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덕현의 관아

  관아는 일명 공해(公)라고 하는데, 중앙이나 지역의 각 관청의 공공건물로써 각종 행정사무를 집행하던 건물이다. 따라서 1부 1현이던 우리 지역에도 여러 종류의 관아가 건립되어 지방행정 공무를 수행하였으며, 각 관아마다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까지 지역행정의 중심 건물의 역할을 하였다.
  대개 영덕과 영해에서 관아다운 관아가 들어서게 된 것은 고려말과 조선초로 추정된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읍치(邑治)로써 각종 관청의 건물들이 영해와 영덕에 건립되어 목민(牧民)의 중심 관아로 사용되어 왔으나, 고려말에 이르러 이 지역으로 여러번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영해부의 읍성과 영덕현의 읍성이 약탈당하여 거의 전부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양촌 권근의 영덕현 “객사기(客舍記)”나 영해부의 “서루기(西樓記)”에 의하면 이러한 실정을 잘 알 수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고려말의 왜구의 침입시에 영해와 영덕의 관아가 파괴되어 관원들은 인근 고을에서 업무를 보거나 아니면 풀로 엮은 초가집에서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정부의 강력한 왜구들의 정벌과 윤가관 장군에 의하여 영해읍성과 축산성이 축성되고, 그리고 영덕현에는 영덕읍성이 축성되고 나서 이들 왜구들의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따라서 이때 이후부터 정상적인 관아의 복원과 건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말부터 복원되고 새로이 건립된 각종 관아들은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현존하면서 지역 목민의 중심지 역할을 하여 왔으나, 대부분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 일제에 의하여 파괴 훼손되어 현재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이 지역의 중심지에서 각종 공무를 담당하였던 관아들의 명칭만이라도 기록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들 관아의 명칭만 가지고도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기록에 나타나는 영덕현의 각종 관아들의 명칭이다.

<1832년, 1899년 영덕읍지>

객사(客舍), 동헌(東軒), 관청(官廳), 현사(縣司), 군기(軍器), 형옥, 향사당(鄕射堂), 무학당(學堂), 제민당(濟民堂), 연사(椽舍), 별포청(別砲廳), 청심루(淸心樓), 읍창(邑倉), 남북고(南北庫), 대동고(大同庫), 진휼고(賑恤庫), 빙고(氷庫).

< 영영승람>

객사관(客射館) : 현아(縣衙)의 동쪽에 있다. 권근(權近)의 기(記)가 있다.
현사아(縣射衙) : 객관의 서북에 있다. 현령의 아사(衙舍)이다. 편액(扁額)은 야성아문(野城衙門)이다.
관사청(官射廳) : 현아의 서북에 있다. 호장이 근무하는 곳이다.
향사당(鄕射堂) : 현아의 동문 밖에 있다.
연리청(椽吏廳) : 현아의 남에 있다.
군관청(軍官廳) : 현아의 서북에 있다.
강무당(講武堂) : 현아의 동문 밖에 있다.
현사사(縣射司) : 현아의 북에 있다.
군기소(軍器所) : 현아의 서에 있다.
형옥, 읍창(邑倉), 대동고(大同庫), 진휼고(賑恤庫) : 현아의 서남에 있다.
외노방(外奴房), 외장방(外杖房) : 현아의 동문과 남문 밖에 있다.
청심루(淸心樓) : 현성(縣城)의 서문루이다.

< 교남지>

동헌(제민당), 현아, 야성아문(영영승람에는 현아의 편액을 야성아문이라 하였음.) 향사당, 연리청, 군관청, 무학당, 관청, 현사, 군 기소, 형옥, 사창, 대동고, 진휼고, 외노방, 외장방

1) 영덕현의 객사기문(客舍記文)과 청심루기문(淸心樓記文)

  영덕현의 「객사기문」은 양촌 권근(1352∼1409)이 지었으며, 「청심루기문」은 권근의 손자인 소한당 권람(1416∼1465)과 농암 이현보(1467∼1555)가 지은 것이 있으나, 현재는 농암 이현보의 「청심루기문」만 전하고 있다.

  영덕현의 객사는 1391년에 영덕현령으로 부임한 이인실(李仁實)이 현내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1393년에 완성한 것이다. 이후 1687년 2월에 불이 나서 정청(政廳)과 동서헌(東西軒)이 하루 밤에 소진(消盡)된 것을 1686년에 현령으로 온 나중기(羅重器)가 우선 정청을 수축하였고, 뒤이어 현령으로 온 이지걸(李志傑)이 동서헌을 재건하였다.

