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절 열 전(列傳)

   윤   긍(尹一兢) : 본관은 파평으로 초명은 흠(欽)이고, 호는 죽재(竹齋)이며, 부친은 우의정 윤사분(尹士昐)이다. 세종 29년(1447)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문종 1년(1450)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성종 20년(1489)에 헌납을 거쳐 이듬해에 이조정랑으로 전직하여 입궐하여 있을 적에 성종이 “내 집에 쥐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묻자, 다른 대신들은 대답을 못하는데, 그가 고양이를 키우면 쥐가 방자하게 다니지 못한다고 대답하니, 당장에 통정대부로 승계시키고 호조참의를 제수하고, 바로 이조참의를 주었다. 이때 정여창, 김굉필 등의 인재를 추천하였으며, 그 뒤 승지·관찰사·호조판서를 지내다가 노령으로 사직하고 영천 팔공산 아래에 집을 짓고 거처하였다. 점필재 김종직, 사가(四佳) 서거정, 추강(秋江) 남효온 등과 세교가 있었다. 영천 신원사에 배향되었다(영해).

 

    백민직(白民直) : 본관은 대흥으로 족한당 백인국의 종자(從子)이다. 기품과 도량이 헌출하였으며, 명성과 이익을 구하지 않고 항상 뜻을 맑게 가졌으며, 후진을 양성하는 것을 자기의 본분으로 알았다. 죽노 신활과 운악 이함, 집안의 형님인 백인경 등과 논의하여 단산서원을 창설하였다.

    김   적(金一迪) : 본관은 야성으로 통덕랑 김의령(金義齡)의 아들이다.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말미암아 연산군 4년(1498)에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양희로(梁希魯) : 호는 죽은 (竹隱)이고, 양준원(梁濬源)의 아들로 성균생원으로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다. 근황촌(近黃村)을 송천이라 고쳤으며, 조광조가 화를 입자 두문불출하여 종적을 감추었다(영해).

    남유의(南有義) : 본관은 영양으로 호는 회암(悔庵)이며, 전한 남세주의 아들이다. 국량과 기도가 남달랐으며,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세상을 구할 재목이라 하였으며, 우국지사적인 기질이 있어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읽을 때는 탄식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이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오랑케를 정벌할 기풍이 있다.”라고 하였다. 소위장군(昭威將軍)에 올랐다.

    양자검(梁子儉, 1524∼1640) : 본관은 제주로 이름을 양자민(梁子民)으로 고쳤다. 호는 송고(松皐)이며, 양희로의 아들이다. 하서 김인후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성에서부터 의주에까지 어가를 호종하며, 선조대왕을 가까이 모신 공으로 선조 37년(1604)에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고, 충근정량호성공신이라는 작호와 노비·전택을 하사 받았다. 거주지인 송천에 정자를 짓고 반구(反求)라 편액하였으며, 당대의 거유들과 교류하였다. 시호를 충효로 받았으며, 영해군(瀛海君)으로 봉해졌다.(영해)

    신귀년(申龜年)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풍계(楓溪)로 풍림 신규년의 동생이다. 나이 12살에 부모가 돌아가자 형을 따라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커서 효행으로 통훈대부 예빈시 첨정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신규년과 의병을 일으켜 위정에서 싸움을 벌였으나 형이 순절하는 것을 보고 같이 죽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종신토록 잔치와 주악에 참석치 않았다. 남원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였으며, 남강서원을 창립하여 일으켜, 성리학을 궁구하는 것이 자기가 행해야 하는 본분으로 알았으며, 세상에 행의가 뚜렷이 드러났다.

 

    안종지(安從智) : 본관은 죽산으로 호는 율산(栗山)이며, 죽성군(竹城君) 안원형(安元衡)의 후손이다. 기개와 도량이 당당하였으며, 일찍부터 글을 얻음과 아울러 강직하여 향리에서 중히 추대되었다. 선조대에 충순위 효력부위에 올랐다.

    백동열(白東說)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수일정(守一亭)이며, 부친은 봉사 백사언(白士彦)이다. 부친의 명으로 경서를 강마하였으며, 166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방을 걸기 전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급히 돌아와 다시 나가지 않았다. 은패(恩牌)를 받아 사람들이 과거장에서 이름을 불렀지만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의 영광을 보며 문득 눈물을 흘렸다. 정자를 짓고 한세상을 지냈다.(영해)

    신이상(申履常)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줄포(茁浦)이며, 신경제(申經濟)의 손자이다. 잠와 이명준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에 깊은 식견을 가졌다. 효종 1년(1650)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여론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는 소수(疏首) 백졸암(百拙庵) 유직(柳稷, 1602∼1662)과 800여명의 영남 유생이 서울에 올라가서 반대할 때 동참하였다. 이 때 유직은 성균관의 유적(儒籍)에서 삭제되고, 벌을 받았으며, 이와 같이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두문불출하며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유집이 있다.

