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절 자선가(慈善家) 및 선행가(善行家) 한발, 홍수 등으로 야기된 흉년과 환과고독(鰥寡孤獨)으로 곤경에 처한 군민들을 자신이 지니고 있던 재물을 기울여 구제한 자선가 및 선행가들이 지역에서 많았다. 이러한 분들의 선행을 길이 전하고자 「영영승람」 등의 기 군지를 참고하여 여기에 싣는다. 류만익(劉萬益) : 본관은 강릉으로 벼슬이 첨사에 이르렀으며, 부유하게 살면서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준 것이 많아 의지하여 생명을 온전히 보전한 이들이 많았다. 시혜비가 있다. 차인식(車仁軾) : 본관은 연안으로 차복신(車輻信)의 손자이다. 병신년 대흉년에 재물을 기울여 은혜를 베푸니, 현령이 표창하며 말하길 “은혜가 사람들에게 미치고, 의로움은 공에 의하여 중하게 되었으니, 한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공에 의하여 살아났다.”라고 하였다. 칭송이 전하여져서 동지중추부사를 받았다. |
신원휴(申遠休) : 본관은 평산으로 풍림 신규년의 후손이다. 뜻과 기개가 굳고 확실하였으며, 효성과 우애를 같이 가졌다. 수신제가를 지극히 하여 도가 있었다. 차별을 두지 않고 두루 곤궁한 사람을 구휼하니 향리에서 살아있는 부처(活佛)라고 칭송하였으며, 통정대부를 받았다. 윤상직(尹相直) : 본관은 파평으로 가선대부 윤정노(尹鼎老)의 아들이다. 품성이 순후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수신(修身)하기를 독실히 하였다. 흉년을 만나 재물을 기울여 곤궁한 사람들을 구휼하니, 향리에서 칭송이 있었다. 철종대에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송인각(宋仁珏) : 본관은 여산이며 영해 사람인데, 가선대부 송유명(宋有明)의 5세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다. 천성이 착한 것과 학문하길 좋아하였으며, 우애와 박애(博愛)를 겸비하여. 가난하거나 걸인을 보면 밥을 먹이고 옷을 벗어 주었다. 매년 춘궁기에는 재물을 기울여 구휼하였으며, 종자를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병자년 흉년에는 거의 죽기에 이른 것을 구한 것만 해도 백여호에 이르렀고, 밭갈 소를 4,5마리를 빌려주어 농사도 때를 잃지 않게 하였다. 이에 사림(士林)들이 추대하여 포상을 천거한 일이 있었다. 증직으로 통훈대부를 받았다. 김정곤(金定坤) : 호군 김한추(金漢秋)의 현손으로 효행이 남달라 몸과 마음을 하나로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성품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자들을 구휼한 것이 많았다. 늙그막에는 경치(水石)의 아름다움을 탐닉하여 거처하는 곁에 정사(精舍)를 지어 침석(枕石)이라 이름하기도 하였다. 차완수(車完壽) : 본관은 연안으로 동지중추부사 차세남(車世南)의 아들로 갑오년 흉년에 집의 양식을 들어내어 가난한 자들을 구휼하니, 향리에서 칭송이 있었으며, 이로써 의금부도사를 받았다. 박준경(朴準京) : 본관은 밀양으로 증직 가선대부 박광상(朴光尙)의 증손이다. 천성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흉년에는 재물을 기울여 구휼을 하니, 원근에서 칭송이 있었다. 노필수(盧必洙) : 본관은 광주로 문간공(文簡公) 노수신(盧守愼)의 후손이다. 성품이 절도가 있었으며, 과묵하였다. 선조의 뜻을 세우는데는 있어서는 힘써 하였으며, 향리의 선비들에게 이르러서도 친절하고 인정을 다하여 대하였으니, 비록 몸이 풍요함에 있더라도 스스로는 담담하기를 물과 같게 하였다. 계묘년 큰 흉년에 강릉 땅을 지나다가 목마르고 배고픈 자를 보자 거액의 재물을 아까워하지 않고 베푸니 연도에 환성이 가득하였다. 가정을 다스리고, 사람을 접대함에도 성현의 법도를 따라 쓸데없는 소리가 입밖에 나오지 않도록 하였다. 고종대에 주사를 받았다. |
이중배(李重培) : 본관은 월성으로 국당 이천(李)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를 알아 부친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수혈하고자 하였다. 청렴하고 검소함을 몸에 지녔으며,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큰 흉년을 만나 재물을 기울여 배고픈 자를 구휼하였으며, 가난한 친인척들이 서로 의지하여 생명을 온전하게 하였으니, 향리에서 감탄하여 선행을 칭찬하였다. 이에 용양위부호군을 받았다. 최재현(崔在鉉) : 본관은 경주로 본성이 어질었으며,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자식을 가르침에 각자 그 맡은 바를 닦게 하였으며, 사람을 접대함에도 진심으로 대하여, 모두 그 뜻을 얻게 하였다. 갑오년 흉년에 곡식을 들어내어 곤궁한 이들을 두루 구휼하니, 인근 마을에서 칭송이 있었으며, 참봉을 받았다. 구인회(具寅會) : 통정대부 구수서(具壽書)의 아들이다. 