客 館
權 近
盈德在海上最僻且遠久仍倭耗人民避匿閭井丘墟者有年矣
及有城而鳩集然後遺民稍還粗安其業余嘗謫行過此舍未
設而其縣令之居茅茨數椽低小隘陋與民廬無別洪武辛未秋
鷄林李仁實爲令又玆政修訟簡一邑稱治乃謀於衆欲營公館
其明年秋伐木于山又明年春旣雨水生流材于溪不勞擔載悉
至城下乃起廳堂左右有室門廊廚厥位咸備又其城中舊無
井占地以鑿有泉湧出淸冽可食擧邑之人莫不相慶夫舍所
以待賓客施政令治莫大焉井泉所以濟朝夕備急難事莫切焉
李侯爲政汲汲於此可謂知先務矣其鄕人進士金績來京師受
業於余請記其事余聞之嘉歎云

 영덕은 바닷가에 있으며, 가장 구석지고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오랫동안 왜구들의 약탈에 의하여 땅은 소모(消耗)되고 백성(人民)들은 피하고 숨고 하여 여염이 폐허(廢墟)가 된지 오래였다. 그러다가 성을 쌓고 들을 모으자 연후부터 조금씩 모여들어 거칠게나마 그 본업에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내가 일찍이 이 해사(舍, 현의 관청)를 지나 유배 길을 갈 때에는 아직 이 객관은 건축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령이 거처하는 곳은 수칸의 초가집이었는데, 낮고 좁은 것이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홍무신미년(1391) 가을에 계림(경주) 이인실(李仁實)이 여기에 현령으로 부임하여 정사(政事)를 바로 닦고, 송사(訟事)를 간결하게 하여 한 고을을 잘 다스려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는데, 마침내 공관을 짓고자 하여 여러 사람들과 의논을 하여 이듬해 가을에 산에서 나무를 벌채하고는 또 그 이듬해 봄에 내린 비에 시냇물이 흐르자 시냇물에다 재목을 흘려보내어 실어 나르는 수고를 조금도 하지 않은 채 모두 성 밑에까지 날라다 이에 대청과 좌우에 방, 그리고 문, 낭하, 부엌, 마굿간 등의 모두를 갖추었다.
 또 성중에는 전부터 우물이 없었는데, 땅을 정하여 팠더니 샘이 솟아 올랐다. 맑고 시원한 것이 가히 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고을 사람들이 추켜세우며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관아와 객사는 정령(政令)을 펼치고,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니 다스림에 있어서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우물과 샘은 아침저녁으로 밥짓고 빨래하는데 있어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니 위급한 일에 이것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하겠다.
 이후(李侯)의 정치가 여기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보아 가히 먼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하겠다. 그 향인(鄕人) 진사 김적(金績)이 서울(京師)에 와서 나에게 공부를 배울 때, 기문을 청(請)하기에 그 사적을 듣고 감탄하였다.

 청심루는 영덕현성(縣城)의 서문루이다. 1423년에 지군사(知郡事) 최우(崔宇)가 창건하였으며, 1457년에 현령 염상항(廉尙恒)이 증축하였으며, 이 때 권람이 중수기문을 지었다.
 1543년 겨울에 불이 난 것을 현령 이고(李股)가 중수하고 다시 소루(小樓)를 지어 후락당(後樂堂)이라 이름하였으나, 다시 불이 나 소진된 것을 뒤이어 부임한 현령 윤복인(尹復仁)이 다시 양루(청심루와 후락당)를 고쳐지었다. 이 때 농암 이현보가 중수기를 지었다. 농암 이현보의 중수기를 싣는다.

 

淸 心 樓
                                                                                         李 賢 輔

盈之爲縣東南際巨海境接新羅古都今慶州爲一道首府又連兵水兩營之路尋常沿海防戌巡審元帥棨戟之行時時不絶非如山谷間僻縣民居土壤亦不甚殘少而賓客官舍隘狹且無樓閣夏月尤病焉西有古樓地勢敞豁而歲久傾頹無人修葺而嘉靖癸卯冬鐵城李侯股受符于玆下車來久樓適失火侯有幹能此乃樓之造遇更新之期也於時伐材陶瓦卽爲之經始歲未周而改成收餘材更構小樓丹棠畢又失於火兩樓俱焚疑其故燒報監司推請而竟未得其跡侯乃慨歎又將改營先建小樓未幾而丁母憂遞去今太守坡平尹君復仁代其任新舊之交官事倍煩而不遑他及上告方伯下民吏竝募游手其年修小樓畢其役竝明年春仲續興大樓之役增損舊規晨夜展力秋未盡而斷手廊廚制度極備煥然一新何其敏也世之銅符爲邑宰者視其官雖不至傾頹不甚狹隘舊貫之可仍而喜爲之改作若盈之邑樓則前之李侯再逢回祿焚蕩殆盡安可不爲改營之謀乎後之尹君來灰燼之餘仍其前功急急修完亦不得已也凡營繕重事始之而未畢或延四五年或至十餘年者多矣今此之擧不數年再三起役盈人連遭土石之勞不爲怨咨而趨事赴功可以見前後上下皆知其不得已之故悅以事民同心合力以成此美是不可以不記尹君落成之後因其邑人申沃爲吾邑敎官而求記於余申乃余之昔年爲永嘉府宰時肆業秀才也不見數十年來說其樓之經營興廢之迹甚詳余未與尹君有素而交其伯叔不無世分且余日親老作尹東都便道取疾屢過玆縣每見此樓之蒙塵惜其景致今聞其重新恨未及余之少壯而修此樓一往登賞也玆敢忘其荒拙强放棄之筆而粗述焉其他山川名迹眺望勝形則觀覽者自取眼中物也不須縷

