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효행(孝行)

    상    좌(上    佐) : 영해사람으로 13살이던 태종 12년(1412)에 전염병으로 어머니(母)가 죽자,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과 산중에 이르러 땅을 파자 물이 솟아올라 왔다. 마을 사람들은 물이 솟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는데, 이에 상좌가 다른 곳으로 옮겨 묻기를 청하였지만 사람들은 해도 저물고 귀찮아서 모두 흩어져 가버렸다. 그러나 상좌만 홀로 어머니의 시신 곁에 앉아서 밤을 세웠다. 다음날 이웃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다시 모여와 다른 곳으로 옮겨 장례를 치뤘다.
나라에서는 이러한 상좌의 효성스런 이야기를 듣고, 태종 15년(1415)에 효자로 정문(旌門)을 세웠다.

    박    진(朴一辰) : 본관은 함양으로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한겨울에 아버지가 병이 나서 생선회가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을 깨고 고기를 얻어 회를 해서 드렸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세종조에 가각고부사(架閣庫副事)를 제수받았다.

    백상명(白常明) : 본관은 대흥으로 부친은 대호군인 백승이다. 세종조에 음직으로 사직에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부모가 살아서는 지성으로 봉양하였으며, 부모가 죽어서는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장윤경(張允慶, 1551∼1632) : 본관은 인동으로 호는 금재(琴齋)이며, 선조대의 사람이다. 부친은 장신철(張信哲)로 7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14세인 1565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일찍이 부친이 병중에 쇠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읍의 시장에 가서 쇠고기를 사오던 도중에 소리개가 빼앗아 가길래 다시 시장에 가서 쇠고기를 사서 오니 소리개가 집울타리에 걸쳐놓은 쇠고기를 부친이 먼저 먹고 병이 나아 있었다. 이후에도 부모의 제삿날에는 목욕재계를 한 후 제사를 받들었다.

 

    이희원(李希元) : 본관은 월성으로 당곡 이수춘(棠谷 李壽春)의 아들이다. 선조대의 사람으로 부모 섬김에 지극한 효가 있어 임진왜란 때에 난을 피하여 해월봉 아래 당곡(塘谷)이라는 곳으로 부모를 업고 피난하여 몸소 나물을 뜯어 공양하여 난을 무사히 넘겼다. 난이 안정된 후에 효로써 의금부도사에 천거되었다.

    신규년(申年) : 본관은 평산으로 14살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 동생 신귀년과 시묘살이를 하였다.

    신정서(申廷瑞) :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경휴(景休)이다. 교위 신규년의 아들로 어머니의 병이 갑자기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였으며, 이로서 어머니는 10년을 더 살게 되었다.

    장지건(張智健,1661∼1720) : 숙종대의 사람으로 본관은 인동이며 장윤경의 증손이다. 숙종이 붕어하자 마치 돌아가신 부모의 상과 같이 산곡간에 초막을 짓고 죽을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는 것같이 하였다. 그 아들 세기(世紀)가 매일 와서 살폈는데, 하루 밤에는 다른 사람에 의한 방화로 지건이 불에 타 죽었다. 세기는 하늘을 향해 호곡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원수를 찾아다녔는데, 마침내 원수를 찾았다. 원수는 초적(草賊)으로 초적이 밤을 타고 몰래 다른 사람의 나락(벼)을 베어 가는 것을 지건이 이를 못하게 하자 초적은 말이 세어 나갈까봐 불을 질러 지건을 태워 죽였다.
  세기는 그 악적을 적발하고 마침내 장작불에 올려 태워 죽이고 관아에 가서 자수하였다. 관아에서는 이 일을 상사에게 보고하니 상사는 이에 지건과 세기 양세(兩世)를 정려하도록 명하였다.

    신광열(申光烈) :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비승(丕承)이며, 숙종대에 사람이다. 부친은 려암(蘆庵) 신두경(申斗慶)이다. 숙종 15년(1689)의 금인지변(金人之變)에 현령 이지걸(李志傑)이 선조 묘 곁의 은점(銀店)을 뇌물로 받아 이를 파들어 가자 부친 신두경과 숙부인 신두병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힘껏 금지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지나친 형벌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광열은 결혼하지 않은 사촌 여동생 신효랑과 자식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길 맹세하고 한양으로 상경하여 대궐문 앞에 이르러 울부짖으며 호소를 하였다. 또한 관원들이 다니는 길목에서 징을 치며 이를 호소하니 당시(1690)에 좌의정이던 목래선(睦來善)이 이를 듣고 임금께 말씀드려 이지걸을 경남 사천군 곤양면 일대인 곤양(昆陽)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귀양간 이지걸이 곤양에서 죽었는데, 시체를 실은 배가 바다에 뜨자 큰바람이 불어 배가 침몰하였다. 이에 경향각지에서 진정한 효가 이에 이르는 바가 되었다고 칭송이 있었다. 당시에 선배들이 효랑전을 지었으며, 서문과 발문에 찬미가 있었다. 수직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배진창(裵震昌,1642∼1688) : 본관은 분성으로 선친이 병이 나자 북두칠성에 기도하였더니 꿈속에서 좋은 약제를 얻었다. 이미 장례를 치른 후에는 동생들인 진발, 진서, 진도 등과 매일 성묘하여 언덕에 길이 생겼다.

    신응환(申應煥) : 영조대의 사람으로 본관은 평산이며, 자는 천여(天汝)로 풍림 신규년의 후손이다. 부모의 안색을 살펴 마음을 거슬리지 않도록 하는 등 효도를 지극히 하였으며, 부모가 병이 나자 하늘에 기도하여 대신하도록 빌었으며, 또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흘려 넣어 목숨을 연장하도록 하니 향리에서 감탄하였다. 연장(聯章)으로 상소하여 몽은(蒙恩)을 입어 세를 면제받았으며, 정려의 은전을 입었다.

    장성린(張聖麟,1780∼1844) : 본관은 인동으로 장윤경의 7세손이다. 노모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노모가 병이 나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울면서 묻기를 “어떤 것을 먹고 싶으시냐”고 하니, 노모가 살아 있는 소의 간을 먹고 싶다고 하였다. 마침 다른 사람이 반이나 키운 소가 있어 밤에 마누라를 곱게 불러내어 소의 고삐를 잡게 하고는 소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어 노모에게 먹이니 이미 기절하였던 노모가 살아나 “맛있고, 상쾌하다”고 하며, 6일이나 목숨이 연장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노모가 돌아가자 이웃 사람들이 소를 갈라 성복(成服)시의 제수로 사용하고자 하니 울면서 허락하지 않고, “저 소는 나 때문에 죽었다. 아무 죄없는 소를 죽여 그 간을 노모에게 먹여 6일간의 목숨을 연장하였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저 소의 피와 고기를 먹일 수 없다.”고 하고는 마침내 묻어 주었다.
영덕현의 유생들이 연명으로 포양(褒揚)하기를 청하니, 나라에서 수의(繡衣)와 정려를 내렸다.

    김종윤(金宗潤) : 나이 13세에 부친이 병이 들자 약탕을 달이는 법을 알았으며, 모친이 병이 들자 모친의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살폈으며, 병이 위중하자 모친을 부르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자 모친이 회생하였다.

    김종백(金宗伯) : 본관은 경주이며, 철종대의 사람으로 승지 김봉의 증손이다. 일찍이 모친이 병이 들자 정성을 다하여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얼음을 깨고 고기를 구하였으며, 위중할 때는 동생 김종우(金宗禹)와 함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회생시켰으며, 돌아가자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종우(金宗禹) : 자는 군범(君範)이며, 김종백의 동생이다. 형 김종백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부친의 병을 낫게 한 후 17일 만에 부친이 은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 속에서 은어를 구하여 이를 드렸다. 향내에서 추천하여 문헌록(文獻錄)에까지 실렸다.

    신수손(申遂孫) : 본관은 평산으로 신득청의 손자이다. 숙조(叔祖)인 대제학 신백청(申伯淸)의 상소의 화에 연루되어 바닷가에 은거하였으며, 벼슬길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이 났는데, 꿈속에서 신령스런 약제(藥劑)을 얻어 병을 고침에 따라 진실로 효자란 소리를 들었다. 후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신숙행(申淑行) : 본관은 평산으로 신수손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부모의 의견을 따라서 행하니 모든 사람들이 어려운 것을 한다고 하였다. 영해부에서 장계로 효성스러움을 보고하니, 임금께서 듣고 현릉참봉을 제수하였다.

    백   선(白一瑄) : 본관은 대흥으로 부친은 충간공 백문보이다. 부모를 섬김에 진실한 효로서 하였다.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주   복(朱一福) : 본관은 신안으로 자는 계립(季立), 부친은 참봉 주춘령이다. 선조 10년(1577)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법도를 넘어선 슬픔을 나타내었으며,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참봉에 제수되었다.

    신명화(申命和) : 본관은 평산으로 부친은 신숙행이다. 부모를 섬김에 효를 다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시종 법도에 따랐으며, 비록 비, 바람과 춥고 덥더라도 친히 배묘(拜墓)를 하였다. 늙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이야기가 부모에게 미치면 눈물을 흘렸다. 향인들이 이 일을 칭송하자, 임금께서 듣고 특별히 병조참의를 증직하였다.

    신준민(申俊民) : 호는 설월당(雪月堂)이고 부친은 참의 신명화이다. 유일재 김언기의 문하이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법도를 넘어서 치렀으며, 임진왜란 때는 아들 신활과 함께 곽재우 장군의 진영에 참가하였다. 나라로부터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승사랑을 받았다.

