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절 병곡면(柄谷面)

▒ 삼읍리(三邑里)

  삼읍리 동명의 유래는 옛 울진, 평해, 영해 삼읍(三邑)의 경계가 되므로 삼고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삼가을, 산가을, 삼개울(三溪) 또는 삼읍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등운산(騰雲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17세기인 광해군(光海君) 연간에 평해군수(平海郡守)로 있던 윤한보(尹漢輔)가 경기도 파주에서 그의 선조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移葬)하여 마을 2Km 지점인 깨밭(荏田)에 안장(安葬)하고, 퇴직 후 이 마을에 우거(寓居)하면서 영양(英陽), 평해(平海), 영해 세 고을의 경계가 된다 하여 삼읍이라 했다 하며, 그 뒤 17세기 후기 권도인(權道寅)이란 분이 입주하여 세 고을로 흐르는 물의 원천이 된다 하여 삼계(三溪, 삼개울)라 했다 한다. 또 17세기말인 1690년경에 노은(魯隱) 김명남(金命南)이라는 분이 입주하여 샘터를 발견하고 동명을 명곡(椧谷;홈내미)이라 했다 하며, 그 뒤 그의 후손 김복만(金福滿)이라는 분이 1730년경에 동구 암석에 서남대(西南臺) 금능동(金陵洞)이라 새기고 홈내미라 불러 왔다고 한다.

 

 
홈내미(홈니미) :
삼읍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김씨가 이룩했다 함.

         

▒ 금곡리(金谷里)

  금곡리 동명의 유래는 후릿그물로 고기를 잡던 곳이라 하여 그무실 또는 망곡(網谷), 금곡이라 하였다.
  금곡1리는 15세기 전기인 태종(太宗) 연간(1410년경)에 윤판공(尹判公)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어선이 어망(漁網)을 실은 형국이라 하여 망곡(網谷, 그무실)이라 하였으며, 15세기 중기인 세조(世租)가 등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피신한 김한중(金漢重)이라는 분이 우거(寓居) 하였는데, 그 자손이 번성하여 김씨 성을 따서 금곡이라 했다는 말도 있고 또 유금천(有金川)이 마을을 지나는데 이 개울에서 사금(沙金)이 난다 하여 금곡이라 했다는 말도 있다.
  금곡2리인 지경(地境) 마을은 15세기초(1400년경)에 안씨(安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그 뒤 이씨(李氏)가 입주하여 영해와 평해의 경계가 되므로 지경이라 하였다.
  금곡3리인 유금(有金) 마을은 6세기경 금(金)이 발견되었다 하여 유금이라 했다 하며, 신라의 고승(高僧)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이 마을에 유금사(有金寺)를 창건하였으며, 그 뒤 18세기에 김영진(金榮珍)이라는 분이 이곳에 꿩이 많다 하여 아치곡(雅雉谷)이라 했다 한다. 18세기 이전에는 백석동(白石洞)에 속하여 백륙동(白陸洞)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북이면(北二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경동과 백륙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금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금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금곡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칠보산, 남은 백석리, 북은 삼읍리가 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금곡1리(金谷), 2리(地境), 3리(有金)로 분동되어 있다.

 
 
아릿모치 :
금곡 동남쪽 아래에 있는 마을임.
 
아치골(雅雉谷) :
금곡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꿩이 많다 함.
 
양지모치 :
금곡 북쪽 양지바른 쪽에 있음.
 
용바우구석 :
용바우 옆에 있는 마을임.
 
유금(有金) :
아치골 서쪽에 유금사가 있는 마을임.
 
음지모치 :
금곡 남쪽 음지에 있는 마을임.
 
종지뱅이(宗地方,鍾地方,宗地邊) :
금곡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
 
지경(地境) :
금곡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울진과 군계(郡界)가 되는 마을임.

 

▒ 백석리(白石里)

  백석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북쪽에 흰빛의 큰 돌이 있으므로 흰돌, 힌둘 또는 백석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옛날 백륙(白陸) 또는 백진(白津)으로 알려진 마을로, 작은 항구로 형성된 마을이 되어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성종(成宗) 10년(1479) 석주(石珠) 안이현(安履鉉)이 방어진을 구축하고 왜구를 물리쳤다고 하며, 그 뒤 16세기초에 장택곤(張澤坤), 맹문호(孟文浩)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딸린 백석부곡(白石部曲)이었는데, 북이면(北二面)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병륙동, 백륙동, 백진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백석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백석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백석1,2리로 분동되어 있다.
  백석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영리, 남은 병곡리, 북은 금곡리가 있다.

 
 
백륙동 :
백석리에 있는 마을임.
 
새전(射亭洞) :
백석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군사훈련을 했다 함.