본성이 어질었으며, 곤궁한 자를 구휼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흉년을 당하면 매번 이웃과 친척들 중에 밥을 먹지 못하는 이가 있으면, 밥을 먹이고, 재산을 나누어 주어 그 업을 안정시켜 주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 자기일과 같이 하니, 원근의 아는 자들은 서로 입으로 전하며 칭찬하였다. 원릉참봉을 받았다. 이종학(李鍾鶴) : 본관은 경주로 영해에 살았으며, 이규만(李圭晩)의 아들이다. 농사에 힘쓰고,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방도가 있었다. 여러 족친 중에 가난하여 혼례를 올리지 못한 자가 있으면 자금을 대어 이를 치르게 하였으며, 초상이 나 장례를 치르지 못할 경우에도 수의를 부조하여 이를 치르도록 하였으며, 농토를 나누어주어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다. 흉년을 당하면 매번 사람들을 모아 같이 밥을 해먹으니, 사람들 모두가 어려운 일을 한다고 하였으며, 향리에서 그러한 행의를 아는 자들은 혹 시를 지어 찬송하기를 목옹(牧翁)이라 하였다. 김수태(金洙泰) : 본관은 야성으로 진사 김응청(金應淸)의 후손으로 김기흠(金夔欽)의 아들이다. 본성이 어질고, 박애정신이 있었으며, 부모를 봉양함에도 몸과 마음을 다하였다. |
박지란(朴志蘭) : 일명 영식(永植)으로 중추부사 박처중(朴處中)의 아들이다. 본성이 어질고 착하였으며,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가르침에 옳은 방도로 하였으며, 집을 다스림에는 절도로써 하였다. 항상 곤궁한 자를 구휼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자리를 넓게 만들고는 손님을 초대하여 푸짐하게 대접하였다. 머무는 곳에는 사방의 노소들이 모여 마당에 가득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대접함에는 관대하게 하였으나, 자기 스스로는 담백하게 하였다. 경릉참봉을 받았다. 이의신(李宜新) : 이영립(李英立)의 5세손으로 본성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궁핍한 자들을 보면 힘을 다하여 나누어 주었으며, 도원통로(陶原通路)가 오십천 물가에 있어서 매번 파괴가 되어 백성들이 그 부역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의신이 특별히 의연금을 내어 산을 파서 길을 내어 완성시키니 거의 4리가 되었으며, 비록 홍수를 만나더라도 물길을 걸어 건너야 하는 근심이 없어졌어, 한 고을이 의지하는 바가 있었으며, 혜택을 받는 이들 스스로가 선행을 칭송하고자 비를 세워 이를 기록하였다. 통정대부에 올랐다. 김성배(金聲培) : 본관은 김해로 충선공 김성하의 7세손이다. 어진 성품을 타고 났으며, 명석하고 민첩하였다. 베풀기를 좋아하여 추운 자를 보면 옷을 벗어주고, 배고픈 자를 보면 밥을 먹여 주었으며, 가는 길에 남루한 옷을 입고 있거나 추위에 떨고있는 자를 보면 옷을 벗어 주었다. 흉년에 떨어진 한 포대기를 주어 풀어보니, 청동 백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이에 그 잃어버린 자의 애통함을 가련히 생각하고 본주인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는 종일토록 길가에 서서 오가는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았는데, 이렇게 하기를 삼일째에 본주인이 나타나 마침내 돌려주게 되었다. 그런데 본주인이 “이미 잃어버린 물건으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수년간 모은 장사 밑천이 모두 없어지게 되었구나” 생각하였다고 하였으며,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장차 장사 밑천이 완전히 없어졌을 것인데” 하며, 그 보답으로 반을 떼어 김성배에게 주었으나 고사하며 받지 않았다. 일생의 행의가 크게 이와 같았으니,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그 덕망에 감복하였다. 수직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김수근(金守根) : 승지 김봉(金鳳)의 7세손이다. 성품이 절도가 있고, 관대하였으며, 순박하였다. 일신에 부유함이 있었으나, 항상 스스로는 검소하였으며,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
송지윤(宋持閏) : 본관은 여산으로 가선대부 송유명의 7세손이다. 천품이 남달랐으며, 힘써 밭 갈고 독서를 하였다. 일찍이 조상 묘역의 의물(儀物)을 하지 못한 근심이 있었는데도 계묘년 흉년을 만나 가세를 헤아리지 않고 재물을 출연하였으므로, 제전(祭田)을 사고, 또 영위하였으나, 갖추어 시설을 하지 못하였다. 대개 선조를 존모하는 정성이 이와 같았어도, 족중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농토를 빌려주어 그 업을 안정시키니, 사람들이 모두 그 선행을 칭송하였지만 일찍이 이로써 거만을 떠는 일은 없었다. 만년에 양천(良川) 태봉(泰峯) 밑에 집을 짓고 스스로 사우옹(四友翁)이라 하였다. 사헌부감찰과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받았다. 