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 교

   불교가 우리 지역에 언제 유입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불교가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공인되어 국가의 지배이념이 되었지만 그 전파는 눌지왕(417∼457)대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지역에서의 불교 전파도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인 눌지왕대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불교가 신라에 전파된 경로와 우리 지역과는 오랜 옛날부터 빈번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충분한 가능성이 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역 불교 유적의 대부분은 사찰과 사찰의 유지에 불과하며, 이들 유적들의 대부분도 초기불교 전파시대의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대 이후의 것이고, 이 또한 그 창건연대나 창건 당시의 규모를 정확히 알아 볼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이러한 유적들에 나타나는 양식과 유지의 규모에 따라 창건시기와 규모를 추정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하에 우리 지역의 불교유적을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현대로 크게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법흥왕 14년(527)에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자 이는 곧 지배계층과 민중들 사이의 사상과 문화, 생활양식 등에서 영향력 있는 지배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어 이후 곳곳마다 사찰이 세워지고, 각종 불교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면서 백성들의 정신적, 현실적인 생활을 규정하면서 번창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이후에도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여 명실상부한 국가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우리 지역에도 다수의 사찰이 건립되어 지역민들의 정신적인 평안과 새로운 문화적인 양식을 형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지역에 남아 있는 불교관련 자료는 대개 통일신라 이후의 것으로 군내 곳곳에 그 시대의 사찰유지가 남아 있으며, 현재도 그 시대에 건립된 사찰이 남아 있어 이 때의 불교 융성을 말하여 주고 있다. 다음은 이 시대 이후 우리 지역에 남아 있는 사찰과 사찰유적들이다.

 
 

(1) 유금사(有金寺)

유금사는 병곡면 금곡리 315번지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6년(637)에 자장법사(慈藏法師, 590∼658)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자장법사는 득도 후 636년부터 643년에 이르는 7년 동안 중국에 있었으므로 유금사의 창건은 자장이 중국에 가기전 수행을 위하여 심산유곡을 찾아다닐 때 창건한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대략 진평왕(579∼631) 말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당시에는 조그마한 암자 형태로 창건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 대웅전·종각·장화부인 신령각(莊華夫人神靈閣) 등을 갖추고 있으면서 수행하는 승려가 수십명이 될 정도로 대찰이었으나, 갑작스런 산사태로 거의 폐찰이 되었는데, 인조 5년(1627), 고종 2년(1865)에 다시 중창하였으며, 1974년에 대웅전 등의 일부 건물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찰 내에는 보물 제674호인 유금사 삼층석탑과 대웅전·신령각·기거채·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으며, 아미타불인 금불, 관세음보살인 석불, 대세지보살인 회불과 석가모니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다. 또한 보물 제674호인 유금사 삼층석탑은 원래 대웅전 앞에 위치해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 때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하며, 이건할 당시에 탑속에서 금불상이 발견되었으나, 현재 금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유금사는 일제시대인 1911년 조선총독부 사찰령에 의하여 전국의 사찰이 30본사와 말사로 구성될 때 장육사와 함께 영천 은해사의 말사로 소속되어 있었다. 현재는 불국사의 말사로 신도수 600여명에 이르는 대찰로 발전하였다.

(2) 범흥사지(梵興寺址)

범흥사는 병곡면 영 1리 1134번지 일대에 있었던 사찰로 현재는 폐찰되어 일부 유적만 남아 있다. 사찰의 창건연대와 규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설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사찰이라고 한다.
절의 폐찰연대는 대략 조선시대 중기 이후로 보인다. 이는 조선 태종 9년(1409)에 영해로 귀양 온 안노생(安魯生)의 “범흥사”라는 시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영해도호부의 “불우조(佛宇條)”에 범흥사는 “등운산에 있다(梵興寺在騰雲山)” 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이후에도 상당 기간 존속한 것으로 보이며, 1828년 경에 나온 「단양부지」의 불우조에 폐찰되고 유지만 있다고(梵興寺在府北騰雲山下只有遺址) 한 것을 보아 1530년 이후 1828년 이전에 폐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사찰터는 경작지로 변하여 거의 훼손된 상태이고, 4층 높이의 석탑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높이 1.2m, 기단부의 직경이 60㎝ 정도만 남아 있어 탑의 형상을 알아보기가 곤란하다.