 

    박경보(朴景輔,1485∼1570) : 본관은 함양으로 부친은 사직 박종산(朴從山)이고, 중종과 명종대의 사람이다. 부친이 일찍 돌아간 후,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는데, 모친이 고기를 좋아하여 매일 고기공양을 걸르지 않았으며, 비록 겨울이라도 직접 고기를 잡아 모친을 섬겼다. 모친이 해소병이 있어 유자의 즙이 아니면 고통을 줄일 수 없어 미리 유자를 구하여다가 상자에 저장해두고 있었는데, 하루는 총망 중에 이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영해부의 관리가 와서 말하길 “관가(官家,부사)가 유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구하여 상납하는 자가 있었는데, 관가가 급히 관원을 불러 잠시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이 물건은 박효자가 모친의 병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너는 속히 그 집에 이를 갖다 드려라 하여 갖고 왔다”고 하였다.
  뒷날 상자에 유자가 다 없어진 것을 보고 계단 앞의 유자나무를 부여잡고 여러날 울며 축원드리니 유자가 갑자기 익었다고 하였다. 명종이 붕어하자 부사가 쌀과 고기 를 보냈으나, 군사부일체라 하여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거친 음식으로 3년을 보냈다. 효로써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증직받았다.

    박   붕(朴一鵬) : 본관은 무안으로 자는 여익(與翼), 진사 박원기의 아들이고, 중종과 명종대의 사람이다. 부모를 섬김에 지극정성으로 하였으며, 시묘살이도 시종 법도에 맞게 하였다. 채방사(採訪使) 정유길(鄭惟吉)의 장계로 재릉참봉에 제수되었다.

    김덕봉(金德奉) : 축산면 고곡촌 사람으로 인조대의 사람이다. 부친과 함께 산에 들어가 밭을 갈고 있을 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 부친을 나꿔채어 갔다. 덕봉이 몽둥이로 호랑이를 후려치자 몽둥이가 부러지게 되어 손으로 호랑이를 끌어안고 부친을 구하였으나, 호랑이가 다시 덕봉이와 부친을 물어서 결국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나라에서 이를 듣고 정려를 내려주었다.

    권   경(權一璟) : 본관은 안동으로 부친은 사복시정 권의협이고, 효종대의 사람이다. 부모를 모심에 지극정성으로 하였으며, 부사 최혜길이 임금께 추천하면서 “권경은 집에서는 행의가 있으며, 일을 함에는 재주가 있어 한 고을의 칭찬을 받는 바가 있다”고 하였다. 섬김에 잠을 자지 않고 하였으며, 모친의 상을 당하여 잠시 조는 사이에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어대천척시군장(魚臺千尺是君庄: 천척 관어대는 그대의 집이로다)”라는 7자를 주었다. 과연 길몽으로 관어대에 터를 얻었다. 사람들이 일러 효성에 감복하여 하늘에서 복을 내렸다 하였다. 숙종 30년(1704)에 지평을 증직받았다.

 

    남상규(南尙圭) : 본관은 영양으로 난고 남경훈의 손자이다. 부모를 섬김에 살아서는 효를 다하고, 죽어서는 장례와 제사에 한결같이 예법을 지켰으며, 형제간에도 우애가 있어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다.

    박순수(朴舜壽) : 첨추 박경보의 아들로 본관은 함양이고, 선조대의 사람이다. 6세 때 모친이 외삼촌 집에서 속앓이를 만났을 때 소반위에 청수를 떠놓고 천자문을 외우니 병이 나았다. 사람들이 그 연유를 물어보니, 할머니가 병이 났을 때 부친이 이와같이 하더라고 하였다.
  커서 부친이 병이 나자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홀연히 노파가 나타나 화제(花劑)를 주었는데, “산삼 40근을 쓰면 병을 고칠 수 있고, 목숨도 연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가산을 기울여 돈을 마련하여 경주에 가서 이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수개월이 지나도 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말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니 말이 귀를 쫑긋 세우며 산으로 뛰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뒤따라가 말이 멈춰 선 돌벽 아래에 보니 산삼이 즐비하게 나있었다. 이를 캐어내어 고향에 돌아와 처방대로 하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후에 상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이것은 이윤(伊尹)이 신야(莘野)에서 행한 의(誼)로움과 같다 하여 동명을 신이동(莘伊洞)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용양위 좌부장을 제수하였다.

    박언룡(朴彦龍) : 본관은 함양으로 사룡(士龍), 세룡(世龍), 계룡(季龍)과 더불어 박순수의 아들이다. 선조대의 사람이다. 부친 박순수가 큰 뱀에 물려 거의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이 물었던 뱀을 잡아 그것을 찧어 물린 자리에 바르면 차도가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즉시 사방으로 찾아다녔는데, 홀연히 고니가 그 뱀을 물고 와서 이상한 나뭇잎과 함께 떨어뜨려 주었다. 뱀을 찧어 나뭇잎으로 싸서 물린 부위에 바르니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부모의 상을 당해 하루라도 묘 곁을 떠나지 않는데, 하루는 왜적이 쳐들어와 시묘살이 집을 둘러싸고 고함치기를 “어찌 도망하지 않았느냐” 하니, “부모의 상을 당해 분묘를 버리고 목숨을 도모하는 것은 하늘같은 거울로 비추어 보면 구멍도 환하게 보이는데, 반드시 목숨이 부지될 리가 없다” 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니 왜적들도 “이와 같은 효자를 해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라고 하며 “박효자집(朴孝子盧)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세긴 후에 물러갔다. 임란 이후 부사 정경세가 박언룡은 훈도에, 박사룡은 부호군에, 박계룡은 참봉으로 추천하였다.

    박   형(朴一瑩) : 판사 박희민(朴希閔)의 아들이다. 부모를 섬김에 지극한 효로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성심을 다하니, 향인들이 칭송하고 감복하였다. 하담 김시양에게 배웠으며, 이 때 김공이 이를 극찬하였다. 

 

    박    진(朴一) : 봉사 박희언의 아들이다. 부친이 병이 나자 주야로 간호하였으며, 부친이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잉어를 구하기 위하여 다니던 중에 바위틈의 물웅덩이 사이에 마침 수달들이 잉어를 두고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을 보고 박진이 이들에게 간구하게 청하니 수달들이 큰 잉어를 갖다주길래 갖고 와서 부친에게 공양하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수달바위라고 하고 있다.
집에는 조그마한 아이도 없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손수 장작과 물을 길었을 뿐만 아니라 눈속에서도 백리길를 쌀을 지고 다녔으므로 발가락이 동상이 걸려 갈라터졌다고 한다. 이때 영해에 귀양 온 하담 김시양이 이를 듣고 “참으로 옛날의 자로에 견줄만 하다”고 하였다.
또한 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묘옆에 움막을 짖고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집에 남은 어머니는 그의 부인 백씨가 지극히 모셨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효자에 효부라고 하였다.

   남용오(南龍五) : 부모의 상을 당하여 슬픔이 법도를 넘어섰으며, 묘가 심산유곡의 승냥이와 호랑이 굴 근방에 있어 묘앞에 움막을 지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이들은 포효를 하였으며, 밤마다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니 효에 감동되어 이들도 그렇게 하였다고 하였다. 후에 사림들이 관에 상소하여 세금을 면제받도록 하였다.

   권재덕(權載德) : 본관은 안동으로 참판 남제경(南濟經)의 아들로 호는 오월헌(梧月軒)이다. 부모를 효로서 지극히 섬겼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간 소식(素食)을 하였다. 자헌대부동지중추부사를 증직받았다.

   박효랑(朴孝郞) : 박민학(朴敏學)의 딸로 영조대의 사람이다. 실화로 집에 불이 났는데, 모친이 병이 들어 방에 있는 것을 보고 불속에 뛰어들어 모친을 끌어안고 같이 죽었다. 영조 21년(1745)에 나라에서 정려를 세웠다.

   권응당(權應唐) : 본관은 안동으로 충순위 권희언의 아들이다.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부모가 돌아가자 동생들인 응우(應虞), 응하(應夏), 응상(應商), 응주(應周)와 함께 시묘살이 3년을 하였으며, 관이 만호에 이르렀다.

   백사복(白思復) : 정조대의 사람으로 첨추 백윤화(白潤華)의 계자(系子)이다. 하늘이 낸

 

효자로 특이한 행적과 행위가 있었다. 양 가정의 부모를 각기 극진히 섬겼으며, 부친이 병이 나자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알았으며, 종기가 나면 입으로 빨고, 이가 있으면 자기 몸에 옮겨 죽였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장하게 여겼다. 모친이 병이 나자 약으로 쓰일 죽순을 눈속에서 구하였고, 청개구리가 약탕관에 뛰어드니, 사람들은 개울에도 여울이 있고, 명산에도 작은 길이 있듯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부사 홍이건과 유한인이 이어서 장계를 올려 수의(繡衣)를 받았으며, 철종 5년(1854)에 도내의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 특별히 조봉대부동몽교관으로 증직되었다.

   권정흥(權鼎興) :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목재(睦齋)이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행실에 조신함이 있었다. 유고가 있다.

   신재형(申在衡) : 호는 상청당(雙淸堂)으로 본관은 평산이다. 존재 이휘일의 문하로 15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을 때 슬퍼함이 성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1688년에 인산서원을 창건하였다. 유집이 있다.

   박사일(朴師一) : 부친은 효자 박형의 후손인 박래장으로 양자이다. 태어날 때 까마귀가 모이는 이적이 있었다. 생부의 상을 당하였을 때 중이 빈소 밖에 서서 나를 따라오라 하여 따랐더니, 평해의 율현(栗峴)의 산꼭대기에 이르러 지시하면서 “이 산은 효자가 아니면 허락할 수 없는 곳이다” 하고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묘를 썼다. 양부가 기질(奇疾)이 생기자 대변을 맛보고 하늘에 축원하자 꿈속에서 신기한 약제를 얻어 병을 낫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방세백(房世伯) : 부모를 섬김에 효로써 하였으며, 부친이 병이 나서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르자 세백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목욕재계를 한 후, 북두칠성에 절하면서 축원하길 “아버지를 살려 주소”하고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으니, 회생을 하였다. 이를 들은 경상감사가 그 집에 면세를 하여 주었다.

