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루 기
권 근
영해는 즉 옛날의 덕원(德原)이다. 산에 막혀 있고 바다에 임(臨)하고 있으며, 땅은 구석지고 깊숙이 숨어 있다.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많고, 겨울에도 대단한 추위가 없어 얼음이 얼지 않는다. 수산물(魚鼈)과 전복, 조개 등 해산물의 생산이 많다.
옛날 태평시절에는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풍족하였으며, 송사(訟事)가 거의 없었다.집집마다 거문고를 갖고 있으면서 사람들은 줄을 고르고, 곡(曲)을 붙이는데 공교(工巧)로웠다. 노래하는 목청과 춤추는 자태(姿態)는 맑고도 예뻐서 정대지승(亭臺之勝)에 이르러서는 거의 선경(仙境)과 같았으며, 몽암 시중 이혼이 이 고을에 좌천(左遷, 謫宦)되었을 때에, 바다에 떠 있는 나무를 얻어서 무고(舞鼓)를 만들어서 그 가락(節度)를 가르치니, 그 소리가 굉장하였으며, 그 춤의 변화무상(變轉)함은 펄펄 나는 두 마리의 나비가 꽃을 둘러싸고 노는 것 같고, 높이 날아오르듯 날래고 사나운 용감한 기세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다투듯 하니, 나비가 봄을 재촉하는 것보다 화기(和氣)가 있고, 용이 적을 다투는 것보다 더욱 더 힘차는 듯 하였다.
이것이 영해부의 가장 크고 기이한 광경이어서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다. 풍속을 살피며, 절월(節鉞)을 가진 인사들은 반드시 와서 유람하고 관찰하였으니, 실로 영해는 한 방면(方面)의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이러한 곳이 왜구가 일어나고 부터 날로 쇠체(衰替)하더니 신유년(1381)에는 그 화(禍)가 더욱 격렬하였다. 성과 읍은 폐허가 되고 여염은 불타버렸다. 두어 해 동안을 적의 소굴이 되게 내버려두니, 관리들은 다른 고을에 가서 붙어 살고, 범과 산돼지는 옛마을에 와서 깃들었다. 변방이 이미 이즈러지니 왜구의 침입은 더욱 심해져서, 계해년(1383) 여름에는 원주와 춘천을 거쳐서 철원의 경계를 와서 침노하며, 양주·광주를 침략하고, 공주의 수령을 살해하는 일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왜구는 모두 축산도를 거쳐서 들어 온 것이다.
한 고을(邑)의 방어의 실패로 삼도(三道)가 해를 입었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다는 것은 이처럼 참혹한 것이었다. 다음해 갑자년(1384)에 원수 윤가관 공이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시)로부터 출발하여 진무(鎭撫)하면서 바다를 따라 북으로 올라와서 마침내 이 고을에 이르러서는, 가시덤불 속에 원수의 절월(節鉞)을 멈춰 세우고 둘러보며 탄식을 거듭하였다.
이에 성을 쌓아서 나라 경계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여 즉시 역전(驛傳)을 통해 계문(啓聞)하였더니, 묘당(廟堂)의 의논이 그렇게 하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수비의 곤란함을 알고 난감(難堪)해 하였다. 마침 김군 을보(金君 乙寶)가 자원하고 나서니, 부월(斧鉞)과 인절(印節)을 수여하여 만부장(萬夫長)을 삼아 계림과 안동의 군사 2천명을 이 고을에 출동시켰다. 이에 뭇 왜구들이 소요(騷擾)를 일으키고 양탈(攘奪)하는 가운데서 한편으로 적을 방어하고 한편으로 성을 쌓았는데, 7월에 시작하여 한달만에 마치었다.