 
 

보배로운 땅, 수양하는 도량을 찾았더니
불문(空門)이라 세상의 정은 멀어지는데
바위 문 사이로 붉은 수염, 흰발의 스님이 나와
무생(無生)의 도리를 설법하는구나
밤 깊어 바위틈의 샘소린 울려 펴지는데
종소리 염불소린, 새벽 찬 하늘을 쪼갠다.
못에 비친 그림자, 도에 든 이 마음, 모두 청정한데
결가부좌하고 선정에 든 몸, 형체조차 잊었구나
                                        (안노생의 “범흥사”)

(3) 옥천사지(玉泉寺址)

   옥천사는 영덕읍 구미리 뒤의 옥천산에 있던 사찰이다. 창건연대는 통일신라시대라고 하나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현재 사지(寺址)로 추정되는 곳에 기와조각이 산재하여 있으며, 사찰에 사용하였던 대형 맷돌이 밭둑에 뭍혀 있다.
   폐찰된 연대는 1705년경이라고 하나 1723년 이후에 나온 「야성읍지」에 “옥천사는 현의 북쪽 5리 화림산에 있다(玉泉寺在縣北五里花林山)”라는 기록과 송고 배진창(松皐 裵震昌, 1642∼1722)의 “옥천동야은공묘소심문시감음(玉泉洞野隱公墓所尋問時感吟)”이나 일야 배윤성(逸野 裵潤聖,1675∼1751)의 “여이정재성용종주쉬무첨유옥천사(與李靜齋聖龍從州無遊玉泉寺)”의 시를 보더라도 이 이후에도 옥천사가 상당기간 존속한 것으로 보이며, 1800년대 후반에 나오는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 “엄곡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찰되었다(玉泉寺在嚴谷山今廢)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푸른 산, 검은 일산(日傘) 받쳐 쓰고 드니
푸른 산은 전같이 그윽하지가 않네
더딘 행렬에 사또 또한 걸어가느니
조용히 앉은 부처도 시름겨워 하네
쓸쓸한 천년 사찰
반나절을 한가로이 놀았어도
지는 해, 흩어진 그림자
이별의 심사 더욱 더 쓸쓸해지네
                    (일야 배윤성의 시)

(4) 경수사지(慶壽寺址)

  경수사는 일명 정수사(淨水寺)라고 하며, 영덕군 남정면 중화리 절골이라는 곳에 있었다. 통일신라 말엽인 경순왕 10년(927)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입증할 자료는 없다. 1998년 12월 31일 현재 사찰은 폐지되고 유지(遺址)만 남아있으며, 유지에는 기와조각과 사찰의 축대, 그리고 주춧돌의 일부가 남아 있다.
   폐찰연대는 조선조 후기라고 추정된다. 1723년 이후에 간행된 「야성읍지」에 “정수사는 현의 남쪽 30리의 남역동에 있다(淨水寺在縣南三十里南驛洞)는 것과 1800년대 후반에 나온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 “정수사는 남역 북쪽 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찰되었다(淨水寺在於南驛北麓今廢).”라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으며, 1628년에 창건된 신안서원에 매년 백지 3속(束)과 훈장 별혜(別鞋) 1부(部), 서적과 기물을 상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안서원이 대원군에 의하여 훼철될 때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하는 말로는 정수사가 300여명의 수행승을 거둘 정도의 대사찰이었는데, 스님들의 조석공양을 위한 쌀을 씻는 뜨물이 절밑의 남역(남정리)에 까지 흘러내려 이 물을 먹은 역마들이 모두 죽게 되자 남역의 역졸들이 이 절을 불태워 파괴하였다고도 한다.