    남상식(南尙) : 본관은 영양으로 덕성스럽고 순후하여 기품과 도량이 관대하고 컸다. 당(堂)내에 연꽃과 계수나무를 심어 가꾸며,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뜻을 높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두었다. 효성과 우애가 있어 당시의 사람들이 칭송하였으며, 수직으로 호군에 올랐다.

    양천의(梁千毅) : 초명은 점(漸)이고, 호는 우재(愚齋)이며, 양자민의 아들이다.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의 명으로 집안의 장정을 독려하여 양곡을 진주성의 학봉 김성일의 진영에 공급하였다.

    신준립(申俊立) : 본관은 평산으로 첨정 신만걸(申萬傑)의 손자이다. 당시 조정이 혼란하고 정치가 난조를 보이자 은거하고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수신제가를 힘써 하였으며, 가학(家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만년에 인량리에 집을 짓고 매일 선비들과 경서의 뜻을 강론하였다. 수직으로 가의대부 첨정을 받았다.(영해)

    양치성(梁致聖) : 초명은 개표(盖標)이며, 호는 취옹헌(醉翁軒)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랐으며, 효성이 있었다. 크면서 학문이 있어 명성이 높았다. 숙종 44년(1718)에 구성(龜城)의 수령으로 제수되었으며, 경종 1년(1721)에 화를 입어 졸하였다.

 

    권봉흥(權鳳興) :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강재(江齋)이고, 강파 권상임의 아들이다. 본시 고결한 성품으로 학문이 정밀함에 이르고 실천궁행하여 당시 향리의 석학들이 문하생으로 많이 배출되었다. 유고가 있다.(영해)

    남주만(南周萬) : 매월헌(梅月軒) 남필명(南弼明)의 손자로 풍채가 훌륭하였다. 문예를 일찍부터 이루어 과거 보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설령 과거장에 나가서도 합격을 하지 못하였지만, 비록 거장과 뛰어난 학자들도 그의 글에 움츠려 들었다. 일찍이 월성에서 시험칠 때, 거기에 있는 유력자 중에 꺼리는 자가 있어 합격이 되지 못하였다. 부윤이 그 재주와 그릇을 아까워하여 경주영에서 구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영일 현령 권욱(權郁)이 멀리서 보고, 돌아오는 길에 노자돈을 두둑히 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동에서 시행된 시험에는 합격하여 시험관이 외숙(外叔)에 알렸지만, 우연히 나쁜 병을 얻어 요절하니 24세였는데, 중부(仲父) 봉주공이 뢰문을 지어 말하길 “여러 고을의 관원이 모두 힘써 보내고, 벗들도 친척과 같이 슬퍼하도다.” 종형 진사 남휘만이 공을 제문하길 “그대는 선비의 업을 닦아 매일 천여 말씀을 낭송하고 학문을 배움에 힘을 다함도 겸했으니, 입으로 나오는 낭랑한 소리는 귀에 듣기 좋았네.” 또 말하길 “오음과 육률의 빼고 더함의 재능이 있었으며, 하도 낙서의 기수와 우수를 추구하지 않음이 없었네.” 종제 정언 남기만이 공을 제문하길 “방정한 얼굴에 큰 체구, 목소리는 큰 종과 같았고, 눈은 밝고 밝은 별과 같았네. 나이 겨우 약관에 죽었으나, 장자의 풍도가 있었네.”(영해)

    이홍혐(李弘) : 본관은 진성으로 직장 이윤지(李允智)의 아들이다. 가정의 교훈이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품성이 단아하고 유순하였다. 행적을 산림에 감추고 효성과 우애를 독실히 행하였으며, 아들인 이희온(李希)을 한계(閒溪) 남상소(南尙召)에게 보내어 가르침을 받게 하였다.(영해)

    권태령(權台齡) :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잉와(剩窩), 오봉 권책(權策)의 후예이다. 곤궁하더라도 뜻을 높이 가졌으며, 나이를 먹을수록 학문의 좋아함을 더했으며, 유고가 있다.(영해)