   권대신(權大伸) : 본관은 안동으로 7세 때 부친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목숨을 2년이나 연장하였다. 결국 상을 당하자 슬픔이 뼈에 사무치도록 몸부림치니, 향내에 칭송이 있었으며, 읍에까지 알림이 있었다. 중직으로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신홍례(申弘禮)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수신헌(修愼軒)이고, 가선동추(嘉善同樞)이다. 부모가 병이 나서 잉어회를 원하자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얼음을 깨고 이를 구하여 부모에게 공양하였으며, 매일 밤중에 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축원드렸다.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극치로 나타냈으며, 매일 성묘하며 부르는 곡소리가 처음 초상날 때 그대로 였으니, 향리에서 칭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부사가 이러한 사실을 일로 삼으려고 하니 극구 사양하였다.

 

   박치수(朴致脩) : 정조대의 사람이다. 호는 수은(燧隱)으로 초명은 명오(命吾)이다. 고조부가 박사일이다. 양친을 모시는데 지극한 효로써 함에 특이한 것이 있었다. 상국 윤성대가 봉수대의 역을 감하여 주었으며, 상국 이효순은 찬과 일금을 주었으며, 상국 정원용이 정려를 상주하고자 하였으나, 적극적으로 사양하여 그치게 하였다. 향리에서는 장하다 하였다.

   박한운(朴漢雲) : 박형의 후손으로 일찍 부친이 돌아간 후, 모친이 병이 들자 북두칠성에 빌고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모친을 소생시키니, 관에서 이를 알고 부역을 감하여 주고 세금을 면제시켜 주었다.

   윤   업(允一業) : 백성 집의 노비였는데, 부모를 모시는데 성심으로 하였다. 부친이 죽자 장지가 깊은 산속인데도 불구하고 혼자 묘를 3년이나 지키니, 감사가 이를 듣고 치하하며 그 집의 세금을 면제하여 주었다.

   신   씨(申一氏) : 본관은 단양으로 신두병의 딸이다. 부친이 영덕현령에 의하여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자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다고 하며, 한양에 올라가서 임금에게 알리기 위하여 신문고를 쳐서 결국 원수를 갚았으며, 원수가 귀양 중에 죽으니, 효열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남국망(南國望)에게 시집을 갔으며, 감사가 장계를 올리고 세금을 감하여 주었다.

   효   랑(孝一) : 학생 박민학의 딸이다. 섬김에 지극하여 효 아님이 없었다. 17세 때, 사람의 실화로 집에 불이 났는데 안에 모친이 있었다.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효랑이가 이를 구하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옆에 있던 사림들이 붙잡고 극구 만류하였으나, 결국 효랑은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모친을 안고 같이 소사(燒死)하였다. 나라에서 이를 듣고 정려를 세웠다.

   김해 김씨 : 김순명의 딸로 밀양 박영악(朴英岳)의 부인이다. 그 시어머니는 맹인으로 하루는 기름을 짜서 방구석에 두고 밭일을 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니 시어머니가 “마굿간의 항아리에 기름병을 빠뜨렸다” 하여도 기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히려 “넘어져 다치지는 않았느냐”고 하였다.

 

  바깥에서 돌아 온 남편을 맞이하며 “시어머니가 기름항아리를 요강으로 오인하여 이와 같이 하였다고 하니 나도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고 하니 남편 박영악은 의관을 갖추어 그 처를 당상에 앉게 하고는 공손히 절을 하며 “그대가 노모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고 하였다. 이에 부인도 역시 절을 하며 고마움을 나타내었다. 효부라는 칭송이 있었다.

   강득호(姜得豪) : 본관은 진주로 부친은 강연상(姜延祥)이다. 순조대의 사람이다. 효성스런 성품으로 부모가 병이 나자 얼굴에 근심을 띠며, 주야로 하늘에 기도하여 자기가 대신 아프도록 축원하였으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넣어 치료하기도 하였다.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권도근(權道根) : 본관은 안동으로 부친은 수찬 권소지(修撰 權紹之)이다. 부모의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니 꿈에 청의동자가 영약을 주었으며, 호랑이가 노루를 마당에 물어다 주었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 꿈에 신인(神人)이 인도하는대로 부친의 장례를 무사히 마쳤으며, 조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부친을 대신해서 예를 다해 장례를 치루었다.
  뒤에 모친의 상을 당해서도 끝까지 법도에 맞게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한 때 우연히 실화로 집에 불이 나자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흰새(白鳥)들이 와서 집주위를 돌며 쪼아대니 불이 꺼지기도 하였다. 순종 28년(1828)에 김사목(金思穆), 남공철(南公轍), 이상황(李相璜), 이존수(李存秀) 등이 정려를 청원하니 임금께서 가상하다고 여겨 은전이 있었으며, 고종 6년(1869)에 좌장례로 증직되었다.

   장윤학(張倫學), 장겸학(張謙學), 장익학(張益學) : 본관은 인동으로 삼형제 효자이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모시고 살았는데, 특히 형 윤학은 모친이 병이 나 위독하자 매일 밤 하늘에 기도를 하였으며, 마침 상을 당해서 장례를 살피던 자에 의하여 소송이 제기되었는데, 상복을 입은 채 관가에 가서 예로써 이를 대하니 3일만에 승소하게 되었다. 병인양요 때 의로써 몸을 세워 달려갔으나 조령에 이르러 난이 평정되었다고 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효가 충성으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겸학, 익학 두 동생들도 효성스러움이 지극하여 효자로 널리 알려졌다.

   김성세(金聲世) : 초명은 이정(以精)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지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부모가 혹 병이 나도 근심스런 얼굴로 끼니를 거를 정도였다. 집이 가난해서 배움을 얻지 못하였으나 손수 나무를 하여 쌀과 고기를 바꾸어 부모를 극진히 공양하였으며, 형제 5인간에도 우애가 있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옛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며, 매일 성묘를 하여 절을 하던 곳에는 구멍이 생길 정도였다. 늙그막에 자식을 따라 흥해 원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리가 150리나 되는데도 몸소 돌아와서 제사를 받들었다. 수직으로 통정에 올랐다.

 

   최남수(崔南壽) : 본관은 경주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10년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어느날 출타 중에 꿈속에 이상한 징험이 있어 돌아오고자 하니 큰 호랑이가 인도하여 주어 무사히 150리 길을 돌아오니 부모의 병환이 위독하여 막 임종할 시간이었다. 상을 당해서는 시종 예로써 이를 마치니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호조참판겸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오봉선(吳鳳善) : 본관은 해주로 자는 화경(化景)이다. 집이 가난하여 늙은 부모를 섬김에 봄에는 칡으로 가을에는 열매로 하였으며, 모친이 병이 나서 위독하자 매일 밤 하늘에 기도를 하자 병이 나았다. 부친이 돌아가자 시묘살이를 법도에 따라 하였으며, 모친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지자 하늘에 호곡하고 땅을 두드리며 울부짖자 이로 인하여 모친이 회생하여 반나절의 수명이 연장되었다. 이에 모친이 “천명을 어찌할 것인가, 너는 너무 슬퍼하지 마라” 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전과 같이 예로써 하였으며,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엄상봉(嚴尙鳳) : 본관은 영월로 자는 사현(士賢)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니 3일이나 목숨이 연장되었다. 통정대부에 증직되었다.

   최기일(崔麒一) : 자는 사언(泗彦)으로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다. 부친이 병이 나서 산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사방을 다니며 구해 진상하니 부친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최민형(崔旻珩) : 부친은 통정대부 최태륜(崔泰崙)이다. 부친이 병으로 6년이나 누워 있었는데도 보양하지 않은 음식이 없었다.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넘쳐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자손에게 전하는 6조목의 잠언이 있었으나 불에 타서 전하지 않는다.

   강만룡(姜萬龍) : 자는 언화(彦和)로 가선대부 강영대(姜永大)의 아들이다. 8세에 모친이 돌아가자 그 행하는 행신이 어른 같았으며, 가난하여 부친을 봉양하메 밤에는 문지방 밖에서 신을 삼고, 낮에는 나무를 하고 고기를 낚아 맛있는 것을 끊지 않았다. 부친이 병이 들어 갑자기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을 하였으나, 잠시 후에 돌아가게 되었다. 법도에 따라 시묘살이를 하였다. 나중에 몸을 잘 다스려 풍요롭게 되자 제사를 넉넉하게 지내 손님들을 대접하였으며, 의복과 장신구 등에도 무관심하였는데, “우리 양친이 살았을 때, 집이 가난하여 참아 맛있는 것도 대접치 못하였는데, 맛있고 화려한 것이 어찌 내 몸에 가당한가” 하고는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이러한 사실은 신안서원록에 등재되어 있으며, 수직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받았다.

 

   이성덕(李成德) : 본관은 영천으로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모친이 이질에 걸리어 위독하자 성덕은 목욕재계하고 주야로 하늘에 기도하며 근심을 사르고 있자 어떤 의원이 “토끼 고기가 좋다”고 하였다. 하루 저녁에 성덕 부부가 목욕을 하려고 물을 길으려 하자 어디서 토끼 1쌍이 달려 와서 우물에 빠지니 이를 잡아다 모친에게 복용시키니 모친의 병이 씻은 듯이 낫고 80까지 수를 하였다.

   배윤성(裵潤聖, 1675∼1752) : 본관은 분성으로 호는 일야당(逸野堂)이고, 부친은 송고 배진창이다. 일찍이 효경을 읽어 부모를 섬김에 절도가 있었다.

   김명남(金命南) : 본관은 김녕으로 자는 대천(大天)이고, 호는 노은(魯隱)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 봉양에 혼신을 다하였다. 부친이 병이 들메 잠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하늘에 기도하여 대신 아프기를 빌었다. 돌아가서는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유고가 있다.

   김병락(金炳洛) : 본관은 경주로 자는 윤여(允汝)이다. 하늘에서 근본한 효성으로 모친이 병이 들어 위급하자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부친이 병이 나서 산 꿩고기를 원하자 시절이 꿩을 얻기 힘든 시절이라 병락이 목욕재계하고 산에 올라 제사를 드리자 홀연히 한 마리의 꿩이 마당으로 날아들었다. 이에 이를 잡아 공양하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사림에서 여러번 표창하기를 거론하였으며,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최계천(崔繼天) : 자는 극보(極甫)이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첨추를 받았다.