  영덕은 현의 동남에 큰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도(一道)의 수도(首府)인 신라고도(新羅古都), 즉 지금의 경주와 접경하고 있다. 또한 병수양영(兵水兩營)의 길과 이어져 있어 평시에도 연해를 지키는 군졸들이 주둔하여 있으며, 이를 순찰하고 살피는 원수(元帥)의 행차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산곡간의 구석진 현(縣)과 같지 않으며, 백성들이 거주하는 토양도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손님을 맞이하는 객사가 좁고 누추하며, 또한 루각(樓閣) 같은 것이 없어 여름철엔 심히 근심거리였다. 사실은 오르면 지세(地勢)가 탁 트인, 오랜 세월동안 수리(修葺)한 사람이 없어 기울어지고 무너져 내려 있는 오래 된 루가 서쪽에 있기는 있었다.
  가정 계묘년(1543)에 철성(鐵城) 이후(李侯) 고(股)가 이곳의 현령으로 부임하여 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 루가 불이 나 타버렸다. 이후(李侯)는 이러한 것에 재능이 많은 인사로 이 루를 재건축할 기회를 뜻밖에 만나 다시 이를 신축할 것을 기약하고는 이에 재목을 벌채하고 기와를 굽고 하면서 일을 시작하니 1년이 되지 않아 이를 완성시켰다.
  남은 재목을 수습(收拾)하여 다시 소루(小樓)를 짓고 단청을 입혀 겨우 일을 마쳤는데, 또 불이 나서 양루(兩樓)를 모두 태우게 되었다. 그런데 불이 난 원인이 의심스러워 감사에게 보고하여 추심(推尋)하여 주길 요청하였으나 결국은 그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이후는 이에 개탄만 할뿐이었다.
  따라서 장차 영문(營門)을 고칠 경우에 우선 소루라도 먼저 재건하기로 하였으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정미년(1547)에 모친의 별세로 이임하여 가게 되었다.
  지금의 태수 파평 윤군(尹君) 복인(復仁)이 그 일(任)을 대신 맡았는데, 업무의 인수인계(新舊之交)로 관의 일(官事)이 배로 번거로워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도 위로는 방백(方伯)에게 보고하고 아래로는 백성들과 관원들을 다독거려 노는 일손(游手)들을 모아 그 해에 소루를 수리하여 그 역을 마쳤다.
  이어 다음해(明年) 봄에 대루를 재건하는 역사를 일으켜 옛 규모 중에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고 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모든 힘을 기우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일을 끝마치니 랑무(廊)와 주방과 부뚜막 등의 제도(制度)가 지극하게 갖추어져 새롭게 번듯하게 하니 어찌 민첩하지 않으리요.
  세상에 무인(武人)으로 한고을 태수(邑宰)가 되어 그 고을 관아가 비록 무너지지 않고, 협소하지 않으면 옛부터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대부분인데, 고쳐 짓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니, 만약 영덕의 읍루 같은 경우는 전의 이후가 다시 영덕의 태수로 온다해도 불에 타서 거의 없어진 것을 보고 어찌 가히 새롭게 세울 의논을 하지 않았으리요 마는 후의 윤군이 부임해 와서 불에 타고 남은 것 그대로 전에 이룬 것에 따라 급급히 수리만 해도 부득이 한데, 항차 영문(營門)의 중건은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을 뿐, 더러는 혹 4∼5년을 끌기도 하고, 혹 10여년이나 걸리는 것도 허다(許多)하다.
  지금의 이러한 거사(擧事)는 수년이 되지 않아 두 번, 세 번 역사(役事)를 일으켜 영덕고을 백성들을 연이어 노역(勞役)을 시켰는데도 원망과 불평하나 없이 일을 재촉하고 공을 다투며, 전후상하가 모두 부득이한 사연을 아는 고로 일을 함에 기쁜 마음으로 동심합력(同心合力)하여 이를 완성하는 것을 가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일을 한 윤군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낙성식 이후에 그 읍인(邑人) 신옥(申沃)이 우리 읍(안동)의 교관이었던 인연으로 나에게 기문(記文)을 구하려 왔다. 신옥은 옛날에 내가 영가부(永嘉府, 안동)의 태수로 있을 때 유학에 뛰어난 수재였다. 수십년 동안 만나지 못하였는데 와서 청심루의 경영과 흥폐(興廢)의 자취를 심히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나와 윤군과는 큰 교유(交遊)는 없으나, 일면식(一面識)은 있으며, 그 백부와 숙부와는 세상의 연분이 없지 않았다. 또한 전날에 늙음에도 동도(慶州) 부윤이 되어 지름길을 취하여 누차 영덕현을 빠르게 지나면서 매번 청심루가 먼지더미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경치를 애석해 하였는데, 이번에 청심루를 새롭게 중수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젊은 시절에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수리한 이 루를 한번 올라가서 감상하였다. 이에 감히 황당(荒唐)하고 졸렬(拙劣)한 나의 능력을 잊고 버려 두었던 붓을 새삼 강하게 잡고 그 대략을 간략히 기록하지만 기타 산천과 이름난 유적, 아름다운 형승(形勝)을 조망(眺望)하는 것은 관람하는 사람들 스스로 안중(眼中)의 귀물(貴物)로 취해야 하는 것이니 그 상세한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