         

▒ 병곡리(柄谷里)

  병곡리 동명의 유래는 지형이 자리(자루)와 같이 되었으므로 자리실, 자래실, 또는 병곡, 옛날 포성성터가 있어 포성(浦城)이라고도 하였다.
  이 마을은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으나 안씨(安氏), 김씨(金氏)성을 가진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병곡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16세기 중기(1550년경)인 명종(明宗) 연간에 당시 영해부사(寧海府使) 장응두(張應斗)가 명명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북이면(北二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병륙(柄陸), 병진(柄津)을 병합하여 병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병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병곡1,2리로 분동되어 있다.
  병곡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영리, 남은 거무역리, 북은 백석리와 연해 있다.    

 

 
구렁모태 :
병곡 북쪽 구릉진 곳에 있는 마을임.
 
두둘마 :
종다리끝 가운데 둔덕에 있는 마을임.
 
용머리 :
용머리 바위가 있는 마을임.
 
종달리(종다리끝) :
자라실 동쪽에 있는 마을임.

         

▒ 영 리(榮里)

  영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지형이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즉, 연화부수형국(蓮花浮水形局)으로 되었다 하여 연골 또는 연동(蓮洞)이라 하다가 영동으로 고쳤다고 한다.
  영1,2리인 연골, 범흥(梵興) 마을은 12,13세기경인 고려(高麗)시대에 원씨(元氏)가 살았다고 하며, 그 뒤 수안김씨(遂安金氏)의 김대수(金大修)라는 분과 춘천박씨(春川朴氏)가 들어와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많으므로 연곡(蓮谷 : 연골)이라 했다 한다.
  영3리인 보곡(保谷) 마을은 15세기인 나씨(羅氏)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동구(洞口)에 각(閣)을 지어 미륵불(彌勒佛)이라 하였으므로 미륵골(彌勒谷)로 불렀다 하며, 영4리인 썩은바우(朽岩) 마을은 17세기 후기에 김해배씨(金海裵氏) 배학수(裵學修)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북이면(北二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영상동, 영하동, 보곡동, 백륙동, 백진동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영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영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영1,2,3,4리로 분동되어 있다.
  영리의 위치는 동은 병곡리, 서는 칠보산, 남은 아곡리, 북은 금곡리가 있다.

 
 
교회모태 :
주막거리 남쪽에 천주교회당이 있는 마을임.
 
백록동(白鹿洞) :
연동 서북에 있는 마을임.(현 폐동되었음)
 
범흥(凡興) :
연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임.
 
부엉바우 :
부엉바우가 있는 마을임.
 
썩은 바우마을(휴암동,朽岩) :
연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썩은 바위가 있음.
 
아릿마(하영, 하련, 아릿연골) :
연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아릿모태 :
휴암 아래에 있는 마을임.
 
영동-보곡(미칫골, 미륵집골) :
연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미륵당이 있음.
 
웃말(上榮, 上蓮, 웃연골) :
연골 북쪽 위에 있는 마을임.
 
주막거리 :
썩은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주막이 있었음.
 
중간마 :
부엉바우와 아릿마 사이에 있는 마을임.

 

▒ 거무역리(居無役里)

  거무역리 동명의 유래는 13세기 중기인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 안렴사(按廉사) 박세통(朴世通)이 지방을 순시 중 이 마을에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큰 거북이 한 마리를 잡아놓고 매질도 하고 온갖 희롱을 하여 거북이가 곧 죽을 것 같았다. 안렴사가 살펴보니 거북이 등에 임금 「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안렴사는 후한 재물을 주고 거북을 사서 바다로 보내 주었는데, 거북은 몇 차례 뒤돌아보고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객사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용왕(龍王)이라 하면서 정중히 읍을 하고 『오늘 내 아들이 나들이를 하다가 뭍 사람들에게 잡혀 죽을 것을 공(公)이 살려 주셨으니 그 은혜 잊을 수 없으며 다만 귀댁에 누대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요』 하고 사라졌다.
  그 뒤 안렴사는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란 수상직에 올랐으며, 아들 홍무(洪茂) 또한 시중(侍中)이 되었고, 손자 함도 복야(僕射)를 거쳐 시중이 되어 한 집안에 3대 정승이 나오자 이 마을을 부역을 면제하여 동명을 「거무역(居無役)」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3세기경인 고려 원종 연간(1260∼1274)에 영해박씨(寧海朴氏)의 박세통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조선 후기 영조(英祖) 연간(1724∼1776)에 묵산(默山) 남기만(南基萬)이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 한 때 거묵리(居默里)라 칭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寧海郡) 북이면(北二面) 지역으로서 거무역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거묵역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변경할 때 거무역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거무역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아곡리, 남은 원황리, 북은 영리, 병곡리가 있다.