또 축산도에 전선(戰船)을 배치하고는 지키는 군졸을 두게 되니 왜구가 여기에 배를 대고 생활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 고을이 재건되어 굳건하여 지니 여러 고을들이 편안함을 얻게 되었다. 모두 윤공이 성을 쌓은 덕택이다. 이 때로부터 유리(流離)하여 남의 고을에 붙어 살던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백성의 집들도 거칠게나마 겨우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무진년(1388) 정월에 실화(失火)로 공·사(公·私)간 건물들과 같이 연소되어 완전히 다 타 버렸는데, 기사년(1389) 봄에 병마사 박후 문부(朴侯 文富)가 왔는데, 남은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 힘써 관대한 정치를 시행하며, 백성으로서 생업을 잃고 유리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고, 관리로서 허가없이 중이 된 자들을 환속시키는 등 그 노고와 안일을 균평(均平)하게 하였으며, 그 주리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여 따뜻이 보호하고 어루만져서 마 치 갓난 아기처럼 돌봐 주었다.
역마(驛馬)를 타고 온 사자(使者)가 비록 미관(微官)일지라도 반드시 묵고 있는 객관에 가서 위로하고 대접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은 벼슬이 높고 저 사람은 낮은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극진히 하십니까.” 하니, 후(侯)가 말하기를 “저 사람은 손님이고 나는 주인이다. 손님과 주인 사이에 어찌 자급(資級)과 품계(品階) 등을 따질 수 있겠는가. 저 사람이 혹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함부로 위세를 부려 관리와 백성을 혹독하게 꾸짖는다면 내가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내가 저 사람에게 후하게 하면 저 사람도 반드시 성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오는 자들도 감복하여 즐거워하였으며, 관리들도 꾸짖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이 해에 왜구가 밤에 다시 와서 해안에 정박하고 있었다. 후(侯)가 듣고는 즉시 성문을 열고 말에 채찍질하여 나가려 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적이 어두운 밤을 타고 왔으니 적변(賊變)이 장차 어떻게 될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군사는 고립되어 있고 수가 약하니 적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벽을 굳게 지키며 기다려서 만전을 기하기만 같지 않습니다.” 하였더니 후가 말하기를 “국가가 나를 인재가 아니라고 버리지 않고 한 지방을 맡겨서 백성의 생명을 책임지는 사명(司命)으로서 임무를 주었는데, 바닷가의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도 어찌 홀로이 국가의 백성들이 아니란 말인가. 적이 왔다는 것을 듣고도 구제하지 아니하여 적의 칼날 앞에 쓰러지게 한다면, 비록 내가 구차하게 산들 장차 어찌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전투에 달려가 죽는 것은 그게 바로 나의 직책이다. 또 내가 돌격해 나가면 적도 또한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군사들의 행렬에 앞장서 적진을 향하여 달려가니 적이 과연 도망쳐 달아났다.
말을 해치는 표범과 사람을 잡아먹는 범들과 같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무리들을 단번에 무찔러서 제거하니 백성들에게는 어진 태수요, 적에게는 용감함이 이와 같으니, 고을 사람들로부터 유임(留任)을 원하는 신망(信望)을 얻고, 관찰사의 포상과 칭찬을 받도록 추천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 농한기에 백성들이 한가할 때에는 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리하고, 도로의 장해물을 제거하였으며, 옛터에서 기와를 주어다가 관사를 덮기도 하였다. 또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기를, “서문은 이미 화재로 인하여 막아버린 채 쓰지 않는데 어찌 또한 이것을 개축(改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즐거이 명령을 따르니 오래지 않아 다시 지어졌으니, 위는 누(樓)이고, 아래는 관문(關門)인데 견고하게 굳세게 되었다.
성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은 땅이 낮고 협소(陋)하고, 남문은 산이 가까워 막혀 있지만 오직 서문만이 넓은 들을 향해 버티고 서있으니 훤히 통하고 시원스럽게 트여 있고 산은 멀리서 첩첩히 둘러싸여 있으며, 바다는 넓고 평평하면서 구비치기도 하고 트이기도 하면서 멀고 아득한 것이 한 눈에 천리가 보이는 듯하니, 실로 한 고을의 좋은 경치를 독차지하고 있다.