    신이식(申履) : 주부 신희(申禧)의 10세손이다. 외모가 단아하고 정결하였으며, 견해가 정박하였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지만, 예조에서 치르는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탄식하며 물러나 산림을 벗삼아 형과 동생으로써 마땅히 할 바를 해야 된다는 뜻을 취하여 의암(宜庵)이라는 편액을 문설주에 적고 자유로움을 즐겼다.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재관(李再) : 호군 이희석(李希晳)의 아들로 배움을 자기의 본분으로 삼았으며, 다듬고 꾸미는 것을 버리고, 가르치고 가르는데 방도를 가졌다. 두 아들에게 가정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이어받게 하니, 향리에서 좋은 일이라고 칭송하였다.(영해)

    신종망(申宗望) : 본관은 평산으로 판관 신철(申澈)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으며, 일찍부터 덕스런 기국이 있었다. 잠와 이명준의 문인으로 학문을 배움으로써 실천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산림에 은거하였다.

    신석보(申碩輔) : 본관은 평산으로 신종망의 아들이다. 고산 윤선도의 문인으로 외모가 헌출하였으며, 타고난 자질이 남달랐다. 고산 윤선도에게 배워서 학문의 요체를 안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이를 몸소 실천하여 세상에서 칭송을 들었다. 둘째 아들 신세구(申世矩)는 재예가 뛰어나 추암 김하구와 교류하며 남강서원에 모여 경서를 강론하였는데, 추암이 존경하는 친구로써 허교하였다.

    김시하(金時夏) : 호는 경와(敬窩)로 승지 김봉의 맏아들이다. 타고난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행의가 청렴하고 고결하였다. 가학을 이어 받아 문장을 일찍 이루었으며, 동생 김정하(金鼎夏)와 함께 서울의 번암 채제공에게 배웠는데, 채제공이 “남녁 고을의 일류 가는 인사”라고 하였다.
영조대에 영남유생들이 상소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흥해고을에 갇혔는데, 당시 흥해고을 수령인 권엄(權)이 한번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서로 시문을 주고 받았으며, 이로써 관대한 처벌을 받았다. 광릉참봉을 제수받았는데, 계성사(啓聖祠) 제사를 예를 다하여 모신 결과 가의대부에 특승되었다.

    권   헌(權一) :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오암(梧庵), 오월헌(梧月軒)으로 권재덕(權載德)의 손자이다. 학문에 깊이 힘써 그 깊은 뜻을 궁구하였으며, 성선설을 크게 풀어지었다. 은거하며 가르침을 펼쳐 한 시대의 명망있는 선비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유집이 있다.(영해)

 

    권성유(權聖兪) : 본관은 안동으로 오봉 권책의 후손이다. 영조대의 사람이다. 성품이 덕을 높이고, 순후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제사를 받드는 기본으로는 정결하고 조촐한 것으로 하였으며, 집안에 있고 없음을 계산하지 않았다. 평생 다른 사람의 과오를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자손의 교육에는 옳은 방도를 따르도록 하였다. 수직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영해)

    권도면(權度勉) : 본관은 안동으로 권도경(權道經)의 현손이다. 재주와 지혜가 출중하였으며, 학문에 힘써 자경잠과 독서요규(要規)를 지어 돌이켜 보는 바탕으로 하였으나, 불행히도 요절하여 선비들과 친구들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유집이 있다.(영해)

    김정하(金鼎夏) : 본관은 야성으로 호는 황산(黃山)이며, 김시하의 동생이다. 기품이 뛰어나고 호매하였으며, 문장이 일찍 성취함이 있었다. 영조 5년(1729)에 경의(經義)로써 향시에 수석으로 뽑혔으며, 이 해에 사마시에도 급제하였다. 영조대에 영남유생들의 상소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일찍이 족인 서포 김준택, 진사 남시택 등과 경주에 머물 때 경주 부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상주의 선비 노진구(盧晉龜) 등과 시문을 주고 받았으며, 벗들과 동료들로부터 중함을 받았다. 성균관에 있을 때 형과 같이 번암 채제공을 뵈었는데, 채제공이 참으로 남녁고을의 일류이다 라고 하였으며, 원릉참봉을 받았다.

    백시동(白始東) : 경신당(敬信堂) 백세경(白世經)의 5세손으로 웅지와 기품이 뛰어났으며, 착한 일과 옳은 일 하기를 즐겼다. 서책을 좋아하였으며 베풀기도 좋아하였다. 학술적인 것을 좋아하여 많은 선비들이 따랐으며 명망있는 선비들이 존경을 하였다. 오례합부 6권을 지었으며, 호는 우졸당(愚拙堂)이다.