   김해련(金海鍊) : 본관은 수안으로 영조대의 사람이다. 생후 7일만에 모친이 돌아가고, 9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어른과 같이 행신하였으며, 문득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면 땅을 치고 통곡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을 가지게 하였다.
  또한 조부모가 돌아가자 6년 동안이나 마늘이나 날고기를 먹지 않고 봉두난발로 지내니, 향리 사람들이 그 애통함을 보고 힘으로 그만두게 하려고 하였지만, “나를 길러 준 조부모의 은혜가 하늘같아 보답할 길이 없는데, 어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술과 고기를 참아 마시고 먹고 할 수 있으랴” 하며 따르지 않았다.
  영조 41년(1765)에 특명으로 정려를 받았으나 현재는 폐지되고 없다.

 

   김양락(金陽洛) : 본관은 경주로 자는 원숙(源淑)이다. 6세 때 부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어른과 같이 행신하였으며, 7세 때 글을 배우며 선생에게 “가정이 빈한하여 모친을 돌볼 사람이 없습니다. 호미질하고 나무하고 하여 봉양하는 것이 사람의 아들 된 도리로 감히 앉아서 독서만 할 수 없습니다.” 하고는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지어 맛있는 것을 대접하였다. 모친이 병이 나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목욕재계한 후 하늘에 기도를 하고 얼음을 깨어 고기를 잡아 모친에게 드렸으며, 상을 당해서는 성묘하는 것이 3년을 하루같이 똑같이 하였다.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하였다.

   박인석(朴仁錫) : 본관은 영해로 자는 의겸(義兼)이고, 부친은 박민수(朴敏秀)이다. 어릴 때 부친이 정질(貞疾)이 있어 심산에 들어가 피할 때, 인석이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모친 손씨가 배우기를 권할 때 “부친이 병들고, 모친이 쇠약한데다 가정 또한 빈곤하니 자식으로 어찌 한가로이 배움에 열중할 것인가” 하고는 낮에는 나무하고, 밤에는 신을 삼아 시장에 팔아 부모를 공양하였다.
  본래 인석은 양자로 들어 왔는데, 친아버지가 그 고생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양자관계를 파기하고자 하니, “아버지가 이미 양자를 허락했는데, 이제 와서 양자관계를 파기하면 신용없는 일이고, 양부가 병이 들었다고 도로 친부모에게로 간다면 의리가 없는 짓이다” 고 하였다. 결국 생부가 양자관계의 파기를 그만 두었다.
  결국에는 양부의 병도 효성으로 고쳤으며, 수명도 연장시켰다. 조정에서 의금부도사를 제수하고, 이어 공조참의에 승급시켰으며, 증직으로 가선대부를 주었으며 정려를 명하였다.

   방각규(房珏圭) : 본관은 남양으로 자는 치연(致淵)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웠으며, 방의 벽에다 3괴(三愧) 두자를 걸어두었는데,“위로는 하늘을 잘 섬기지 못한 것을 1괴, 아래로는 사람들을 적정히 대하지 못한 것을 2괴,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3괴” 라고 하였다.

 

   이보익(李輔翼) : 본관은 월성으로 자는 공우(公遇)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부친의 얼굴을 친면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삼았으며, 편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모친의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였으며, 기일에는 묘소에 눈이 쌓이고, 날씨가 차갑더라도 몸소 청소를 하였다.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최인주(崔仁柱) : 본관은 경주로 자는 성여(聖汝)이다. 10세 때 맏형이 요절하자 몸소 나무하고 물긷고 하여 부모를 모셨으며, 25세 때에 모친 손씨가 병이 나서 위급할 때도 약을 먼저 맛보아 조절을 하였으며, 하늘에 기도를 하였다.
부친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수혈하여 회생을 시켰으며, 목숨이 일년이나 늘이기도 하였다. 동과 면내에서 이러한 사실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최흥수(崔興壽) : 본관은 경주로 자는 흥주(興柱)이고, 부친은 최세복(崔世福)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우애도 깊었다. 부친이 병이 나자 주야로 간호하였으며, 눈속에서 미나리를 구하고, 얼음 속에서 고기를 구하여 공양하였으며,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진단하였는데, 꿈속에서 신령이 가르쳐 주는 길에서 의원을 만나 약을 쓰니 금방 나았다. 상을 당하여서는 그 슬픔이 법도를 넘었으며, 후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서도 똑같이 행신하였다.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하였다.

   김무성(金武聲) : 본관은 김녕으로 자는 주일(周逸)이다. 효성이 있고 우애가 깊었다. 모친의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를 법도에 맞게 하였다. 유허비가 있다.

   김   집(金一) : 자는 장옥(璋玉)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수혈하여 반나절을 회생시켰으나, 필경에는 돌아갔다. 부모 섬김에 미진했던 것을 평소의 한으로 삼았다.

   이규만(李圭晩) : 본관은 경주로 이화영(李和榮)의 아들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배우지 못하여도 효와 우애에 대하여 알았다. 집이 가난하여 나무를 해서 팔아 술과 고기를 사와 부모를 봉양하였다. 모친이 담증에 걸렸을 때는 그 독을 빨아서 완쾌시켰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묘를 하였다. 향리에서는 이러한 행신에 대하여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권태정(權泰鼎) : 협판 권중학(權重鶴)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항상 부모를 먼저

 

봉양하는 것을 예로 하니, 소리개가 약을 물어다 주기도 하고, 호랑이가 행로를 보호하기도 하고, 꿩이 주방으로 날아 들기도 하는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곤 하였다. 참봉을 제수받았으며, 협판으로 승급되었다.

   강계원(姜啓源) : 자는 공백(公伯)이고, 고종대의 사람으로 강만룡(姜萬龍)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반드시 방의 온도를 물었으며, 음식의 맛을 판별하여 공양하였으며, 그 중에도 좋은 것만 골라 공양하는 기쁨으로 부모를 섬겼다. 또한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이두엽(李杜燁) : 본관은 안성으로 자는 덕문(德文)이다. 집이 가난하여 나무하고, 고기 잡아 쌀로 바꾸어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모친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기도 하였다.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관에서도 표창을 하였다.

   김응성(金應聲) : 본관은 김녕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이 병들자 대변을 맛보는 고통을 감내하였다. 죽은 후에는 조석으로 성묘하였으며, 늙어서도 그대로 하였다.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최경붕(崔慶鵬) : 본관은 경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릴 때부터 잠시라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맛있는 색다른 음식을 얻으면 부모에게 항상 갖다 드렸다. 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 동안 한번도 웃지 않았으며, 계축년에 우연히 병을 얻어 위급하자 가인(家人)에게 “불초한 내 죄가 하늘, 땅에까지 쌓여 노모보다 먼저 죽게 되었으니, 내 어찌 사람의 아들이리오, 내 죽은 후에는 제사 상에 어물은 쓰지말라” 하였다. 이 때가 겨우 30세로 그 장례 때 이 말을 어기고 어물을 쓰니, 제사상이 저절로 기울어지는 이변이 생겼다고 한다.

   김연생(金連生) : 본관은 김녕이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에 흰제비가 날아드는 상서로움이 있었다. 사람들이 이를 효성에 감동하여 그렇다고 하였다.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주광호(朱光昊) : 본관은 신안으로 부친이 병이 들어 위급하자 하늘에 기도를 하니, 하늘에서 이상한 물건이 내려옴에 따라 약으로 공양하였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향리에서는 효성에 감복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향유들은 표창을 상신하기도 하였다.

 

   김종성(金鍾聖) : 가선대부 김성배(金聲培)의 아들로 집이 가난하여 새끼를 꼬아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부모에게 맛있는 것을 공양하였으며, 효자가 꼰 새끼라 하여 값을 불문하고 읍민들이 사주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장지를 구하고 있었는데, 꿈에 어떤 대인이 옥류산 정상의 눈이 약간 녹은 곳이 명당이라 하길래, 이튿날 그곳에 가보니 과연 꿈에 이야기한 장소가 있어 그곳에다 무사히 장례를 치뤘다.

   김문철(金文喆) : 모친의 병에 손가락 잘라 그 피를 수혈하여 7일을 더 살게 하였고, 부친이 병이 들어 토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문철이 울면서 산에 들어가니 두 마리의 토끼가 튀어 나오길래 잡아 공양하자 병에 효험이 있었다.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이상하(李相夏) : 14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나물만 먹었으며, 매일 성묘를 하였다. 조부가 병이 들자 목욕재계하고 산에서 기도하여 영약을 얻어 밤에 돌아오니 호랑이가 보호하여 집앞에까지 인도하였다고 한다. 문도들이 정자를 지어 사병(四丙)이라 편액하였으며, 유고집이 있다.

   박성달(朴成達) : 본관은 밀양으로 찬성으로 증직된 박규성(朴奎)의 아들이다. 태어나기 백일 전에 부친이 죽었다. 14세에 이르러 이를 원통히 여겨 뒤늦게 복을 3년간 입었는데, 슬픔이 도를 지나쳤으며, 기제사 때도 통한에 몸부림쳤다. 편모의 봉양도 지극 정성으로 하여 늘 맛있는 것을 끊이지 않았다. 효성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일암유고가 있다.

   김치범(金致範) : 본관은 경주로 효성스러웠으며, 집이 가난하여 외부에 가서 노동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3년의 시묘살이를 하는데, 나물만 먹었다. 그 아들 진규(鎭奎)도 부친을 본받아 효성스러웠다.

   김여수(金呂壽) : 본관은 삼척으로 부모를 받들메 남달랐으며,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가 끝날 때까지 상복을 벗지 않았다. 수직으로 가선대부를 받았으며, 삼척으로부터 영덕으로 이거하여 왔다.

   이기인(李基仁) : 본관은 영천으로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의 법도를 지켰다. 그 아들 영석(永錫), 규석(奎錫)도 부친의 효성을 받아 효자로 이름이 나 삼효자라 칭송되었다.

 

   박능조(朴能祚) : 본관은 밀양으로 부친은 박교수(朴敎壽)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의 상을 당하여 3일간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3년간 소금도 먹지 않았으며, 빗질도 하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묘에 가서 울부짖으니 사람 모두가 감탄하였다.