2. 영해부의 관아

  영해부의 관아는 순조대에 쓰여진 「단양부지(丹陽府誌)」의 19개소에서 1935년에 쓰여진 「영영승람」에 의하면 무려 29개소로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단양부지」가 쓰일 당시에 이미 훼손되었거나 있는데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여 누락시킨 것이 대부분이거나, 그 이후에 몇몇 건물이 창건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예로 「영영승람」에는 기록이 보이는 반면, 「단양부지」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망월대(望月臺)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망월대는 정덕병자년(正德丙子年)인 1516년에 부사 신계종(申繼宗)에 의하여 창건된 것인데, 중도에 폐지되고 현판만 정당(政堂)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在東軒北正德丙子府使申繼宗創建中廢移揭于政堂)
  결과적으로 「영영승람」에는 이러한 누락 건물의 이름을 모두 기록하였기 때문에 29개소가 된 것으로 파악된다. 다음은 이들 기록에 의한 영해부 관아의 이름들이다.

< 단양부지>

객사, 동헌, 하청당(河淸堂), 연대(蓮臺), 경신당(敬信堂), 향사당, 사창(司倉), 동별대(東別臺), 북아소루, 해안루, 읍선루, 북양루(北凉樓), 서문루, 진남루, 대동, 작청, 무학당, 서역소(書役所), 종루(鐘樓).

< 영영승람>

객   사(客  舍) :
부아(府衙) 밖의 남방(南方)에 있다. 창건연대는 미상(未詳)이다. 그러나 고려말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李穀, 1298∼ 1351)의 “차영해부객사운(次寧海府客舍韻)”이라는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초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무16년 계해년(1383)에 왜구들이 성에 쳐들어 와 고을(邑)이 불에 타서 재가 되었을 때 소진된 것으로 보이며, 1384년에 원수(元帥) 윤가관(尹可觀)과 김을보(金乙寶)가 경주와 안동의 군사 2,000명을 동원하여 축성하였을 때 어느 정도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1388년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1389년에 불이 난 것을 부사 박문부(朴文富)가 중건하였다. 조선 현종 14년(1673)에 부사 조정우(曺挺宇)가 중수 하였으며, 진사 백표(白彪)가 대신 지은 상량문이 있다.
동   헌(東  軒) : 객사 북에 있다.
하청당(河淸堂) :
동헌의 동쪽 백보(百步) 밖에 있다. 홍치16년(1503)에 부사 이중현(李仲賢)이 창건하였다. 임진년(1532)에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융경 정묘년(1567)에 부사 이중양(李仲樑)이 중수하였다.
망월당(望月堂) :
동헌의 북에 있다. 정덕 병자년(1516)에 부사 신계종이 창건하였다. 중간에 폐지되고 현판은 정당(政堂)에 옮겨 걸었다.
경신당(敬信堂) : 객사 남에 있다. 숙종 을유년(1705)에 부사 김하정(金廈)이 새로이 창건하였다.
작   청(作  廳) : 객사 남에 있으며, 곧 연리청(椽吏廳)이다. 향리들의 근무처이다.
장   청(將  廳) : 객사 동남에 있다.
부   사(府  射) : 객사 남에 있다.
형   옥(刑  獄) : 객사 서남에 있다.
종   루(鐘  樓) : 동헌 남에 있다.
해안루(海晏樓) :
객사 동에 있다. 다음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우의정을 지낸 윤호(尹壕, 1424∼ 1496)의 해안루 시다.

故人千里話心頭 偏愛終宵月滿樓
携手觀魚臺下去 一場觴詠醉中遊

천리 고인의 말씀 염두에 두고
밤새도록 루위의 가득찬 달을 사랑한 후
손잡고 관어대 아래로 가서
술 나누고, 시 읊는 한 장소 정하여 놀고 지고

읍선루(揖仙樓) :
부의 남문 밖에 있다. 다음은 고려 충숙왕대의 문신이며,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영해방어사를 지낸 윤신걸과 교분이 있는 박효수(朴孝修, ?∼1377)가 읊은 읍선루 시다.