    김만보(金萬寶) : 본관은 수안으로 호는 덕산(德山)이다. 김도상의 후손이다. 뜻을 독실하게 갖고 경전을 강마하였으며,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 덕산정을 지어 우아하게 평생을 보냈으며, 순조 6년(1806)에 농담(籠潭) 신창조와 본군의 읍지를 찬수하였다. 문집이 있다.

    신두경(申斗慶)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노암(蘆庵)으로 신지립(申智立)의 손자이다.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현감 김하구, 현감 박태두, 감찰 권대규, 현감 권만두, 조각(趙珏), 직강 박시태, 이달중, 생원 채구장, 남만조, 이보(李), 백시승, 유형상, 신덕하, 김용구, 신세용, 이세윤, 신덕관, 장시하(蔣時夏), 신세규, 권덕보, 신이량 등의 여러 선비들과 오십천 삼강(三江)에서 놀며 시회를 즐겼다. 뒤에 영덕현령 심사주와 김하구와 더불어 시회를 했으며, 또 삼강에 놀며 시를 지었는데, 청천 신유한이 서문을 썼다. 유고가 있다.

 

    신창조(申昌朝)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농담이다. 줄포 신이상의 5세손이다.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의 궁구에 깊은 뜻을 두었다. 관찰사가 여러 번 천거하였다. 용추 아래에 정자를 짓고 농담정이라 하였으며, 은일자적하며 한평생을 마쳤으며, 순조 6년(1806)에 영덕군의 읍지를 수찬하였다. 문집이 있다.

    권도원(權道源) :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오산재(梧山齋)로 권헌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구휼하였으며,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용천(龍泉) 백기동이 만사에 “겉과 속의 따뜻함이 마치 옥과 같으며, 현명하고 어리석음에 담담하여 기울지 아니하였으니, 참으로 기록할 만한 보배로다.” 하였다.(영해)

    신대중(申大重)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삼근당(三近堂)이며, 주부 신희의 후손이다. 호곡(壺谷) 유범휴(柳範休)의 문인이다. 타고난 성품이 온아하고 빼어났으며, 학문이 정치한데에 이르렀으며, 동생 신백중과 함께 책상을 연이어 공부를 하였다. 가난한 지경에 있더라도 안자(晏子)와 같이 하였으며, 비록 급한 일이 있더라도 문득 잠시라도 분노를 띠지 않았으며, 태만하지 않았다. 스승과 문인들은 우리 도의 한줄기가 영덕에 떨어졌다고 추켜 말하였다. 관찰사 신석우가 순방 중에 와서 예를 묻기도 하였으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말하길 “거동은 백이면 백가지도 알지 못하는 것 같고, 백이면 백가지가 능하지 못한 것 같아도 도에 가까우니, 우리들이 십년이나 노력해도 궁구하는 그 정성을 능히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유고가 있으며, 참판 이돈우가 쓴 비문이 있다.

    김종윤(金宗潤) : 본관은 야성으로 김시하의 손자이며, 호는 외천당(畏天堂)이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일을 처리함에 과감하였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후진을 양성하여, 문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역학에 밝아 역해요의(易解要義) 3책을 지었으며, 현령 윤홍규가 향음주례에 대하여 물었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을 받고, 후에 예조정랑에 증직되었다.

    배상필(裵尙必) : 만우(晩愚) 배윤현(裵潤賢)의 아들이다. 성균생원 배상기(裵尙己)의 동생으로 풍채가 있었으며, 뜻과 기개가 호방하였다. 영조대에 화를 입어 해주에 유배를 갔다가 돌아온 후에 세상일에 뜻을 접고 산수에 노는 것을 낙으로 삼고 한 세상을 마치었다.

    김종우(金宗禹) : 호는 감화당(甘華堂)으로 나면서부터 똑똑하였으며, 자라면서 학문에 힘써서 유학에 뛰어났다. 영리를 버리고, 산림에 묻혀 후진들을 교육하였으며, 일찍이 말하길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행하는 것이 어려우며, 말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아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다. 유고가 있다.

 

    신창환(申昌煥) : 성품이 덕이 있었으며, 견해가 정치한 데에 이르렀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경서를 안고 산림에 묻혀 지냈다. 사림의 촉망이 있었으며, 수직으로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을 받았다.

    최상현(崔相顯) : 의두재(倚斗齋) 최일관의 5세손이다. 풍채와 기도가 헌출하였으며, 덕행이 있었다. 과거에 나가 실패하자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수직으로 가선대부 부호군을 받았다.

