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 교 불교가 우리 지역에 언제 유입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불교가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공인되어 국가의 지배이념이 되었지만 그 전파는 눌지왕(417∼457)대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지역에서의 불교 전파도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인 눌지왕대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불교가 신라에 전파된 경로와 우리 지역과는 오랜 옛날부터 빈번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충분한 가능성이 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1)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법흥왕 14년(527)에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자 이는 곧 지배계층과 민중들 사이의 사상과 문화, 생활양식 등에서 영향력 있는 지배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어 이후 곳곳마다 사찰이 세워지고, 각종 불교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면서 백성들의 정신적, 현실적인 생활을 규정하면서 번창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이후에도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여 명실상부한 국가적인 종교가 되었다. |
(1) 유금사(有金寺) 유금사는 병곡면 금곡리 315번지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6년(637)에 자장법사(慈藏法師, 590∼658)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자장법사는 득도 후 636년부터 643년에 이르는 7년 동안 중국에 있었으므로 유금사의 창건은 자장이 중국에 가기전 수행을 위하여 심산유곡을 찾아다닐 때 창건한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대략 진평왕(579∼631) 말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당시에는 조그마한 암자 형태로 창건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2) 범흥사지(梵興寺址) 범흥사는 병곡면 영 1리 1134번지 일대에 있었던 사찰로 현재는 폐찰되어 일부 유적만 남아 있다. 사찰의 창건연대와 규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설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사찰이라고 한다. |
(3) 옥천사지(玉泉寺址) 옥천사는 영덕읍 구미리 뒤의 옥천산에 있던 사찰이다. 창건연대는 통일신라시대라고 하나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현재 사지(寺址)로 추정되는 곳에 기와조각이 산재하여 있으며, 사찰에 사용하였던 대형 맷돌이 밭둑에 뭍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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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수사지(慶壽寺址) 경수사는 일명 정수사(淨水寺)라고 하며, 영덕군 남정면 중화리 절골이라는 곳에 있었다. 통일신라 말엽인 경순왕 10년(927)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입증할 자료는 없다. 1998년 12월 31일 현재 사찰은 폐지되고 유지(遺址)만 남아있으며, 유지에는 기와조각과 사찰의 축대, 그리고 주춧돌의 일부가 남아 있다. (5) 청련사(靑蓮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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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련사는 달산면 덕산리 736번지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건물이 12동이나 되는 거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야성읍지」, 「경상북도영덕군읍지」 등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영영승람」의 사찰조에 “청련사는 대궐산에 있다(靑蓮寺在大闕山).”와 「교남지」에 “청련사는 덕산동 대궐산에 있다(靑蓮寺在德山洞大闕山).”는 기록만 보인다. (6) 칠성사지(七星寺址) 칠성사는 일명 묘장사(妙藏寺)라고 하며, 축산면 칠성리 627번지 일원에 위치하였던 사찰이었다. 창건연대나 그 규모에 대한 자료가 없어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사찰이 소재하였던 위치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건립된 대둔정사지(大遯精舍址)가 있는데, 이 정사의 앞에 세워진 유허비 전면에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재 1점이 발견되었던 것을 추정하여 그 창건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7) 하운사지(霞雲寺址) 현 지품면 용덕2리 절골이라는 곳에 위치하였던 사찰의 터로 사찰의 창건연대와 규모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통일신라 때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사찰이 있던 자리에서 맷돌,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2) 고려시대의 불교 (1) 위장사(葦長寺) 위장사는 일명 우장사라고 하기도 한다. 창수면 신기리의 용두산 정상의 우물 옆에 있었던 사찰이다. 건립연대와 건립규모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2) 장육사(莊陸寺) 장육사는 운서산(雲棲山) 자락인 창수면 갈천리 120번지에 위치해 있는 고찰(古刹)이다. 전하는 말에 고려 공민왕(1351∼1374) 때에 창수면 가산리 태생의 나옹화상(懶翁和尙)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세종 때에 운서산에 산불이 크게 나서 사찰이 소실되어 후에 중건하였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울진에서 영해로 넘어오던 왜적들에 의하여 폐찰되었던 것을 1900년에 다시 중수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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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대 이후 현대의 불교
조선시대의 억불승유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 불교의 쇠퇴를 가져왔지만,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오랜 기간 동안 민간의 일상생활과 정신세계에 뿌리 내려온 것으로 일반 백성들, 특히 부녀자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신봉되어 왔다. |
2. 유 교
1) 영덕의 유교의 자취