揖仙遐想若憑虛 節登臨任所如
柳幄垂煙藏細馬 蓮房倒水映潛魚
勝遊從此幾年憶 淸賞却嫌三日疎
爲報召南黃閣老 題封絶景一移書

아득히 생각하면 읍선루는 빈 것 같지만
활 같은 마디를 오르면 오르는 그대로 일세
늘어진 버들은 장막을 친 듯 양마를 감추고
물 속에 거꾸로 비친 연밥 속에 고기는 숨는구나
여기에 즐겨 놀던 일 몇 년인가 생각하지만
좋은 소리도 삼일 건너뛰면 싫어하네
소남의 늙은 재상에게 보고 위해
절경 읊은 한 수 시제를 봉하여 글을 옮기네

북양루(北凉樓) :
객사 북에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한 건물이다. 가정 이곡의 “차영해북양루시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고려 중엽부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次寧海北凉樓詩韻

足迹平生萍共浮 夢中時復倚樓頭
題橋一去三千里 佩印重來二十秋
松似郊迎皆偃蓋 水堪漁隱有輕舟
他年遂東山志 好在紅粧淚莫流

한 세상 지난 자취, 부평초 같이 떠돌았을 때는
꿈속에서 때때로 북양루 난간머리에 기대었지만
루(樓) 다리에 시를 남긴 후 삼천리를 떠돌다
높은 벼슬 얻어 다시 오니, 이십여년
길 따라 늘어 선 소나무들 모두 반가이 맞아주듯 하고
뭍과 물에는 드문드문 어부들 낚시하고, 날랜 배는 강위에 떠있네
오랜세월 동쪽으로 오고 싶었던 마음, 이제 이루었으니 좋구나,
아리따운 얼굴에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리니 …

단구서관(丹邱書館) : 곧 객사이다.
잉우각(仍羽閣) : 객사 동에 있다
애선당(愛仙堂) : 객사 서에 있다.
동문루(東門樓) : 성의 동문이다.
남문루(南門樓) :
성의 남에 있다. 일명 진남루(鎭南樓)이다. 부사 홍상인(洪尙寅, 재임기간 1722~1724)이 중수하였다. 서암 이희익이 부사를 대신하여 지은 남문루 상량문이 있다.
서문루(西門樓) :
서쪽의 옹성(甕城)에 있다. 홍무 경오년(1390)에 중건하였으며, 강희 임신년(1692)에 부사 김성좌(金聖佐)가 중수하였다. 양촌 권근의 기(記)가 있다.
사창루(司倉樓) :
객사 동에 있다. 부사 김성좌가 창건하였다. (「영영승람」에는 홍무임진(洪武壬辰)에 부사 김성좌(영해부사 재임 기간 1689∼1694)가 창건한 것으로 나오나, 홍무 년간에 임진이란 간지(干支)는 없으며, 홍무 연호는 고려말과 조선초의 중국 명나라 연호이다. 위의 서문루를 중수한 강희 임신년의 오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청(大同廳) : 객사 서에 있다.
군기청(軍器廳) : 작청 서에 있다.
동별대(東別臺) :
객사 남쪽 옆에 있다. 홍치 갑인(1494)에 부사 유혼(柳 渾)이 창건하였다. 「영영승람」에는 성화 갑인년에 창건한 것으로 나오나 성화 년간에 갑인년이란 간지는 없다.
월영대(月影臺), 애련정(愛蓮亭) :
객사 남에 있다. 순조 신유년(1801)에 부사 김희주(金熙周)가 연계사(蓮桂社)에 소속시켰다.
향사당(鄕射堂) : 남문 밖 2리에 있다. 충렬사(忠烈祠)에 소속시켰다.
연사대(蓮射臺) :
객사 동쪽의 연지(蓮池) 가운데에 있다. 태창 경신(泰昌 庚申, 1620)에 부사 윤영현(尹英賢)이 수 칸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무인년(1638)에 부사 조문수(曺文秀)가 중수하였는데 지극히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북아소루(北衙小樓) :
정덕 병자년(1516)에 부사 신계종(재임기간 1516~1517)이 새로이 창건하였다.
서역소(書役所) : 부의 동에 있다.

< 교남지>

단구관, 동헌, 하청당, 망월당, 경신당, 작청, 장청, 군기청, 형옥, 동별대, 향사당, 부창(府倉), 현창, 대동고, 호적고, 관청고

1) 영해부의 서루기(西樓記)

  서루는 영해부의 서문루이다. 영해부의 서문의 형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甕城)의 형태였다. 대개 옹성은 반원형, 사각형, L자형 등의 종류가 있는데, 영해부의 서문에 있던 옹성의 형태는 어느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창건 연대도 현재 미상이다. 다만 홍무 경오년(1390)에 중건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강희 임신년(1692)에 부사 김성좌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이고, 학자인 양촌 권근이 지은 서루기(西樓記)가 있다. 다음은 양촌 권근의 서루기이다.