   장봉주(張鳳周) : 본관은 인동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흉년을 만나 생활이 곤란할 때, 부친의 눈동자에 병이 생겼는데, 몸소 부친을 등에 지고 불원천리 풀밭과 들판에 노숙하면서 음식을 구해 공양하였으며, 십년 후에 고향에 돌아와서 7년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에 매일 흙을 보태 봉분이 되었다. 사림에서 표창이 있었다.

   정재기(鄭在箕) : 본관은 야성으로 정경백(鄭景柏)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의 머리에 종기가 나자 독기를 몸소 입으로 빨아내니 효성이 향리에 자자하였다.

   양두한(梁斗漢) : 증직 중추부사 양조해(梁朝海)의 아들이다. 효행으로써 장릉참봉이 되었으며, 표창을 위한 완의문(完議文)이 있다.

   신화호(申華浩) : 본관은 평산으로 10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성인같이 행신하였으며, 어느 날 십리길에 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홀연히 마음에 집히는 바가 있어 급히 집에 돌아오니 모친이 급작스런 병이 발병하여 호흡이 끊겨 죽음 직전이었다. 즉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니 모친이 소생하였다. 사림이 관에 보고하고, 관에서는 색깔있는 옷을 내리고, 세금을 면제시켜 주었다.

   강수일(姜壽一) : 본관은 진주로 영조대의 사람이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 3년의 시묘살이에 한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호랑이가 와서 보호를 하였다고 한다.

   남재홍(南在鴻) : 본관은 영양으로 부모를 섬기는데 효성을 다하였다. 부친이 병이 날 때, 본인도 병이 들어 거동치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을 보내어 부친의 대변을 채취하여 오도록 하여 몸소 맛보아 병세를 챙겼으며, 그의 부인도 방아찧고, 길쌈메고 하여 그 모심을 지극히 하였다. 사림에서 표창하였고, 찬정 이재현(李載現)이 찬한 효행비가 있다.

   박처중(朴處中) : 본관은 밀양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웠다. 7세에 부친이 돌아가자효도를 못함을 애통해 하였다. 예전에 흥해 달전에서 살았으나, 집이 가난하기에 생활의 방편을 찾아 영덕군 양장에 이사하여 살았는데, 약관의 나이에 백여리나 떨어진 먼거리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곁에다 이장을 하니 늙어도 이루기 어려운 일을 이루었다고 칭찬이 있었다. 또한 90 노모를 지극히 봉양하였으며, 모친의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했으며, 3년간 나물만 먹었다. 수직으로 통정대부 지중추부사를 받았다.

 

   신응조(申應祚) : 본관은 평산으로 어릴 때부터 학교옆에서 성장하여 제사놀이를 즐겨 배우고 익혔다. 효와 우애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부모가 아플 때는 양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수일의 생명을 연장하기도 하였다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김도흠(金道欽) : 본관은 영덕으로 부모를 섬김에 효성으로 하였으며, 모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읍혈(泣血)로 3년을 보내니 이웃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수직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박완실(朴琬實) : 본관은 밀양으로 부친은 박창욱(朴昌旭)이다. 부친이 죄를 얻어 함북 부령군에 귀양을 가서 풀려나지 못하고 거기서 죽어 북망산에 묻혔다. 부친이 귀양갈 때 완실이는 태중의 3개월이었다. 커서 찾으려 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모친마저 돌아가 3년의 상을 겨우 마치고 부녕군에 도착하여 부친의 안부를 찾으니, 기사년에 죽어 북산에 묻었다고 하였다. 흩어진 묘들 중에 상세히 아는 자가 없으나, 오직 옛날 군수이던 나춘배의 아들이 안다고 하였다. 춘배의 아들은 마침 해소 삼천리에 있었다. 물어 물어 해소항에 도착하였으나, 춘배의 아들도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다시 부녕군에 돌아와서 울면서 관에 고하니 당시의 읍리의 아들인 박봉서가 역시 읍의 수리(首吏)가 되어 있었는데, 와서 말하길 “귀하의 부친이 이곳에 귀양와서 친하게 지낸 이는 우리 부친이다. 죽음에 임해서 표석을 광에 묻었다.” 하였다.
  세월이 오래고 묘들이 총총하여 어느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늘에 맹서하고 한 봉분을 열었더니, 마침 표석이 나왔다. 이를 수습하여 고향에 모시고 와서 안장을 하였다. 향리에서 칭송이 있었으며, 중추원 의관에 승급시켰다. 강구 남쪽 해변에 효자각이 있다.

   김원락(金源洛) : 본관은 영덕으로 부친은 도사 김두명(金斗明)이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부친이 아플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수혈하였으며, 상을 당한 후에는 매일 성묘를 하고, 시묘살이가 끝날 때까지 나물만 먹었다. 모친의 상을 당해서도 이와 같이 하였다. 장릉참봉에 제수되었다.

 

   권병익(權秉益) : 본관은 안동으로 부친은 통정대부 권호수(權浩洙)이고, 고종대의 사람이다. 부친의 3년 병에 대변을 맛보아 가며 효도를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법도에 따라 시묘살이를 하였다. 효릉참봉이다.

   신태진(申泰震) : 본관은 평산으로 부모를 섬김에 효성스럽게 하였으며, 고종대의 사람이다. 부친이 와사병으로 고생하자 의원에게 물으니 까치의 혀가 좋다고 하였다. 사방에 이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총기를 가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던 터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마리의 까치가 스스로 다리 머리에 부딪혀 떨어져 죽었다. 시험적으로 복용케 하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고종대에 후릉참봉에 제수되었다.

   박종범(朴宗範) :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려서 부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어른같이 행신하였으며, 부친의 복을 채 벗기도 전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 매일 성묘하기를 비바람이 불어쳐도 거르지 않았다.

   박용래(朴龍來) : 통정대부 박정준(朴政準)의 아들이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모셨는데, 모친이 병이 나 증세를 다스리지 못하였다. 이에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니 꿈속에서 신령스런 약제를 얻어 마침내 병을 물리쳤다. 1896년의 혼란에 용래는 외지에 있어 미쳐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온 가족이 피난가고 병든 노모만 남아 있었다. 용래가 돌아와서 모친을 업고 피난하여 결국은 보전할 수 있었다. 다만 숙부와 숙모가 칼과 창에 의하여 병들게 되어 거의 고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용래가 한달 보름여 동안 몸소 독기를 빨아내어 이를 완치시키니 향리에서는 친부모도 아닌데도 그렇게 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였다. 참봉에 이르렀다.

   김형순(金炯淳) : 14세에 부친의 상을 당한 슬픔에 거의 죽음지경에 이르렀다. 집이 가난하여 어린 동생과 더불어 산 밖으로 나아가 돈을 벌어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강쌍희(姜雙熙) : 강우형(姜右馨)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경을 읽고, 그 뜻대로 하였다. 부친이 병이 나자 간호를 하며 하늘에 축원하여 부친의 병을 대신하고자 하였다. 부친이 생꿩고기를 원하자 홀연히 꿩이 마당으로 날아들었다. 이에 이를 잡아 공양하니 효험이 있었다. 증직으로 통정을 제수받았다.

   김상태(金相泰) : 증직 참판인 김흥락(金興洛)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과의 우애가 깊었으며, 부친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수혈하여 목숨을 살렸으며, 상을 당해서는 매일 성묘를 하였다. 참봉에 이르렀다.

 

   김형배(金炯培) : 김현보(金顯輔)의 아들이다. 효성스러웠으며, 집이 가난하여 산꼭대기의 따비 밭을 몸소 개간하여 가난한 가운데 부모를 공양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집이 구석진 곳에 있어도 산해진미를 극력 구하여 끊이지 않고 공양하였다. 동과 면에서 표창을 하였다.

   김형봉(金炯鳳) : 김용권(金龍權)의 아들이다. 부친이 갑자기 기질(奇疾)이 발병하여 형이 약을 구하러간 사이에 부친이 운명하려고 하자 도끼로 손가락을 잘라 뚝뚝 흐르는 피를 수혈하였으나 회생도 잠시, 결국은 운명하게 되었다. 아침, 저녁으로 성묘하는 것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하니 듣는 사람 모두가 감탄하였다.

   신득용(申得龍) : 본관은 평산으로 참봉 신주휴(申珠休)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가난한 가운데도 부모 공양을 기쁨으로 알았으며, 가문 내에도 친목을 돈독히 하여 효자로 칭찬 받았으며 관에서 듣고 은배를 내렸다.

   임창재(任昌宰) : 본관은 풍천으로 15세에 모친 김씨가 우연히 병을 얻어 약이 없어 치료를 할 수 없었다. 맏형이 약을 구하러간 사이에 모친이 거의 절명할 지경인데, 집이 외진 곳이라 아무에게도 도움받을 데가 없어 마침내 왼쪽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수혈하였으나, 소생하지 못하였다. 이어서 17세인 누이에게 오른쪽 손가락을 잘라주길 부탁하였으나, 누이가 겁을 먹고 손등을 찍어 수혈하지 못하자 다시 동생을 채근하여 결국 무명지 두마디를 짤라 연이어 피를 수혈하니 오래지 않아 회생하였으며, 병에 차도가 있었다. 이후 몇년을 더 살다 작고하였다.

   신후균(申後均) : 본관은 평산으로 모친이 기질을 얻어 병이 점차 중해져 가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을 하였으나, 깨어나지 못하므로 재차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니 깨어났다. 깨어나면서 “가니 어떤 세상에도 보지 못한 궁부(宮府)가 빽빽이 들어서 있길래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니, 문지기가 문을 닫으며, 너의 자식이 너를 끌어당기고 있으니 들여보낼 수 없다.” 는 소리를 하는 차에 홀연히 뇌성벽력이 쳐서 깨어났다고 하였다. 사림에서 열읍에 이 사실을 통보하여 칭찬하였다.