유교가 발생한 상고시대부터 중국과 접한 우리나라에 유교의 사상이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져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대개 삼국시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지역이 있는 신라의 유교는 내물왕을 거쳐 지증왕, 법흥왕에 이르기까지 시호를 사용하거나, 연호를 사용하거나, 건원칭호를 하면서 유교사상을 발전시켜 나왔으며,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설치하면서 유학이 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성덕왕 16년(717)에 김수중(金守中)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10철, 그리고 72제자도(弟子圖)를 가져옴에 따라 유교는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이 향교에 배향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의 유학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유교가 도입되면서 기존의 불교가 일반 백성들과 지배층의 정신적인 이념의 좌표로서 역할을 하였다면, 유교는 정치의 이념, 통치의 이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여 정치사상과 정치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신라에 이어 고려조에 들어와서도 유교는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그 중요성이 높아졌는데, 제4대 광종 때에는 후주(後周)의 쌍기(雙冀)의 자문을 받아 과거제도를 설치하여, 시(詩)·부(賦)·송(頌)·책(策)으로써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특히 명경과를 두어 주역·상서·모시·춘추로 시험을 보아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로써 고려의 유학이 발전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제6대 성종에 의한 전국 12목(牧)에 경학박사·의학박사의 배치와 제8대 현종의 설총과 최치원을 문묘에 종사하는 등의, 역대 왕들의 유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안향에 의한 송나라의 주자학 즉, 성리학의 도입은 고려 유학을 한차원 높게 발전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역동 우탁, 익제 이제현,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등에 의하여 학문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념으로까지 발전하여 그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학은 중앙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점차 학문과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갔는데, 현종 15년(1024)에 “각 주현 중에 천정(千丁) 이상되는 지방에는 해마다 3인의 선비를 뽑고, 오백정 이상은 2인, 그 이하의 주현은 1인의 선비를 뽑아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하여 합격자는 서울의 국자감에 보내어 학문을 닦게 하고, 국자감에서 다시 시험을 보아 합격자는 과거를 보게 하고, 불합격자는 고향으로 보내어 공부를 더하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방에도 상당한 수준의 유학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특히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 지역의 유학은 김택을 영해의 향교대현이라고 한다든지, 가정 이곡의 예주소학기에 “영해의 여러 유생들 중에 서울에 과거를 보려고 온 자를 만났다.”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정도의 유학이 발전하였으리라고 보여지는데, 우리 지역의 유학을 크게 진흥시킨 이는 역동 우탁을 들 수 있다. 우탁은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역학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127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부의 사록으로 부임하여 와서 창수면 인량리 일대에서 성행하던 팔령신(八鈴神)을 모시는 음사(淫祀)를 일소시키는 등, 지역민들에게 음사를 통하여 복을 빌기보다 수신제가에 의한 유교적인 자세가 행복을 가져다 주는 정도(正道)라는 것을 알리는 등 지역민들에게 유학의 보급에 앞장섰다.
이후 가정 이곡의 우거(寓居)와 그의 아들인 목은 이색, 담암 백문보, 정도전의 부친인 정운경의 영해에서의 수학, 양촌 권근의 적거(謫居) 등은 지역의 유학과 문풍(文風)을 진흥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와 더불어 충목왕 2년(1346)에 영해부의 장서기(掌書記) 이천년(李天年)에 의하여 세워진 영해향교는 지역 유학의 진흥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학이 정치이념이 됨에 따라 유학은 더 한층 발전하여, 철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제도와 정치사상, 그리고 민간의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많은 발전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역의 유학은 많은 발전을 하여 고려 때 창건된 영해향교와 조선 초에 세워진 영덕향교를 중심으로 유학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많은 학자와 관리들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시대 후기에는 수많은 서원이 창건되어 지역 유학의 본산지로 지역민들의 교화와 유학자들이 수기치인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2) 영덕의 향교 및 서원
(제6장 교육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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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는 1860년 4월 5일 천도(天道)의 진리를 크게 깨달은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하여 동학으로 창시(創始)되었다. 이후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하여 1905년 12월 1일에 천도교로 개칭되었으며, 경전으로는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그 종지(宗旨)는 “스스로 신령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울님을 자기 몸속에 모시고 있는 것과 같은 존재로 성품을 닦고, 자각함에 따라 곧 한울님이 된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당시 조선조 말기의 부패정치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를 기치로 내세우며 전도활동을 하였다.
우리 지역은 천도교가 창교됨과 동시에 전도된 것으로 보이며, 직천 및 창수 등지에서 입교자들이 많았으며, 그 중에 직천 출신인 강사원은 차도주에 임명되었으며,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의 천도교 성전(聖典)을 정리, 집필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1863년 7월에 영덕의 접주로는 오명철(吳明哲), 영해의 접주로는 박하선(朴夏善) 등을 임명할 정도로 천도교의 교세가 번성하였으며, 1871년 3월 11일(음력)에는 교조신원운동을 빌미로 소위 “신미아변(辛未衙變)”을 일으켜 당시의 영해부사 이정을 살해하는 등, 부정부패척결, 보국안민, 광제중생의 기치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사건 이후 군내의 천도교 신도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일제시대를 지내오다가 광복과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천도교 자체가 군내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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