 

西 樓 記

                                                              權 近

寧海卽古德原也阻山濱海地僻而夏多凉風冬無陰魚鱉蛤海錯攸産在昔盛時民風訟簡家畜絲桐人工繰歌喉舞態旣淸以婉至於亭臺之勝殆若仙境及蒙庵李侍中混謫宦而來乃得海上浮製爲舞鼓敎其節度其聲宏壯其舞變轉翩翩然雙蝶繞花矯矯然二龍爭珠和於催春健於赴敵最府之一奇而他郡之所未有觀風杖節之士必來遊觀實一方佳麗之地也爰自倭興日以衰替歲在辛酉其禍益烈城邑丘墟閭閻燒燼數年之間棄爲賊藪官吏寄寓於他州虎豕來棲于古里邊方旣缺寇入彌深馴至癸亥之間歷原春而犯鐵原之界侵楊廣而害公州之쉬其寇皆自丑山島而入一邑失守三道被禍脣亡齒寒若是之慘明年甲子尹公可觀出鎭合浦遵海而北聿來于玆駐節於荊之中顧瞻三嘆乃欲築城以固疆圍卽以驛聞廟議爲然而難其守金君乙寶自擧而起授以符印殺長萬夫發卒鷄林安東二千乃於郡倭擾攘之中且防且築以七月而載浹旬而畢又於丑山島留船置戌然後寇不得棲泊于此一邑再造諸州獲安者皆尹公築城之德也自是流寓稍歸民居粗立戊辰正月失火延燒公私赤立己巳之春朴侯文富寔來惻念遺黎務行寬政民之失業而流者懷之吏之私度而剃者還之均其勞佚賑飢之煦濡撫摩視同赤子乘馹之人雖微者必至所館慰接之或曰公尊彼卑何至若此侯曰彼賓我主賓主寧計資品耶彼或憑公肆威呵責吏民吾何忍視之我厚於彼彼必不怒由是來者感悅吏不見呵是年倭寇再至夜泊于岸侯聞卽開城門策馬而出左右皆曰敵乘昏夜變將不測我衆單弱未易破敵不如堅壁而待可以萬全侯曰國家不以我不材委以方面爲民司命沿岸煮海之人獨非國家蒼生歟 聞敵不救使陷鋒刃雖我苟活將何免焉赴鬪而死是吾職耳且我突出賊亦必懼乃先卒伍向敵而馳賊果遁走害馬之豹食人之虎又皆一擧之以除民害其仁於民而勇於敵如此其得邑人願借之望觀察褒嘉之薦宜矣又於農隙民力方閑修城之除道之拾瓦舊墟以覆館宇此謀於衆曰西門旣災塞而不用亦寔構衆樂聞命不日而營上樓下關旣堅旣固城有三門東地卑而陋南山近而隘唯西門控臨廣野洞達軒豁山遠以簇海豁以平紆舒渺漫一目千里實擅一邑之形勝也至若三時務農百室齊作登斯樓也則夫耕婦朝鋤夕還或或群或種或穫有事于西疇盡力乎南畝者霑塗泥曝風日勤勞困悴千態萬象皆在乎軒窓席之下而擧不逃乎目前則職勸農者所宜日登而時觀者也然則非唯知勤怠而權徵之使力本者益勉亦且知稼穡之艱難盤餐之辛苦輕薄節用愛人之心油然而長必不至食其力而怠其事矣敢忍於剝膚槌髓浚其膏血侈用傷財以病民乎若是則斯樓之作其益於吾農也大矣若夫山容海色景之勝不足爲斯樓之重何也驗於古可以知於今鑑於前可以戒於後古而樂歌舞固一山海也中而爲丘墟亦一山海也今而復是城樓固亦一山海也山海無變遷而人世有廢興樂不在乎山海而寓於人心之所感由前而思宜可樂也由後而思亦可傷矣古旣以淫侈佚樂而至於亡今當還定復振之初而遽欲蹈其前轍以不慮於後患乎是亦後之登斯樓者所當知知而爲戒者也余謫是府適當斯樓之成請記于壁予不得辭嗚呼蒙庵作鼓以增一邑之華侈朴侯作樓以基一邑之勤儉則其流聲遺澤之長當勝於一鼓也遠矣哉是爲之記洪武庚午正月日

 