   김화수(金和洙) : 통정대부 김영헌(金永憲)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4세 때에 부친이 20냥의 세금을 내지 못하여 관에 잡혀 있을 때, 나무를 해다 팔아 이를 완납하고 부친을 석방시켰다. 1894년의 흉년에도 역시 나무를 해다 팔아 조모와 양친을 공양하면서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으니,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백영기(白永基) : 본관은 대흥으로 백중각(白重珏)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그물과 짚신을 삼아 시장에 팔아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조부의 병환에도 열과 성을 다하였다.

   권오우(權五宇) : 본관은 안동으로 낮에는 나무하고, 밤에는 고기잡아 부모를 공양하였으며, 부친의 병에 정성을 다하니 신명(神明)이 감응하여 수명을 연장하였다고 한다.

   이상하(李相夏) : 본관은 영천으로 부친은 이인원(李仁源)이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 예에 따라 행신하였으며, 병이 들어 간호할 때는 열과 성을 다하였으며, 목욕재계하고 산천에 기도하니 꿈에 신약제가 나타나 이를 처방 복용케 하여 10년을 더 살게 하였다. 모친이 병이 나서 검은 소의 간을 먹어야 낫는다는 의원의 이야기에 이를 구하여 드리니 정말로 효험이 있었다.

   이광술(李光術) : 본관은 영천으로 모친이 병이 나자 왼쪽 손의 무명지를 잘라 수혈하여 7일간 모친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향리에서 칭송이 있었다.

   장길상(張吉相) : 본관은 인동으로 부친이 병이 들자 처 신씨와 동생과 같이 노동으로 품을 팔아 좋은 약과 음식을 해드려 30년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장영석(張英錫) : 본관은 인동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매일 성묘하고, 조석으로 음식을 공양하고 호곡하였다.

   김병형(金炳衡) : 본관은 안동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성균(金聖均) : 본관은 안동으로 부친은 김병형이다. 부자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나라에서 이를 알고 정려비를 세워주었다.

   박두경(朴斗慶) : 본관은 함양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이 병이 나서 위급하자 왼쪽 손의 손가락 1개를 잘라 수혈하여 회생시켰으나, 다시 중태에 빠지니, 또 한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3개월 여간 생명을 연장시켰다. 또 부친의 병에 부엉이, 독수리 등이 약제를 물어 다 주었으며, 다닐 때는 호랑이가 보호하였다고 한다.

 

   김성원(金聲遠) : 본관은 경주로 부친이 병이 들어 미꾸라지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 해를 이어 잡아다 공양을 하였는데, 사람들은 미꾸라지 동자라 하였다.

   김제구(金齊九) : 본관은 김해로, 호는 첨망재(瞻望齋)이다. 가정이 빈궁하여 몸소 밭을 갈아 부모를 섬김에 지성으로 다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자 하늘에 기도를 드리니,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는 곳에 가서 산삼을 얻어 병을 다스렸다.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동지중추부사를 증직하였다.

   김정식(金政植) :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이 병이 들자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아 봉양하였으며, 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예를 다하였다. 관에서 쌀과 고기를 보내 주었으며, 수직으로 통정을 받았다.

   이춘백(李春伯) : 집이 가난하여 부모를 섬김에 짚신을 삼아 팔고, 나무를 해서 팔아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다 드렸으며, 모친이 병이 나자 기도를 하니 신인이 나타나 약을 주길래 이를 복용시키니 효험이 있었다. 상을 당해서도 매일 성묘를 하였는데, 비바람이 불어도 그치지를 아니하였다.

   강두선(姜斗善) : 호는 시은(市隱)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을 부모와 같이 공경하였다. 나라에서 정려를 하였다.

   박능석(朴能錫) : 호는 야초당(野堂)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고기잡고 나무하여 부모를 섬겼다. 향리에서 칭송이 있었으며,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김성만(金成萬) :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였다 향리에 칭송이 있었다.

   효부 강씨 : 본관은 진주로 양두한의 처로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어느날 밤에 도적이 들어와서 시부모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강씨가 대신 그 화를 당하겠다고 자청하자 도적들도 감동하여 비단과 쌀을 두고 가려고 하였으나 강씨는 적극 고사하였다. 향리에서 표창이 있었다.

 

   최    씨 : 경주인 최희구(崔喜九)의 딸로 평택 임병춘(林炳春)의 처이다. 부덕이 있었으며, 시부모가 병이 들자 산천에 기도하여 영약을 얻어 봉양하니 효험이 있었다. 향리에서 표창을 하였다.

   김운이(金雲伊,1901∼1975) : 김녕 김한복(金漢復)의 딸로 순흥 안계현(安桂弦)의 처다. 17세에 시집을 갔으나 가정은 빈한하고, 지아비는 당시 시류에 따라 중국 길림성 등지에 체류하는 등 정처없는 유랑으로 가정에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시니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임만재(任萬宰) : 본관은 풍천으로 가난한 이웃에 베풀어 칭송이 많았고, 아버지의 와병에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여 회생케 하였다. 서당(書堂)을 운영하기 위해 계()를 모았고 학계(學)의 도유사(都有司)를 맡아 잘 관리하여 오늘날까지 학계논(學畓)이 전해지고 있다.

 
 

2. 정열(貞烈)

   구음방(九音方) : 세조와 성종 초의 사람으로 예빈시(禮賓寺)의 종이었다. 35세에 지아비가 죽자 그 부친이 딸이 과부됨을 애처롭게 생각하여 그 뜻을 꺽으려고 하니, 구음방은 다른 사람에게는 재가하지 않을 것을 맹서하고 깊은 들에 숨어버렸다. 재삼 그 아버지가 개가하기를 권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지아비가 죽은 후, 고기와 냄새나는 마늘 등의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27년 동안 빨리 죽기를 원하여 신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성종 4년(1473)에 이 일로 나라에서 정려를 세워주고, 세금을 면하여 주었다.

   박   씨 : 본관은 무안으로 목사 박홍장의 딸이며, 진사 이시청의 처다. 지아비가 죽자 슬픔이 예를 넘어 몸을 상할 정도였으며, 몸에는 솜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물과 음식을 먹지 않고 주야로 중문안의 여막에 업드리니, 종래에는 죽게되었다. 인조대의 일이다. 나라에서 곡식을 하사하였다.

   권소사(權召史) : 수군(水軍) 김정탁(金廷卓)의 처이다. 어느 날 밤에 지아비가 술에 취해 넘어지면서 호롱불을 넘어뜨리게 되어 집에 불이 나게 되었다. 불이 나자 권소사는 먼저 어린 자식을 안아 집 밖에 던져두고 뒤이어 뜨거운 불속으로 지아비를 구하려고 뛰어들었으나 나오지 못하고 같이 불에 타 죽었다. 나라에서 정려를 명하였다.

 

   양녀일진(良女日進) : 양녀 일진은 어부 박한(朴漢)의 처다. 지아비가 배를 타고 고기를 잡기 위하여 바다에 나갔는데, 태풍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진은 낮과 밤을 이어 지아비를 부르며 지아비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눈치 챈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감시가 엄중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진심을 숨긴 채 거짓 웃는 얼굴로 시부모를 안심시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루는 이웃집에 일이 있어 동리 사람들 모두가 모이게 되었는데, 자기의 시부모들도 가보길 권하고는 자기가 집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고는 결국 일진은 목을 메어 지아비 곁으로 갔다.

   박소사(朴召史) : 하리(下吏) 김연삼(金連三)의 처다. 지아비가 병으로 일찍 요절하자 낮과 밤을 이어 통곡하고는 지아비를 따라가기를 맹서하고 곡기를 끊은 지 열흘만에 독약을 마시고 지아비를 따라갔다. 이러한 일은 들은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박   성(朴一姓, 소사) : 향리(鄕吏) 김윤의(金潤義)의 처다. 지아비가 병으로 죽자 따라 죽기를 원했으나 뱃속에 유복자가 있어 차마 죽지 못하고 아기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딸을 놓고는 물 한모금 조차 먹지 않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정려를 명하였다.

   권   씨(權一氏) : 사인(士人) 신길환(申吉煥)의 처다. 지아비가 요절하자, 시부모와 유복자를 위로하며, 예를 갖춰 상을 치루었다. 그러나 실망하여 창자가 썩고 피를 토하는 지경에 이르러 지아비를 따르기를 원하여 결국은 지아비를 따르게 되었다. 이때 비단 같은 흰기운이 집에서 나와 파놓은 광(壙)으로 물방울 같이 떨어지는데, 정교하게 빛이 나는 물건이 있었다. 장례일 합장을 하였다.
향리에서 정열로 칭송이 났으며, 정려하기를 요청한 바 병인(丙寅) 8월에 정려하도록 령이 떨어져 임신(壬申)년에 지품면 신안리에 정려를 세웠다.

   이   씨 : 본관은 안성으로 강릉인 박행오(朴行五)의 처다. 49세에 이르러 지아비가 죽자 물과 음식을 조금도 먹지 않고, 동서들에게 “내 목숨이 박명한데, 지아비가 내 대신에 먼저 죽었다. 내 죄를 어찌 할 것인가?” 하고는 지아비를 따르려고 하였다. 그래서 염을 하는 저녁에 병풍 뒤로 들어가서 목을 메었으나, 집안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이때부터 집안 사람들이 보호, 감시를 하였는데, 하루 아침에는 일어나서 평상시의 아침같이 얼굴에 아무런 기색도 나타내지 않고 여상스럽게 말하며, 지키고 있던 여종을 밖으로 심부름을 보낸 후 출입문에 목 메달아 자결하였다. 지아비가 죽은 후 불과 13일 만이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이   씨 : 본관은 재령으로 충순위 이은보의 딸이며, 군자정 박응발(朴應發)의 처다. 지아비의 상을 당하여 예대로 복을 입었으며, 십년을 더하여 복을 입었다. 평생 동안 간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나라에서 쌀을 내리고 교서로써 그 정절을 칭찬하였으며, 세금을 면해주었다.

   신   씨 : 본관은 단양, 신두문(申斗文)의 딸로 수안인 김덕구(金德九)의 처다. 지아비가 죽자 나무와 돌로 스스로를 내리쳐 지아비를 따라 가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피부가 으깨어져 온전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성복 후 5일 만에 목숨을 끊으니, 향리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라에서 듣고 정려를 내렸다.

