남부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여 포항의 대동배를 거쳐 청하의 도리산 봉수대 (현 화진해수욕장 남쪽의 산)에 이르게 되고, 도리산 봉수대의 봉화는 영덕의 황석산 봉수대에 연결된다. 황석산 봉수대는 현재 강구4동의 뒷산 일대에 있었다. 황석산에서 받은 봉화는 다시 창포 뒷산의 별반산 봉수대로 연결되며, 별반산 봉수대는 축산의 대소산 봉수대로 봉화를 념겨주게 된다. 대소산 봉수대는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영해면 원구리의 봉화산인 광산 봉수대로 봉화를 연결시켜 주게 되며, 북으로는 후포의 후리산 봉수대로 봉화를 연결시켜 준다. 대소산 봉수대로부터 봉화를 넘겨받은 광산 봉수대는 봉화를 진보의 남각산 봉수대로 넘겨주면서 우리 지역의 봉수대의 역할은 모두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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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일봉 봉수대 |
2) 후기의 봉수제 조선시대 초기에 확립된 봉수제는 을묘왜변(乙卯倭變)과 임진왜란 전까지는 거의 외침이 없는 평화의 시대로 봉수대의 정비와 관리는 거의 부실화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과 같은 비상시에는 봉수대의 정비불량으로 거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그 보완책으로 파발제(擺撥制)를 도입하여 역참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한편, 기존의 봉수제도를 정비하여 국가 비상시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
〈영덕현〉 청하현 도리산 봉수 → 창포리 별반산 봉수 |
〈영해부〉
진보 신법산 봉수 |
위의 자료는 1832년의 「영덕·영해읍지」의 것인데, 영덕현의 황석산 봉수대는 폐지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2봉수대에서 1봉수대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1개의 봉수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봉대별장(烽臺別將)을 비롯한 다수의 관원과 봉군이 필요하였으며, 이들 봉군의 부역이 지역민들에게 굉장한 부담이 되었으므로 봉수대의 폐지는 오히려 지역민들의 부역을 덜어주는 일로 많은 호응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 지역의 봉수대를 관리한 인원과 봉수대의 기물에 대한 기록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들 봉수대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볼 수 없지만 1896년의 「영덕읍지부사례(盈德邑誌附事例)」에 영덕현에는 봉대별장 1인, 봉군 13명이란 기록이 있으며, 「영영승람」에는 봉대별장 2인과 봉군이 200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영승람」의 기록은 영덕현의 황석산 봉수대가 폐지되기 전의 규모를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영해읍지부사례」의 영해부에는 대소산 봉수대에 100명, 광산 봉수대에 100명씩 200명의 봉군이 있었다고 하며, 한달에 6번씩 매번 5명이 교대로 수직케 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봉수대의 책임자인 봉대별장 이외에 100여명의 봉군이 수직을 선 것으로 보인다. |
인비(仁比,기계) 금전(琴田,영양) |
안강-육질(六叱,신광)-송라(청하)-남역-주견(일명 주등酒嶝)-적혈(赤穴)-병곡-아질달(阿叱達,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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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역(신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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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지역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각 군현과 연결시켜 주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오래 전부터 국가차원에서 중요시되던 교통로가 있었다. 즉 경주-안강-신광-서정리-청하-송라-지경-남역(남정)-오포-영덕을 잇는 교통로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전기에 이르기까지 위의 교통로를 따라 역과 원이 설치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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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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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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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과 더불어 조선시대에는 관리들과 상인 및 사적인 여행자의 편의를 위하여 원(院)과 관(館)이란 제도를 운영하였다. 원의 설치는 대체로 역로(驛路)를 따라 설치되었으며, 역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원이나 관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역이 설치되지 않은 곳이라도 큰 산 밑이나 큰 고개 마루, 해변의 포구, 하천의 진(津)이나 도(渡)에는 이들 원이나 관을 설치하여 여행인들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국에 1,310개소의 원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그 중에 경상도에 468개소의 원이 있었다고 한다. 대개 30리에 1개소의 원을 설치하고 주민 가운데 신망있는 자를 선발하여 원주(院主)로 임명하여 원의 관리를 맡겼으며, 원위토(院位土)를 지급하여 원의 운영경비를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개의 원이나 관이 설치된 위치는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이 지역의 원이나 관에 대하여 위의 책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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