서 루 기
 
                                                                               권 근

 영해는 즉 옛날의 덕원(德原)이다. 산에 막혀 있고 바다에 임(臨)하고 있으며, 땅은 구석지고 깊숙이 숨어 있다.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많고, 겨울에도 대단한 추위가 없어 얼음이 얼지 않는다. 수산물(魚鼈)과 전복, 조개 등 해산물의 생산이 많다.
 옛날 태평시절에는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풍족하였으며, 송사(訟事)가 거의 없었다.집집마다 거문고를 갖고 있으면서 사람들은 줄을 고르고, 곡(曲)을 붙이는데 공교(工巧)로웠다. 노래하는 목청과 춤추는 자태(姿態)는 맑고도 예뻐서 정대지승(亭臺之勝)에 이르러서는 거의 선경(仙境)과 같았으며, 몽암 시중 이혼이 이 고을에 좌천(左遷, 謫宦)되었을 때에, 바다에 떠 있는 나무를 얻어서 무고(舞鼓)를 만들어서 그 가락(節度)를 가르치니, 그 소리가 굉장하였으며, 그 춤의 변화무상(變轉)함은 펄펄 나는 두 마리의 나비가 꽃을 둘러싸고 노는 것 같고, 높이 날아오르듯 날래고 사나운 용감한 기세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다투듯 하니, 나비가 봄을 재촉하는 것보다 화기(和氣)가 있고, 용이 적을 다투는 것보다 더욱 더 힘차는 듯 하였다.
  이것이 영해부의 가장 크고 기이한 광경이어서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다. 풍속을 살피며, 절월(節鉞)을 가진 인사들은 반드시 와서 유람하고 관찰하였으니, 실로 영해는 한 방면(方面)의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이러한 곳이 왜구가 일어나고 부터 날로 쇠체(衰替)하더니 신유년(1381)에는 그 화(禍)가 더욱 격렬하였다. 성과 읍은 폐허가 되고 여염은 불타버렸다. 두어 해 동안을 적의 소굴이 되게 내버려두니, 관리들은 다른 고을에 가서 붙어 살고, 범과 산돼지는 옛마을에 와서 깃들었다. 변방이 이미 이즈러지니 왜구의 침입은 더욱 심해져서, 계해년(1383) 여름에는 원주와 춘천을 거쳐서 철원의 경계를 와서 침노하며, 양주·광주를 침략하고, 공주의 수령을 살해하는 일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왜구는 모두 축산도를 거쳐서 들어 온 것이다.
  한 고을(邑)의 방어의 실패로 삼도(三道)가 해를 입었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다는 것은 이처럼 참혹한 것이었다. 다음해 갑자년(1384)에 원수 윤가관 공이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시)로부터 출발하여 진무(鎭撫)하면서 바다를 따라 북으로 올라와서 마침내 이 고을에 이르러서는, 가시덤불 속에 원수의 절월(節鉞)을 멈춰 세우고 둘러보며 탄식을 거듭하였다.
  이에 성을 쌓아서 나라 경계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여 즉시 역전(驛傳)을 통해 계문(啓聞)하였더니, 묘당(廟堂)의 의논이 그렇게 하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수비의 곤란함을 알고 난감(難堪)해 하였다. 마침 김군 을보(金君 乙寶)가 자원하고 나서니, 부월(斧鉞)과 인절(印節)을 수여하여 만부장(萬夫長)을 삼아 계림과 안동의 군사 2천명을 이 고을에 출동시켰다. 이에 뭇 왜구들이 소요(騷擾)를 일으키고 양탈(攘奪)하는 가운데서 한편으로 적을 방어하고 한편으로 성을 쌓았는데, 7월에 시작하여 한달만에 마치었다.
  또 축산도에 전선(戰船)을 배치하고는 지키는 군졸을 두게 되니 왜구가 여기에 배를 대고 생활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 고을이 재건되어 굳건하여 지니 여러 고을들이 편안함을 얻게 되었다. 모두 윤공이 성을 쌓은 덕택이다. 이 때로부터 유리(流離)하여 남의 고을에 붙어 살던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백성의 집들도 거칠게나마 겨우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무진년(1388) 정월에 실화(失火)로 공·사(公·私)간 건물들과 같이 연소되어 완전히 다 타 버렸는데, 기사년(1389) 봄에 병마사 박후 문부(朴侯 文富)가 왔는데, 남은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 힘써 관대한 정치를 시행하며, 백성으로서 생업을 잃고 유리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고, 관리로서 허가없이 중이 된 자들을 환속시키는 등 그 노고와 안일을 균평(均平)하게 하였으며, 그 주리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여 따뜻이 보호하고 어루만져서 마 치 갓난 아기처럼 돌봐 주었다.
  역마(驛馬)를 타고 온 사자(使者)가 비록 미관(微官)일지라도 반드시 묵고 있는 객관에 가서 위로하고 대접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은 벼슬이 높고 저 사람은 낮은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극진히 하십니까.” 하니, 후(侯)가 말하기를 “저 사람은 손님이고 나는 주인이다. 손님과 주인 사이에 어찌 자급(資級)과 품계(品階) 등을 따질 수 있겠는가. 저 사람이 혹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함부로 위세를 부려 관리와 백성을 혹독하게 꾸짖는다면 내가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내가 저 사람에게 후하게 하면 저 사람도 반드시 성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오는 자들도 감복하여 즐거워하였으며, 관리들도 꾸짖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이 해에 왜구가 밤에 다시 와서 해안에 정박하고 있었다. 