(5) 청련사(靑蓮寺)

  청련사는 달산면 덕산리 736번지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건물이 12동이나 되는 거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야성읍지」, 「경상북도영덕군읍지」 등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영영승람」의 사찰조에 “청련사는 대궐산에 있다(靑蓮寺在大闕山).”와 「교남지」에 “청련사는 덕산동 대궐산에 있다(靑蓮寺在德山洞大闕山).”는 기록만 보인다.
   일제시대에 청련사는 경주 기림사를 본사로 하는 기림사의 말사로 있었으며, 현재 신도수가 150여명에 이르는 사찰이다. 현재의 사찰은 1936년 7월 11일 대홍수로 22명의 승려가 매몰, 입적되면서 사찰의 전부가 파괴되었던 것을 1960년에 현 위치에 중건한 것이다.

(6) 칠성사지(七星寺址)

   칠성사는 일명 묘장사(妙藏寺)라고 하며, 축산면 칠성리 627번지 일원에 위치하였던 사찰이었다. 창건연대나 그 규모에 대한 자료가 없어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사찰이 소재하였던 위치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건립된 대둔정사지(大遯精舍址)가 있는데, 이 정사의 앞에 세워진 유허비 전면에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재 1점이 발견되었던 것을 추정하여 그 창건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일설에는 통일신라 말엽에 창건된 고찰로 승려들이 많았으나, 화재로 전부 소실되었다고 한다.

(7) 하운사지(霞雲寺址)

   현 지품면 용덕2리 절골이라는 곳에 위치하였던 사찰의 터로 사찰의 창건연대와 규모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통일신라 때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사찰이 있던 자리에서 맷돌,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2) 고려시대의 불교

(1) 위장사(葦長寺)

  위장사는 일명 우장사라고 하기도 한다. 창수면 신기리의 용두산 정상의 우물 옆에 있었던 사찰이다. 건립연대와 건립규모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종 7년(1407) 12월 조에 “천태종인 영해의 우장사를 그 고을의 복을 빌던 절간으로 쓰게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천태종이 유행한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영해도호부조에 의하면 “위장사는 부의 서쪽의 산에 있다. 우물이 있는데, 장마가 지거나 가물어도 물이 늘거나 줄지 않는다. 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가 물에 비치면 맑던 물이 흙탕물로 변하면서 말라버린다. (葦長寺在府西山有井水旱無增減不潔之人照影則淸水變爲泥色渴盡)”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해도호부 산천조에 “용두산(龍頭山)은 부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그 정상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말하길 처음에는 산 정상에 한 줄기 갈대가 있어 하늘에 닿고 있었는데, 그 땅에 우물을 파니 물이 아주 맑고 시원하였다고 하며, 사악한 이가 그 우물에 비치면 물색이 변하여 흙색이 되었다.(俗傳初山頂有一葦長至天乃鑿井其地水甚淸澈邪人照之則變爲泥色)”고 하였다.
   폐찰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불우조에 “위장사는 용두산 우물가에 있다.”(葦長寺在龍頭山井水之傍)는 기록과 1828년경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부지」에 위장사가 현존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1899년에 발간된 「경상북도영해군읍지」에 위장사란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그 이후에 나온 「영영승람」이나 「교남지」에는 모두 폐찰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위장사의 폐찰연대는 1828과 1899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조성되어 위장사에 봉안되어 있던 보물 제993호인 건칠좌불상은 현재 장육사에 봉안되어 있어 조선시대 전기의 건칠좌불상과 불상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2) 장육사(莊陸寺)