만약 봄·여름·가을에 모든 집들이 일제히 농사에 힘쓰는 농사철에 이르러 이 누에 오르면,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점심을 가져가는 것이라던가, 아침에 나가 김을 매다가 저녁에 돌아오는데, 혹은 혼자 오기도 하고, 혹은 떼를 지어오는 경우도 볼 수 있으며, 혹은 종자를 심기도 하고, 혹은 수확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대개 한 고을에서 이루어져야 될 일들이 아니겠는가.
서쪽 두둑에서도 힘써 일하고, 남쪽 이랑서는 진흙 묻혀 햇볕에서 일하고, 바람과 햇볕에 그슬리면서 부지런히 노역하여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의 온갖 상태 모두가 누의 헌창(軒窓)과 좌석 아래에서 펼쳐져 있으니 하나같이 눈앞에서 떠나지 아니하구나.
따라서 농사를 권장하는 직책을 가진 자는 마땅히 날마다 이 누에 올라서 때때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는 오직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알아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하는 사자(使者, 즉 부사)로 하여금 부지런을 더하게 하는데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농사일의 어려움과 밥상 위의 밥알이 낱낱이 농부들의 신고(辛苦)에서 온 것을 알게 하여 부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하며,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아끼려는 마음이 왕성하게 자라서, 반드시 백성의 힘쓴 결과를 먹으면서 백성을 위한 일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이렇게 한다면 항차 그들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부수어서 그의 기름과 피를 빨아 먹으며, 쓰는 것을 사치하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켜 백성들을 근심스럽게 하는 일이야 차마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누를 지은 것이 우리 농민에게 커다란 유익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 산 모양과 바다의 빛 같은 경치의 좋은 것은 이 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옛 일에 징험(徵驗)하여 지금을 알 수 있으며, 전의 일을 거울 삼아 뒷일을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노래와 춤을 즐기던 곳도 본래 같은 산과 바다이었고, 중간에 폐허가 되었던 것도 또한 같은 산과 바다였다. 이제 이 성루를 복구한 것도 또한 같은 바다와 산인 것이다. 산과 바다는 변함이 없는데, 사람의 세상일은 폐함도 있고 흥함도 있으니, 즐거움이란 산이나 바다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마음에 느끼는 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전 일에서 생각하면 마땅히 즐길 만하지만 뒷일에서 생각하면 또한 상심할 만한 것이다. 예전에 이미 음란하고 사치하여, 안일하고 향락함으로써 망하는 데에 이르렀다가, 이제 도로 안정되어 다시 진작(振作)하는 첫 머리에 있어서 문득 엎어진 앞수레 바퀴자국을 밟고자 하니 뒷날의 근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 또한 뒷날 이 누에 오르는 자들이 마땅히 알아서 경계해야 할 바이다. 내가 이 고을에 귀양살이를 왔더니 마침 이 누를 낙성하는 때여서 벽(壁)에 걸 기문(記文)을 써 주길 청하는데 내가 사양하지 못하였다. 아! 몽암은 북을 만들어 한 고을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더하였지만 박후(朴侯)는 누를 지어서 한 고을의 근검(勤儉)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소리는 흘러 가버리지만 남아 있는 은택(恩澤)은 마땅히 한 개의 북보다 훨씬 나은 장거(壯擧)일 것이며, 길고 멀리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기를 쓴다.
< 참고문헌>
ㆍ 영덕향교, 「영영승람」, 1935.
ㆍ「세종실록지리지」
ㆍ「경상도지리지」
ㆍ「경상도속찬지리지」
ㆍ「단양부지」
ㆍ「경상도 영덕, 영해읍지」
ㆍ「임원경제지」
ㆍ「교남지」
ㆍ「영해부사례」, 「영덕현사례」
ㆍ「신증동국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