 

 
바닷마(바다마을, 바다못, 바디모치) :
거무역 동북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임.
 
안모치(안못) :
거무역 안쪽에 있는 마을임.
 
천방모치(천방모퉁이, 천방못) :
거무역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천방의 모퉁이가 되는 마을임.

         

▒ 아곡리(牙谷里)

  아곡리 동명의 유래는 골짜기가 방처럼 아담하다 하여 아실, 애실, 아곡, 애곡 등으로 불렀다.
  이 마을은 칠보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 아득히 먼 신라시대에 개척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하고 또 손씨(孫氏)가 거주했다고 하나 알 수 없으며, 언제인가 안성이씨(安城李氏) 이귀천(李貴天)이 입주하여 아곡동이라 명명(命名)하고 마을을 재개발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북이면(北二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곡동(保谷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아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아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곡리의 위치는 동은 거무역리, 서는 창수면과 면계(面界)를 이루고, 남은 이천리, 북은 영리가 있다.

 
 
건네모치 :
아실 동쪽 건너에 있는 마을임.
 
고란모치 :
아실 북쪽 골안에 있는 마을임.
 
논뚝모치 :
아실 서쪽 논둑 옆에 있는 마을임.
 
새논골(保谷, 牙谷洞保谷) :
아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은 영동에 딸린 보곡과 한 구역이었는데 1914년 구역 변경 때, 갈라서 아곡동에 딸린 마을과 영동에 딸린 마을을 구분하기 위하여 아곡동 보곡이라 하여 그 동명을 머리에 붙여 부르기도 하였다.

 

▒ 원황리(遠黃里)

  원황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이 대나무숲이었는데 영해부(寧海府)에서 볼 때 누렇게 보였다 하여 황죽(黃竹)이라 하다가 원황 또는 원앙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고려말(高麗末)인 14세기경에 밀양박씨의 박명인(朴命仁)과 김치우(金致禹)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원황2리는 18세기초에 경주이씨의 이석범(李錫範)이라는 분이 입주하여 대포(大浦,한개)라 했다 하며, 그 뒤 장씨(張氏), 임씨(林氏)등이 들어 왔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북이면(北二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거무역리 일부와 북초면(北初面)의 송하도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원황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원황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원황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원황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각리, 남은 송천리, 덕천리, 북은 거무역리가 있다.

 
 
대포동(大浦洞, 한개) :
원황 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개가 있었다 함.
 
서실막(書室幕) :
원황 북쪽 이천제방 아래에 있는 마을임.
 
운산(雲山) :
원황 서북쪽에 있는 마을임.
 
아릿모치 :
운산 아래에 있는 마을임.
 
▒ 이천리(伊川里)

  이천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앞 하천이 길게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4세기 후기인 고려말(高麗末)에 이씨(李氏)라는 분이 입주하여 마을이 번영하라는 뜻으로 이래실이라 하였으며, 그 뒤 윤씨(尹氏)가 입주하여 이천(伊川)이라 했다 하며, 18세기인 1700년대부터 최씨, 신씨, 황씨, 박씨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북초면(北初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북이면의 원황동 일부를 병합하여 이천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이천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천리의 위치는 동은 거무역리, 원황리, 서는 등운산, 남은 각리, 북은 아곡리가 있다.

 

 
가매골(釜谷) :
아릿이래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가마솥처럼 되었다 함.
 
아릿이래실(아릿마) :
이래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양지모치 :
아릿이래실 양지쪽에 있는 마을임.
 
텃골모치 :
텃골 옆에 있는 마을임.

 

▒ 각 리(角里)

  각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뒤로 뻗은 칠보산의 산맥과 하천의 형상이 마치 용의 뿔과 같이 생겼으므로 각실(角室), 각리 또는 각시랍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각리 1리는 고려(高麗) 말기에 대흥백씨(大興白氏 : 水原白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살다가 임오년(?) 대홍수로 용두천(龍頭川)이 범람하고 마을이 폐허가 되자 백씨는 떠나가고 뒤에 남씨, 권씨, 김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각리 2리는 고려말 주씨(朱氏), 우씨(禹氏) 등이 들어와 다래넝쿨을 헤치며 마을을 개척했다 하여 다릿골로 불렀다 하며, 그 뒤 조선 전기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세조(世組)가 왕위에 오르자 당시 호조판서(戶曹判書)였던 명은(溟隱) 윤황(尹煌)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달은 볼 수 있다고 해서 다릿골 또는 월의(月宜)가 되었다고도 한다.
  각리 3리는 고려말 왕삼(王參)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정직한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어느실(彦谷)이라 했다 하며 또는 황토물이 굽이쳐 흘렀다 하여 주니곡(朱泥谷) 이라고도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1895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영해군 북초면(北初面) 지역으로 각시랍, 다릿골(月宜), 논골, 어느실(彦谷) 등 자연마을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이 지역을 병합하여 각리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각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각리 1리(각실앞), 2리(다릿골·논골), 3리(어느실)로 되어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덕천리·원황리, 서는 창수면과 면계를 이루고, 남은 사천리·신평리, 북은 이천리가 있다. 이 마을 뒤에는 칠보산의 크고 작은 산맥이 둘러 있다.