  장육사는 운서산(雲棲山) 자락인 창수면 갈천리 120번지에 위치해 있는 고찰(古刹)이다. 전하는 말에 고려 공민왕(1351∼1374) 때에 창수면 가산리 태생의 나옹화상(懶翁和尙)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세종 때에 운서산에 산불이 크게 나서 사찰이 소실되어 후에 중건하였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울진에서 영해로 넘어오던 왜적들에 의하여 폐찰되었던 것을 1900년에 다시 중수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末寺)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과 정면 5칸과 측면 2칸의 맛배지붕인 범종루, 화운각, 산령각, 홍련암, 요사채 2동, 흥원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웅전 내에는 석거여래좌상과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벽에는 빼어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3) 망곡사(網谷寺)

망곡사는 병곡면 금곡리의 칠보산 산자락에 있었던 사찰로 금곡리 뒤산 능선을 중심으로 상편과 하편 두 곳에 대사찰과 소사찰이란 이름의 큰사찰이었다고 한다. 창건연대는 고려 중엽이라고 하나, 명확한 자료는 없으며, 폐찰연대도 현재 알 수 없다.

(4) 나옹화상(懶翁和尙)

선각(禪覺) 나옹화상의 이름은 혜근(慧勤)이다. 어릴 때 이름은 원혜(元惠)이고, 속성(俗姓)은 아(牙)씨이다. 부친은 선관서령(膳官署令)을 한 아서구(牙瑞具)이며, 모친은 영산군(창녕) 사람인 정씨 이다.
선사는 충숙왕 7년(1320) 1월 15일(음력)에 오늘의 창수면 가산리 불암골에서 출생하였다. 일설에는 창수면 가산리 까치소에서 출생하였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나옹은 그의 법호이며, 선각은 공민왕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선사는 스무살이 가까운 어느날 다정한 친구의 죽음을 보고 생과 사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산천을 주유하며 수행하다 현재의 문경시에 소재하고 있는 사불산 묘적암의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로 가서 출가하였다. 이후 선사는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용맹정진을 하다가 충목왕 3년(1347) 원나라로 구도의 유학을 떠났다.
원나라에서 선명을 떨치고 있던 인도승(印度僧) 지공화상을 만나 불법의 새로운 시야를 눈뜨게 되었으며, 10여년간 원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이름난 선사들과 선문답을 나누면서 거침없는 선지식으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원나라에서 고려인으로서, 영해인으로서 당당하게 선풍(禪風)을 날렸다.
공민왕 7년(1358)에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전국 각처에 불법을 펼치려고 주유하였으며, 공민왕 19년(1370)에는 선교 양종의 신자 및 승려들을 모아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이듬해 공민왕으로부터 왕사대조계종사선교도청섭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勤修本智中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후 송광사와 신광사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양주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일으키는 등 불법의 중흥에 진력을 하였다.
우왕 2년(1376) 5월 15일에 여주 신륵사에서 조용히 열반하니, 구도를 위하여 출가한지 37년 되는 해였다. 나옹화상의 가르침은 조선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를 통하여 개국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 졌으며, 나옹화상이 행하던 불교의 의식과 선지식은 오늘날의 유명사찰에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지공, 무학과 더불어 삼대화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나옹화상은 어려운 불법을 뛰어난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중생의 제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그가 읊은 게송은 「나옹집」에 300여 수가 실려있어 후대의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다주고 있다.
   현재의 창수면 가산리 일대는 나옹화상과 관련된 많은 전설과 설화들이 구전되어 오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까치소”와 “반송정”, “장육사 창건” 전설은 유명하다.