김재창(金在昌) : 호는 유거재(幽居齋)로 외천당 (外天堂) 김종윤(金宗潤)의 현손으로 타고난 성품이 청렴하고, 기품이 뛰어났다. 사람을 접대함에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를 가리지 아니하였으며, 1915년에 영덕·영해향교의 통합이 있자 개인적으로 영덕향교의 위패를 봉향(奉享)하기로 하고는 힘을 다하여 몸소 어깨에 지고와서 옛 신안원(新安院)터 곁에 새로이 성교(聖校)를 짓고는 위패를 받들었는데, 제도와 규모가 이전의 향교에 못지 않았다. 이동백(李東柏) : 본관은 경주로 품성이 순후하고, 풍채가 있었다. 가난에서 몸을 일으켜 부유하게 되었지만 선행을 즐겨하였는데, 가난하여 혼례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자, 자본이 없어 실업한 자, 토지가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자 등 두루 보태주지 않은 데가 없었다. 1903년의 흉년에 지역내의 많은 사람들이 덕택으로 생명을 부지하였으며, 1914년 영덕과 영해가 한 군으로 통폐합될 때 향교가 폐지되는 지경에 이르자 사림들과 의논, 개인적으로 문묘를 건립하고자 하여 1916년에 혼자 사비로 명륜당 및 정문을 건립하였다. 중추원 의관을 받았다. |
최현구(崔鉉久) : 본관은 경주로 도정 김상순(金尙淳)의 아들이다. 인물이 헌출하였으며, 문예가 일찍부터 뛰어났다. 바깥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경전과 사서의 공부에 뜻을 두었으며, 향교를 중수할 때에는 거액을 출연하였으며, 교육에 관심이 많아 원근을 가리지 않고 교육적인 일이라면 항상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현릉참봉을 받았다. 박준영(朴準暎) : 본관은 밀양으로 박종수(朴宗洙)의 현손이다.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성품이 관대하였다. 1891년도 어느날에 마침 외출중인데, 가슴이 뛰고, 몸에 땀이 나 비를 무릅쓰고 집에 돌아오자 집은 물에 잠기고, 노부가 겨우 남은 시렁을 잡고 울고 있길래 부친을 업고 급히 나오자 마침 집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고 한다. 김영배(金永培) : 참봉 김현룡(金顯龍)의 아들이다. 신체가 장대하고, 기풍과 국량이 관대하였으며,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은 성품이 있었다. 일찍 부친이 죽어 홀어머니를 모시는데 반드시 어머니의 뜻에 순종하고 어기는 바가 없었다. 부유해진 뒤에도 검소함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위급한 경우를 보면 몸과 재물을 기울여 구휼하였다. 향리에서는 이러한 선행을 모두가 칭송하였으며, 참봉을 받았다. 이광용(李光庸) : 본관은 영천으로 지촌(芝村) 이만옥(李晩玉)의 증손이다. 마음으로는 어질고 자애로움을 생각하였으며, 효성과 우애, 화목을 근본으로 삼았다. 본시 가정이 가난하였지만 힘써 자신을 닦아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만년에 부유해지고 난 후에도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큰 형님에게 먼저 드렸으며, 가난한 족친들에게도 사이를 두지 않고 진휼하였다. 흉년이 들면 매번 사람 수를 헤아려 양식을 나누어주어 패가(敗家)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일에 드는 돈은 아끼지 않고 찬조를 하였다. 강도희(姜道熙) : 본관은 진주로 초명은 강계홍(姜桂弘)이며, 통정대부 강태형(姜泰馨)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효성이 있었다. 가난하여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자나 곤궁한 자들을 많아 구휼하였다. 1919년의 오십천 제방공사에 거금을 출연하였으며, 1924년에 유치원을 창설하였으며, 1932년에 향교의 직원을 맡아 향교를 수리하고 제기를 모두 갖추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향인들이 기념비를 향교 문밖에 세웠다. 고종대에 홍릉참봉을 받았으며, 일제하에는 군참사에 선출되었다. |
정봉기(鄭鳳岐) : 본관은 야성으로 문경공 정자영의 후손인 정성린(鄭聖麟)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호매하였으며, 행의가 있었다. 1908년에 영덕군 주사로 서리를 하였으며, 군수 겸 영해서리를 맡았다. 공정무사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퇴직 후에는 행의로 향교 상유사(上有司)에 천거되었다. 신태진(申泰震) : 본관은 평산으로 일생을 시서(詩書)와 손님을 접대하는 것으로 보냈으며, 많은 선비들이 그의 은혜를 입었다. 평소 그로부터 은택을 입은 이들이 모여 강구면 소월리 독미산 선병대에 시은송덕비(施恩頌德碑)를 건립하였다. 신덕수(申德守) : 본관은 평산으로 1955년 병곡중학교 설립에 공이 많았으며, 영해여자중·상고를 설립하는데도 공이 많았다. 송덕비가 영해여자정보고등학교 교정에 건립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