    이상일(李祥馹) : 본관은 월성으로 호는 구포당(九苞堂)이고, 당곡(棠谷) 이수춘(李壽春)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남달랐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성리학을 깊이 궁구하여 문학과 행의가 세상에서 중히 여기는 바가 있었다. 유고가 있다.

    신진운(申晉運)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만오당(晩寤堂)이고, 주부 신희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도에 가까웠으며, 똑똑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변변하지 못한 곳에 있더라도 안자와 같이 행동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거친 밥을 먹고 제도대로 지켰으며, 돌과 같은 지조와 실천궁행하는 자세를 가졌다.
  좁은 방에 거쳐하며, 매일 책상에 앉아 힘써 공부하여 력율상수, 병서, 농서, 의서에 이르기까지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과거장에 나가 책문(策文)을 쓰는데, 일필휘지로 만언을 쓰니, 상사(上舍) 김진호(金鎭澔)가 말하길 “웅장, 건장하고, 넓고 넓으니, 막힘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박영찬(朴英燦) : 본관은 무안으로 학문이 뛰어나 “박학다식함이 무고에 창과 칼 등이 빽빽이 들어서듯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라 하였으며, 우일록, 군국록 등의 저작이 있다. 하늘과 사람의 성명(性命)의 이치와 치란의 흔적을 공부하였으며, 인물들의 행적을 살폈다. 문집이 있다.

    백태현(白兌見)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신암(愼庵)이고, 백원진(白源進)의 6세손이다. 기국과 도량이 컸으며, 의표가 준엄하고, 의연하였다. 과거공부에 힘쓰지 않고, 힘껏 학문을 닦아 글솜씨가 뛰어났다. 향당이나 종족간에 의론이 있으면, 정중히 바로잡아 결정하니,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중히 여겨졌다.

 

    문명기(文明琦: 1878∼?) : 본관은 남평으로 강성군(江城君) 문익점의 후손이다. 성품이 자애롭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영덕의 한지를 중국 요양 등지에다 운송하여 교역을 함으로써 한지 제조업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였으며, 의연금을 내어 광명산을 뚫어 길을 내어 다니는데 근심이 없게 하였다. 1920년의 대홍수 때에는 만주에서 좁쌀을 들여와서 염가로 판매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무상으로 주기도 하였다.
  1923년에는 강구에 배다리를 놓았으며, 청년회장을 맡아 융덕학원이 무너지려 하자 돈을 내어 수리를 하였다. 1927년 가뭄에는 오백금을 내어 각 동에다 주어 비를 빌게 하여 단비를 얻기도 하였으며, 이재민과 효자, 열녀 모범생도들에게도 의연금을 내어 도왔다. 1929년의 가뭄에도 만금을 내어 기우제 비용으로 쓰게 하였으며, 의성군의 가뭄과 우박 피해에도 오백금을 내어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1933년에도 천금을 내어 군내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다. 영덕의 인사들이 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또 재단법인 광제회(廣濟會)를 설립하였으며,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 때는 오천만금을 내어 비행기 2대를 구입하여 총독부에 헌납하였고, 국방회(國防會)를 조직하여 비행기 100대 헌납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향교의 직원(直員)과 일제하에서 관선 도의원을 하였다.
  유년시절 부친인 문승환을 따라 영덕읍에 정착한 후 이재에 능력을 발휘하여 1924년에 동해사업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하였으며, 1929년에는 영덕전기회사 취체역을 맡았으며, 이 해에 강구주조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1935년에는 포항소주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32년에는 지품면에 문명광산을 설립하는 등,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경북지방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하였는데, 1920년 초부터 경북도평의회 의원직을 여러 차례 지내기도 하였으며, 1935년에 은광을 처분한 12만원 중에 10만원으로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하였으며, 이 해 4월에 또 한 대의 비행기를 헌납하였다. 중일전쟁 및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1937년부터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하여 중국 전선을 누볐으며, 1938년 7월 의용단을 모집할 때도 앞장서서 수많은 청년들을 북중국 전쟁터로 몰아냈다.
  1941년에는 문명기일랑(文明埼一郞)으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이 해에 총독부 중추원 참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반민족처벌법에 의하여 1949년 1월 24일 영덕읍 남석리 자택에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서에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5월 24일 출소하였다.
  한편 문명기는 오십천 제방공사와 강구대교의 건설에도 상당할 정도의 기부를 하여, 지역민들에게는 돈많은 부자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으나, 일제 강점하의 대표적인 친일파로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