3) 조선시대의 불교

  불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표면적으로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는 조선의 정치이념이 유교로 바뀜에 따라 강력한 억불숭유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현종은 양민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영조는 승려들의 도성출입 자체를 금지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점차 산곡간으로 들어갔으며, 그 믿음의 층도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변화되어 갔다. 다음은 각종 기록을 통하여 조선시대 지역의 불교사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찰 중에는 신라나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도 있으나, 조선시대에 존속한 것은 전부 포함을 하여 기록하였다.
   아래의 표〈7-6〉 중의 개인사(開印寺)와 사자암(獅子庵)은 1628년에 창건된 신안서원에 백지 3속과 장지 2장을 상납하였다고 하며, 청련암(靑蓮寺)도 역시 춘추향사 때 도벽지(塗壁紙) 9속, 춘하추동 삭망시(朔望時)에 별혜 20부와 백지 4속을 상납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신안서원이 건되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될 때까지 이들 사찰도 존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표〈7-7〉은 조선시대 영해부에 있었던 사찰들이다.

 
 
 
 
4) 근대 이후 현대의 불교

  조선시대의 억불승유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 불교의 쇠퇴를 가져왔지만,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오랜 기간 동안 민간의 일상생활과 정신세계에 뿌리 내려온 것으로 일반 백성들, 특히 부녀자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신봉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의 최대 위기는 조선이 일제의 강점에 의하여 병탄된 1910년도 이후라 하겠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자 조선인의 독립의지와 굳건한 문화적 정신세계를 깨고자 하여 먼저 불교에 대한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11년 6월 조선총독부 사찰령을 발동하여 전국의 사찰을 30본사로 나누고는 그 밑에 각 말사를 두도록 하여 조선총독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우리 지역의 사찰들은 총독부 사찰령에 따라 30본산의 하나인 영천 은해사를 본사로 하여 유금사와 장육사가 그 말사로 소속되었으며, 경주 기림사를 본사로 하여서는 달산의 청련사가 소속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불교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여 한국불교 조계종으로 명칭을 고치고 새로운 출발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99년 12월 31일 현재 군내에는 조계종 23개소, 법화종 9개소, 태고종 3개소, 천태종 1개소, 미륵종 1개소, 원효종 1개소의 사찰이 있어 지역 군민들의 삶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다음의 표〈7-8〉는 1999년 12월 31일 현재 군내에 있는 각 종파의 각 사찰 현황이다.

 
 
 