   신   씨 : 본관은 단양. 신연조(申延祚)의 딸로 수안인 김극화(金克華)의 처다. 지아비가 죽자 물과 음식을 먹지 않고 지아비를 따르고자 하여 목침으로 가슴을 내리 쳐 피를 수 되나 흘린 후에 결국 죽었다. 나라에서 이 일을 듣고 세금을 면제하여 주었다.

   남   씨 : 본관은 영양으로 아주(鵝州)인 신건모(申建模)의 처다. 지아비가 종형(從兄)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나, 시집에서 이를 밝히기 꺼려하자 남씨는 원한을 품은 채 통곡하며, 반드시 원한을 풀고자 맹서하고 영해부에 3번이나 읍소하였으며, 6번이나 영문을 열며 원통함을 풀어주길 요청하였다. 관에서 다시 조사하여 원수되는 자를 곤장 아래에 죽게 하여 지아비의 원통함을 풀었다. 원근에서 그 의로움과 정렬에 대하여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관찰사가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윤   씨 : 파평 윤항(尹恒)의 딸로 평산 신진형(申晉珩)의 처다. 그 지아비가 죽자 따라 죽기를 맹서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내가 참아 죽지 못하고 사는 것은 망인이 남긴 아이가 있는 고로 이 아이가 스스로 숟가락질을 할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자 함이다” 하였다.
아이가 점점 자라난 후, 어느날 집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보고는 온 몸을 깨끗이 하고, 새옷을 갈아입은 후, 지아비가 착용하던 물품을 모두 진열하여 놓고 그 옆에서 목을 메어 자결하였다. 듣는 이들 모두가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정려를 내려 주었다.

 

   장   씨 : 본관은 울진. 장민정(張敏政)의 딸로 안동인 권상함(權尙咸)의 처다. 지아비의 상을 당하여 슬픔이 넘친 가운데 죽기를 맹서하였다. 마침 독사 한마리가 장씨 가까이에 다가오메 물려 죽고자 하여 독사 앞에 발을 어른거렸으나 가까이 가도 꼼짝하지도 않고, 물지도 않았으며, 이튿날도 역시 그렇게 하였으나, 독사가 물지 않아 죽지 못하였다. 결국 복을 입으면서도 죽고자 하여 음식을 먹지 않으니, 얼음이 녹듯 불에 타 없어지듯 생명을 다하였다. 나라에서 듣고 그 집이 온전하도록 보호하여 주었다.

   이   씨 : 본관은 전의. 이겸익(李謙益)의 딸로 안동인 권호(權琥)의 처다. 지아비가 병이 나 장차 절명하려고 하자 손가락을 짤라 그 피로 수혈하여 소생케 하였으며, 지아비의 심한 창상에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옻나무 아래 약초가 있으니 그걸 발라라” 하길래 가서 보니 과연 그 약초가 있어 시키는 대로 환부에 발랐더니, 즉시에 그 창상이 나았다. 이웃에서는 신기한 이적이라 여겼다.

   박   씨 : 본관은 무안. 박심주(朴尋周)의 딸로 안동인 권석우(權錫禹)의 처다. 지아비가 전염병에 걸리자 자기가 대신할 것을 빌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목숨을 거두자 물과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머리도 빗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고, 만장 크기의 천에 지아비에 고하는 애절한 말을 쓰고는 졸곡 다음날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향리에서 상보(上報)하여 세금을 면제받았다.

   박일렬(朴一烈) : 사가(私家)의 노비였다. 18세에 김문재(金文在)에게 시집갔으나, 몇 달만에 문재가 죽자 5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성복 다음날 술과 떡을 해서 지아비의 묘에 가서 같이 가길 고하였다.
  이에 그 부모가 상복을 벗어버리고 새옷으로 갈아입기를 권하였으나, 주위에 말하길 “이 옷으로 염습하여 신랑 곁에 묻어주소” 하고는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이를 듣고 정려를 내렸다. 이때가 순조 25년(1845)이었다.

   김   씨 : 본관은 분성. 김홍석(金洪錫)의 딸로 파평인 윤경호(尹敬昊)의 처다. 부덕이 있었으며,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지아비가 죽자 맹서한대로 물가에 이르러 빠져 죽으니, 마른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쳤다. 사람들 모두가 하늘이 감동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유   씨 : 본관은 문화. 유종인(柳種仁)의 딸로 안동인 권조필(權照必)의 처다. 부덕이 있었으며, 20세에 권주필에 시집가서 성심성의껏 권조필을 받들었으며, 자식과 조카가 많은데다 가난하여 생일에 음식조차 나누어 먹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시부모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토지를 사서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니, 시부모가 기분이 좋아서, 그 연유를 묻길래 유씨는 “차라리 같이 굶을지언정 홀로 배부른 것은 참아 할 짓이 아니다.” 하였다.
  또한 시어머니의 병을 지극히 구완하였으며, 시아버지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을 하여 목숨을 연장시켰다. 이일로 사림에서 여러번에 관에 고하여 관에서 표창을 받았다.

   박   씨 : 밀양 박희동(朴希東)의 딸로 진주 강득호의 처다. 지아비가 악성 종기에 걸리자 이를 입으로 빨아내다가 마침내 그 독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김   씨 : 본관은 안동. 김성균의 딸로 경주인 김영락(金永洛)의 처다. 이십 이전에 시집가서 지아비가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였으나 결국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지아비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뱃속의 아기가 있어 죽지 못하였으며, 아기를 해산한 후에는 웃으며, “박명한 목숨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리오” 하니 시부모가 말하길 “처가 지아비를 따르는 것은 혹 있을 수 있으나, 그 불효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하였지만 마침내 피를 토하고 절명하였다.

   정   씨 : 본관은 연일로 수안 김한구(金漢九)의 처다. 지아비가 청년 죽음을 하자 아무런 슬픈 기척도 없이 시부모를 모셨다. 시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지아비의 당류(黨類)에 “내가 단지 세월을 지연시키며, 한 목숨 보존한 것은 시부모가 세상에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러한 섬김은 모두 끝났다. 내 어떤 날을 기다리랴, 고아가 되는 두 아들을 잘 부탁드리오, 지아비를 따라 가는 것은 내 일생의 맹서였소” 말하고는 마침내 목숨을 버렸다.
  영조 41년(1765)에 정려를 내렸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김   씨 : 김녕 김득정(金得禎)의 딸로 진주 강달해(姜達海)의 처다. 25세에 지아비가 병이 들자 지성으로 구완하였으나 불귀의 객이 되었는데, 장례일까지 슬프고 애통한 표정을 짓지 않더니, 그 장례일에 가서야 영구 앞에서 누워 뒹굴며 통곡하였다. 이후 수일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죽기를 바랐다. 결국 문득 붉은 기운이 방안을 감싸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영덕읍 화개리에 정려각이 있다.

 

   김   씨 : 김해 김상택(金相澤)의 딸로 경주 김도립(金道立)의 처다. 지아비가 병이 들어 점점 심하여지자 밤마다 하늘에 축원하니, 하늘에서 별똥과 같은 것이 떨어지는데, 그 형상이 마치 대추같았다. 이를 먹이니 병이 나았다. 그러나 1년 후에 다시 병이 나니 백약이 무효였다. 병이 위독하자 김씨 또한 기절을 하였는데, 반나절만에 소생을 하면서 “내가 어느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러, 시조부를 만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누가 빨리 가기를 재촉하기에 다시 깨어났다” 고 하였다. 이후에도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으며, 제사는 옛 법도에 준하여 시행하고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나물을 먹었으며, 집안을 보존하였다.

   김   씨 : 김해 김재희(金在熙) 딸로 안동 권중학(權重鶴)의 처다. 타고난 효성으로 지아비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구원하였으며, 지아비가 죽자 전력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지아비의 상을 당해서는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후에 곡기를 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효열로써 정부인에 증직되었다.

   조   씨 : 한양 조기주(趙基周)의 딸로 경주 김명근(金命根) 처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아비가 병이 나자 위로는 시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젖먹이를 돌보았으며, 몸소 시탕을 달였으나 병이 낫지 않자 조씨는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수혈하여 10일간을 더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조씨도 지아비를 따르려고 하자 시어머니가 “너가 만약 죽으면, 나는 어찌 살며, 저 어린 젖먹이는 누가 구휼하랴” 하니 조씨가 울면서 이 말을 따라 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젖먹이를 키워 집안을 보존하였다.

    김   씨 : 의성 김수권(金洙權)의 딸로 기계 유동주(兪東柱)의 처다. 지아비가 병이 든지 3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며, 하늘에 빌며 자기가 대신 아플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나 병이 위급하여지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을 하여 한달여 동안 목숨을 부지토록 하였으나, 결국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지아비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뱃속에 유복자가 있어 차마 죽지 못하고 기다리다 아이를 무사히 해산하고는 독을 먹고 자결하였다.

   김   씨 : 광산 김시현(金時鉉)의 딸로 밀양 박성달의 처다. 시부모를 극진히 섬겼다. 갑작스런 지아비의 죽음으로 몇 번이나 기절하였다가 소생하였다. 세 아들이 슬하에 있고 미성전이라 장례만 극진히 모시고 지아비를 따라가지 못하였으며, 3년 동안 빗질이나 잔치를 베풀지도 않았다. 집안을 지키며, 자식들을 가르침에 절도가 있었으니, 원근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여러 번의 표창을 받았으며, 지아비의 직을 따라 정부인을 증직받았다.

 

   고   씨 : 제주 고영술(高英述)의 딸로 김해 배상수(裵相壽)의 처다. 시아버지가 죽은 후, 3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평시와 같이 공양를 하였는데, 한번도 미리 맛보거나 지나친 적이 없었다. 또 시어머니가 늙은데다 앉은뱅이란 병에 걸렸지만, 투정을 부리지 않고 백가지 약을 구하여 써보는데, 안 써본 약이 없을 정도이다.
식량이 비록 모자라도 반드시 밥을 해서 드렸으며, 밤에 해소로 시어머니가 잠 못들면 끌어안고 자기도 하였으며, 여름에 그늘을 찾아 이웃에 가길 원하면 업고 가기도 하는 등 효성을 다하였다.