 

 
대장수(大長水) :
발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개울의 이름을 딴 마을임.
 
발새재 :
발재 밑에 있는 마을임.
 
다릿골(月宜) :
각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임.
 
어느실(彦谷) :
각리 서쪽에 있는 마을임.

 

▒ 신평리(新坪里)

  신평리 동명의 유래는 갈대밭을 새로 개간한 들 옆이 되므로 새들 또는 신평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1481년경)인 성종(成宗) 연간에 평산신씨 신대지(申大地)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나우내(蘿雨內)라 하였는데, 그 뒤 제방을 쌓고 하천을 정리하고 갈대밭 등이 개간되어 새로운 논(畓)이 이룩되자 새들 또는 신평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북초면(北初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각리(角里) 일부를 병합하여 신평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신평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신평리의 위치는 동은 송천리, 서는 사천리, 남은 영해면 연평리, 북은 각리가 있다.

 
 
아릿모태 :
신평 동쪽 아래에 있음.
 
우물모태 1 :
아릿모태 웅글(우물)이 있음.
 
우물모태 2 :
웃모태 웅굴 근처에 있는 마을임
 
웃모태 :
신평 서쪽 위에 있는 마을임.
 
▒ 송천리(松川里)

  송천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이 솔안(송내) 들에 있고 또 고장두들(古亭坪) 가운데 소나무가 울창하고 그 앞에는 냇물이 흘러 송천, 송내 또는 솔안이라고도 불렀다.
  이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즉, 조선 초기에는 양씨(梁氏) 장씨(張氏)가 거주하였다고 하며, 마을에 작은 역촌(驛村)과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17세기 즉, 1600년 때인 인조(仁祖) 연간에 송천자(松川子) 권득여(權得輿)가 이곳에 들어와 역촌을 새터(연평리)로 옮기고 동명을 송천이라 하고 이 마을에 정착하였으며 자손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기러기가 알을 품는 형국(雌雁抱卵形)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때에는 영해군 북초면(北初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자의로 폐합할 때 송상동(松上洞), 송하동(松下洞) 일부를 병합하여 송천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송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송천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송천리의 위치는 동은 덕천리, 서는 신평리, 남은 송천내를 건너 연평리, 북은 금강들을 지나 원황리, 덕천리가 있다.

 
 
개양모태 :
송천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개양(물구덩이)이 있었음.
 
서당모태 :
송천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서당이 있었음.
 
▒ 덕천리(德川里)

  덕천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옆으로 큰 냇물이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7세기경인 숙종(肅宗) 연간에 김해김씨의 김선장(金善長)이라는 분이 은둔하기 위해 상대산 북쪽 기슭 아래 살아서 공수개(公須介) 잿듸마을로 불렀으며, 그 뒤 염전을 하기 위해 현 휘리(揮里)로 이사하였으며 이때 경주최씨가 입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북초면(北初面) 지역으로서, 상대산 뒤쪽이 되므로 잣디, 또는 자두라고도 하며, 후릿그물로 고기를 잡았므르로 후리 또는 휘리(揮里)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자의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송하동(松下洞) 일부를 병합하여 휘리1리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90년 1월 3일 군조례(郡條例) 제1146호로 휘리리를 덕천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덕천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각리와 연해 있고, 남은 송천리, 북은 원황리가 있다.

▒ 사천리(沙川里)

  사천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옆으로 흐르는 송천거랑(개울)에서 어살을 놓고 고기를 잡았다 하여 살면 또는 미면이라 하다가 사천으로 고쳐 불렀다.
  이 마을은 15세기인 조선 태종(太宗) 연간에 신안주씨(新安朱氏), 영해박씨(寧海朴氏)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경주김씨 등 여러 성씨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때에는 영해군 북초면(北初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항리(項里, 모개)를 병합하여 사천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사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사천리의 위치는 동은 신평리, 서는 창수면 인량리와 면계를 이루고, 남은 송천내를 경계를 영해면 벌영리, 북은 각리가 있다.

 

 
골-마 :
사천 위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
 
단-바우 :
사천 동남쪽 뒷산에 큰 바위가 있는 마을임.
 
모개(項里) :
사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목이 끊어져 있음.
 
아릿마(아랫모태) :
사천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중간모태(중간마) :
아릿마와 골마 중간에 있는 마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