2. 유 교

1) 영덕의 유교의 자취

  유교가 발생한 상고시대부터 중국과 접한 우리나라에 유교의 사상이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져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대개 삼국시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지역이 있는 신라의 유교는 내물왕을 거쳐 지증왕, 법흥왕에 이르기까지 시호를 사용하거나, 연호를 사용하거나, 건원칭호를 하면서 유교사상을 발전시켜 나왔으며,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설치하면서 유학이 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성덕왕 16년(717)에 김수중(金守中)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10철, 그리고 72제자도(弟子圖)를 가져옴에 따라 유교는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이 향교에 배향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의 유학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유교가 도입되면서 기존의 불교가 일반 백성들과 지배층의 정신적인 이념의 좌표로서 역할을 하였다면, 유교는 정치의 이념, 통치의 이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여 정치사상과 정치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신라에 이어 고려조에 들어와서도 유교는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그 중요성이 높아졌는데, 제4대 광종 때에는 후주(後周)의 쌍기(雙冀)의 자문을 받아 과거제도를 설치하여, 시(詩)·부(賦)·송(頌)·책(策)으로써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특히 명경과를 두어 주역·상서·모시·춘추로 시험을 보아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로써 고려의 유학이 발전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제6대 성종에 의한 전국 12목(牧)에 경학박사·의학박사의 배치와 제8대 현종의 설총과 최치원을 문묘에 종사하는 등의, 역대 왕들의 유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안향에 의한 송나라의 주자학 즉, 성리학의 도입은 고려 유학을 한차원 높게 발전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역동 우탁, 익제 이제현,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등에 의하여 학문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념으로까지 발전하여 그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학은 중앙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점차 학문과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갔는데, 현종 15년(1024)에 “각 주현 중에 천정(千丁) 이상되는 지방에는 해마다 3인의 선비를 뽑고, 오백정 이상은 2인, 그 이하의 주현은 1인의 선비를 뽑아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하여 합격자는 서울의 국자감에 보내어 학문을 닦게 하고, 국자감에서 다시 시험을 보아 합격자는 과거를 보게 하고, 불합격자는 고향으로 보내어 공부를 더하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방에도 상당한 수준의 유학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특히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 지역의 유학은 김택을 영해의 향교대현이라고 한다든지, 가정 이곡의 예주소학기에 “영해의 여러 유생들 중에 서울에 과거를 보려고 온 자를 만났다.”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정도의 유학이 발전하였으리라고 보여지는데, 우리 지역의 유학을 크게 진흥시킨 이는 역동 우탁을 들 수 있다. 우탁은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역학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127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부의 사록으로 부임하여 와서 창수면 인량리 일대에서 성행하던 팔령신(八鈴神)을 모시는 음사(淫祀)를 일소시키는 등, 지역민들에게 음사를 통하여 복을 빌기보다 수신제가에 의한 유교적인 자세가 행복을 가져다 주는 정도(正道)라는 것을 알리는 등 지역민들에게 유학의 보급에 앞장섰다.
   이후 가정 이곡의 우거(寓居)와 그의 아들인 목은 이색, 담암 백문보, 정도전의 부친인 정운경의 영해에서의 수학, 양촌 권근의 적거(謫居) 등은 지역의 유학과 문풍(文風)을 진흥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와 더불어 충목왕 2년(1346)에 영해부의 장서기(掌書記) 이천년(李天年)에 의하여 세워진 영해향교는 지역 유학의 진흥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학이 정치이념이 됨에 따라 유학은 더 한층 발전하여, 철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제도와 정치사상, 그리고 민간의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많은 발전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역의 유학은 많은 발전을 하여 고려 때 창건된 영해향교와 조선 초에 세워진 영덕향교를 중심으로 유학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서 많은 학자와 관리들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시대 후기에는 수많은 서원이 창건되어 지역 유학의 본산지로 지역민들의 교화와 유학자들이 수기치인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2) 영덕의 향교 및 서원

(제6장 교육편 참조)

3. 개신교 및 천주교

1) 천주교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함께 들어온 스페인 예수회 소속의 세스페데스에 의하여 전파되었다. 세스페데스는 왜군 신도들을 위하여 1593년 말에 부산 부근의 왜군진영에 합류하여 전도를 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이고 침략자인 왜군을 위하여 전도하는 이유로 조선 민중에로의 전도는 불가능하였던 것으로 판된된다. 이후 조선으로의 본격적인 전도는 중국에 사신으로 왕래하는 이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홍유한(洪儒漢),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이벽(李蘗), 이승훈(李承薰) 등에 의하여 주어사(走魚寺),천진암(天眞庵) 등에서 강학회를 열고 서학을 논하는 등 천주교의 싹이 뿌려지기 시작하였다.
   영덕의 천주교는 1947년 영해면 성내리에서 영해천주교회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전도가 되었으며, 1962년 4월에는 대구교구 포항본당 영덕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초대 신부로 도광주(都光周: 요한) 신부를 임명하여 영덕천주교회라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영덕읍 덕곡리 263-4번지 일대의 부지를 구입하여 1964년에 본당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은 군내의 천주교회의 현황이다.

 