   박   씨 : 밀양 박언부(朴彦孚)의 딸로 수안 김재보(金在寶)의 처다. 지아비가 병으로 죽자 박씨도 기절하였으며, 죽음을 기하고 음식을 먹지 않으니, 이를 안 시부모가 박씨더러 만류하니 박씨는 시부모의 말을 따라 음식을 먹었다. 시부모는 박씨가 마음을 고쳐 잡은 줄 알고 감시를 소홀히 하였으며, 이 기회를 탄 박씨는 독을 먹고 자결하였다. 순영(巡營)에서 이를 듣고 영해부에 장례의 제수를 공급하도록 명하였다. 나라에 정려를 내렸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영조 5년(1729)의 일이다.

   이   씨 : 경주 이동환(李東煥)의 딸로 지아비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3일을 더 살게 하니, 향리의 모두가 감복을 하였다.

   윤   씨 : 파평 윤재은(尹在殷) 딸로 경주 김재욱(金在旭)의 처다. 지아비가 병이 나자 하늘에 대신하길 빌었으나, 구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수혈하여 10일간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지아비가 죽은 뒤에도 지아비 생시와 같이 시부모를 모셨으며, 자식들도 잘 가르쳐 가문의 이름을 높였다.

   이   씨 : 경주 이유용(李有容)의 딸로 안동 김경규(金慶圭)의 처다. 시아버지가 중풍이 들어 온갖 약을 다 써도 고치기 어렵자 제단을 세우고 하늘에 기도하니 많은 차도가 있었다. 시어머니가 뼈에 병이 들어 고치기 힘들자 또 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비니 수년간 아프던 것이 많은 차도가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업고 외출을 하기도 하고, 대소변을 손수 받아내는 등의 일을 아무런 불평없이 10년을 하였다.

   김   씨 : 본관은 영양으로 대흥 백승기(白承基)의 처다. 어릴 때는 손가락을 잘라 친정부모의 수명을 연장시켰고, 시집와서는 외지로 나가 30년이나 소식이 없는 지아비 대신에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최   씨 : 경주 최익주(崔益柱)의 딸로 밀양 박능하(朴能夏)의 처다. 시부모가 괴질이 창궐할 때 같이 돌아가매, 이웃에서 전염이 무서워 돌보지 않아도 지아비와 같이 장례를 무사히 치루었으며, 지아비가 병이 들자 하늘에 기도하여 대신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7일간이나 생명을 연장시켰다. 장례 후에는 3년 동안 간 베인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고기와 육류도 먹지 않았으며, 머리조차 빗지 아니 하였다.

   김   씨 : 본관은 분성으로 경주 최경직(崔擎稷)의 처다. 지아비가 죽자 머리와 의복 등을 그대로 하고 바깥 출입도 일절 하지 않았으며, 상을 마치자 지아비를 따라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정렬부인을 증직하였으며, 정려를 세웠다.

   이   씨 : 영천 이택수(李宅洙)의 딸로 김해 배상교(裵相敎)의 처다. 시집간 지 한달이 되기도 전에 지아비가 죽자 지아비를 따라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나이 많은 시부모가 항상 집에 있어 이루지 못하였다. 매일 묘에 가서 곡을 하니 3년 동안 치마자락에 묻은 흙과 움켜지고 뿌린 흙이 토성을 이룰 정도였다. 시동생의 아들 배선찬을 양자로 삼은 후에 “내 할 일은 끝났다”고 하고는 열흘간 곡기를 끊어 자결하였다. 경학원에서 표창이 있었다. 

   황   씨 : 평해 황종진(黃鍾振)의 딸로 박능석(朴能錫)의 처다. 지아비가 병이 들자 백가지 비방으로 간호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가끔씩 영험을 보았다. 향당에서 탄복하여 상을 주기도 하였다.

   함   씨 : 양근 함사홍(咸士洪)의 딸로 안동 권명훈(權明勳)의 처다. 지아비가 죽자 같이 죽기를 맹서하였지만 지아비의 후사가 없음에 참아 목숨을 버리지 못하였다. 지아비의 조카를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하였다. 30년을 수절과부로 있으며 가업을 보존하니 향리에서 칭찬이 있었다.

   김   씨 : 경주 김인팔(金麟八)의 딸로 파평 윤태로(尹泰老)의 처다. 지아비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자른 피로 3일간이나 생명을 연장시켰으며, 장례시에 지아비를 따르기를 말하고 조용히 목을 메어 지아비를 따르니, 향리와 도에서 표창이 있었다.

   박   씨 : 영해 박영대(朴英大)의 딸로 경주 김치범(金致範)의 처다. 시아버지의 5년 병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으며, 단을 세우고 매일 밤에 기도하였는데, 하루는 비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는데, 호랑이가 인도하여 보호해주었다. 상을 당해서는 극진한 예로 하였다. 증직으로 숙인이 되었다.

 

   정   씨 : 연일 정광필(鄭光弼)의 딸로 수안 김병호(金炳虎)의 처다. 일찍이 지아비가 죽자 상을 마친 후 6일간 곡기를 끊어 숨을 거두니 사림에서 칭송이 있었다.

   박   씨 : 밀양 박익래(朴翼來)의 딸로 영천 이시호(李時)의 처다. 품팔고 바느질하고, 베를 짜서 그 부친의 배움을 도왔으며, 그 지아비가 괴질에 걸리자 자기가 대신하도록 하늘에 기도드렸으나 종래에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 지아비를 따라 죽으려고 하니 늙은 시아버지, 어린 자식이 있어 차마 죽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린 자식도 박씨의 결의를 꺽지 못하여 지아비의 장례일에 지아비를 따라 목을 메어 절명하였다.

   김   씨 : 김해 김치연(金致演)의 딸로 밀양 박치한(朴致漢)의 처다. 18세에 박씨에게 시집을 갔는데, 몇 달이 안되어 지아비가 병이 들어 위급하자 하늘에 대신하길 빌었으나, 결국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지아비를 따르고자 하니, 시부모가 만류하여 이루지 못하였으며, 손수 재봉하여 지아비를 염습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조카를 후사로 삼아 의를 가르쳤으며, 시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넘쳐 뼈가 나올 정도로 수척해졌다. 향당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김   씨 : 경주 김익중(金益仲)의 딸로 진주 강우형의 처다. 시아버지의 병이 깊자 “시집 온지 얼마되지 않아 시아버지의 병이 이 정도가 되었으니, 이것은 내 죄로다.” 하고 밤에는 단을 세워 하늘에 빌고 낮에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머리를 잘라 팔고, 치마를 들어내어 팔아 시탕의 절도를 다하였으며, 닭과 삼을 삶아 먹이길 삼년을 하루같이 하여 마침내 병을 고쳤다.

   강   씨 : 진주 강근형(姜勤馨)의 딸로 분성 배은찬(裵殷燦)의 처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니, 가난한 형편에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거동도 하지 못하고, 수족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강씨는 이러한 시어머니를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10년 동안 모셨으니, 여러 번 포상을 받았다.

   이   씨 : 영천 이야의(李野議)의 딸로 파평 윤상오(尹相五)의 처다. 지아비가 병들자 대신하길 빌고 백약을 찾아 구완하였으나, 결국 불귀의 객이 되었다. 지아비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가족들이 말려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늙은 시부모를 효성스레 모셨다.

   이   씨 : 영천 이동락(李東洛)의 딸로 울진 임병찬(林炳贊)의 처다. 집이 가난하여 시부모를 모시고 10여년 동안 객지를 떠돌아 다녔는데, 시아버지 상을 당하여 객지에서 장례를 치루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30년 그 지아비가 임종을 하면서 “아버지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지 못함이 평생의 한이었다. 어찌 저승에 갈 낯이 있을건가” 하였다. 이씨는 부의 상복을 벗은 후, 300여리의 길을 발섭하여 시부모의 유골을 고향산천에다 묻었다. 이를 듣고 모두가 감복을 하였다고 한다.

 

   박   씨 : 밀양 박영수(朴英秀)의 딸로 영해 신복석(申福碩)의 처다. 14세에 시집을 가니 시어머니가 다년간 중풍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어머니를 모심에 지극정성으로 하여 향리에서 칭찬이 자자하였으며, 도와 군에서 여러 번의 포상이 있었다.

   김   씨 : 경주 김도건(金道建)의 딸로 김녕 김형학(金炯學)의 처다. 친정 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급하여 짐에 문병차 이르니 문득 운명하였다. 이에 창망 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니, 조금 후에 소생을 하여 “너가 왔구나” 하고 다시 절명하였다. 향리에서 모두가 이를 듣고 감복하였다고 한다.

   김   씨 : 이름은 경순(敬順)으로 월성 이상기(李相基)의 처다. 지아비가 죽자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가사를 부탁할 곳이 없어 원통함을 품고, 아픔을 참으며, 세상 일을 힘써 이루니 모두가 그 선함을 칭송하였다.

   이   씨 : 영천 이기호(李璣)의 딸로 경주 이중철(李仲哲)의 처다. 지아비가 죽어 선산에 묘를 섰는데, 장례를 금하는 자가 있어 묘를 파내어 지아비의 시신이 땅에 드러나게 됨에 이씨는 이를 수습하여 관가에 가서 그 원한을 설원하였다. 사람들 모두가 이를 듣고 정렬이라 칭송하였다.

   한   씨 : 본관은 안성으로 이홍석(李洪錫)의 처다. 지아비가 병들자 대신 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 지아비가 죽자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이것도 여의치 못하였다. 이후 온갖 고생을 하며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강   씨 : 본관은 김해로 김현택(金顯澤)의 처다. 18세에 시집을 갔으나 지아비가 병이 들자 3년을 하루같이 구완하였으며, 불귀의 객이 되자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시부모가 만류하여 여의치 못하였는데, 시부모가 죽자 7일 동안 먹지 않고, 3일 동안 피를 토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