2) 기독교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프로테스탄티즘을 말하며, 이를 통털어 개신교라 한다. 이러한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은 1884년 9월 22일 미국의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인 알렌(ALLEN,H.N.)에 의해서다. 그 후 언더우드(UNDERWOOD,H.G.), 아펜젤러(APPENZELLER,H.G.) 등에 의하여 확고한 전도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우리 지역에서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상당히 빠른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혁동(金赫東)을 설립자로 한 낙평교회(洛坪敎會)가 1901년에 지품면 낙평리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교회가 설립되기 전 훨씬 전부터 기독교가 전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영덕읍 화천리의 화천교회가 김용규(金溶奎)에 의해 1903년에, 영덕읍교회가 강우근(姜佑根)에 의해 1908년에 세워지는 등, 1900년대 초부터 점차 기독교가 지역에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기독교 전파를 위하여 활동을 한 인사로는 김영옥(金泳玉), 주재면(朱載冕), 김세영(金世榮), 김우일(金禹一), 허도(許道), 강우근, 정규하(丁奎河), 노계식(盧啓植) 등이었다.
   1999년 12월 31일 현재 군내에는 예수교장로회 통합, 합동측과 성결교, 침례교, 안식교 등의 다수의 교파들이 전도와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현재는 70여개의 교회가 있다. 다음은 현재 군내에 산재하여 있는 교회의 명단이다.

 
 

3) 구세군

  구세군은 1865년 월리암 부스(WILLIAM BOOTH)에 의하여 영국 런던에서 창립된 기독교의 일파(一派)로 초기에는 기독교 전도회라고 칭하였으나, 1878년에 구세군으로 개칭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908년 10월 8일 영국인 허가드(HOGGART,R.)에 의하여 전파되었으며, 현재 구세군의 지방조직은 서울, 남서울, 충서, 충청,경북, 경남 등의 7개 지방에 200개의 군영이 있으며, 지방장관은 본영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그리고 구세군 사관을 양성하기 위한 구세군 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구세군이 영덕에 전래된 것은 1910년 3월 15일 지품면 낙평리의 참봉이던 최봉희(崔鳳熙)가 서울에서 구세군 사령관 일행을 초청하여 최씨의 사랑채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이후 영덕에 도본영(道本營)이 주재할 정도로 번창하여 군내에 19개의 영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6개의 영문만이 남아 복음을 전하고 있다.
   다음은 1999년 12월 31일 현재 군내의 구세군 영문의 명단이다.

 
 

4. 천도교

  천도교는 1860년 4월 5일 천도(天道)의 진리를 크게 깨달은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하여 동학으로 창시(創始)되었다. 이후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하여 1905년 12월 1일에 천도교로 개칭되었으며, 경전으로는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그 종지(宗旨)는 “스스로 신령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울님을 자기 몸속에 모시고 있는 것과 같은 존재로 성품을 닦고, 자각함에 따라 곧 한울님이 된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당시 조선조 말기의 부패정치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를 기치로 내세우며 전도활동을 하였다.
   우리 지역은 천도교가 창교됨과 동시에 전도된 것으로 보이며, 직천 및 창수 등지에서 입교자들이 많았으며, 그 중에 직천 출신인 강사원은 차도주에 임명되었으며,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의 천도교 성전(聖典)을 정리, 집필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1863년 7월에 영덕의 접주로는 오명철(吳明哲), 영해의 접주로는 박하선(朴夏善) 등을 임명할 정도로 천도교의 교세가 번성하였으며, 1871년 3월 11일(음력)에는 교조신원운동을 빌미로 소위 “신미아변(辛未衙變)”을 일으켜 당시의 영해부사 이정을 살해하는 등, 부정부패척결, 보국안민, 광제중생의 기치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사건 이후 군내의 천도교 신도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일제시대를 지내오다가 광복과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천도교 자체가 군내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5. 원불교

  원불교는 1891년 전라도 영광에서 태어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1916년 4월 28일 크게 깨달음을 얻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정하고 미신타파, 문맹퇴치, 저축조합운동 등을 하면서 일제 강점하에서의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떨어진 인륜도덕을 세우고자 하였다.
   영덕의 원불교는 1998년 3월 19일 영덕읍 남석 3리 66-23번지에서 교무 심성전에 의해 첫법회를 가졌으며, 이어서 이해 5월 21일에는 신도 및 일반 하객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불식을 거행하며, 원불교가 창교된지 80여년 만에 영덕에 원불교가 서게 되었다.
   현재 2대 교무로는 최공원 교무가 시무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