후(侯)가 듣고는 즉시 성문을 열고 말에 채찍질하여 나가려 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적이 어두운 밤을 타고 왔으니 적변(賊變)이 장차 어떻게 될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군사는 고립되어 있고 수가 약하니 적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벽을 굳게 지키며 기다려서 만전을 기하기만 같지 않습니다.” 하였더니 후가 말하기를 “국가가 나를 인재가 아니라고 버리지 않고 한 지방을 맡겨서 백성의 생명을 책임지는 사명(司命)으로서 임무를 주었는데, 바닷가의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도 어찌 홀로이 국가의 백성들이 아니란 말인가. 적이 왔다는 것을 듣고도 구제하지 아니하여 적의 칼날 앞에 쓰러지게 한다면, 비록 내가 구차하게 산들 장차 어찌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전투에 달려가 죽는 것은 그게 바로 나의 직책이다. 또 내가 돌격해 나가면 적도 또한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군사들의 행렬에 앞장서 적진을 향하여 달려가니 적이 과연 도망쳐 달아났다.
  말을 해치는 표범과 사람을 잡아먹는 범들과 같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무리들을 단번에 무찔러서 제거하니 백성들에게는 어진 태수요, 적에게는 용감함이 이와 같으니, 고을 사람들로부터 유임(留任)을 원하는 신망(信望)을 얻고, 관찰사의 포상과 칭찬을 받도록 추천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 농한기에 백성들이 한가할 때에는 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리하고, 도로의 장해물을 제거하였으며, 옛터에서 기와를 주어다가 관사를 덮기도 하였다. 또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기를, “서문은 이미 화재로 인하여 막아버린 채 쓰지 않는데 어찌 또한 이것을 개축(改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즐거이 명령을 따르니 오래지 않아 다시 지어졌으니, 위는 누(樓)이고, 아래는 관문(關門)인데 견고하게 굳세게 되었다.
  성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은 땅이 낮고 협소(陋)하고, 남문은 산이 가까워 막혀 있지만 오직 서문만이 넓은 들을 향해 버티고 서있으니 훤히 통하고 시원스럽게 트여 있고 산은 멀리서 첩첩히 둘러싸여 있으며, 바다는 넓고 평평하면서 구비치기도 하고 트이기도 하면서 멀고 아득한 것이 한 눈에 천리가 보이는 듯하니, 실로 한 고을의 좋은 경치를 독차지하고 있다.
  만약 봄·여름·가을에 모든 집들이 일제히 농사에 힘쓰는 농사철에 이르러 이 누에 오르면,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점심을 가져가는 것이라던가, 아침에 나가 김을 매다가 저녁에 돌아오는데, 혹은 혼자 오기도 하고, 혹은 떼를 지어오는 경우도 볼 수 있으며, 혹은 종자를 심기도 하고, 혹은 수확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대개 한 고을에서 이루어져야 될 일들이 아니겠는가.
  서쪽 두둑에서도 힘써 일하고, 남쪽 이랑서는 진흙 묻혀 햇볕에서 일하고, 바람과 햇볕에 그슬리면서 부지런히 노역하여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의 온갖 상태 모두가 누의 헌창(軒窓)과 좌석 아래에서 펼쳐져 있으니 하나같이 눈앞에서 떠나지 아니하구나.
  따라서 농사를 권장하는 직책을 가진 자는 마땅히 날마다 이 누에 올라서 때때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는 오직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알아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하는 사자(使者, 즉 부사)로 하여금 부지런을 더하게 하는데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농사일의 어려움과 밥상 위의 밥알이 낱낱이 농부들의 신고(辛苦)에서 온 것을 알게 하여 부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하며,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아끼려는 마음이 왕성하게 자라서, 반드시 백성의 힘쓴 결과를 먹으면서 백성을 위한 일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이렇게 한다면 항차 그들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부수어서 그의 기름과 피를 빨아 먹으며, 쓰는 것을 사치하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켜 백성들을 근심스럽게 하는 일이야 차마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누를 지은 것이 우리 농민에게 커다란 유익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 산 모양과 바다의 빛 같은 경치의 좋은 것은 이 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옛 일에 징험(徵驗)하여 지금을 알 수 있으며, 전의 일을 거울 삼아 뒷일을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노래와 춤을 즐기던 곳도 본래 같은 산과 바다이었고, 중간에 폐허가 되었던 것도 또한 같은 산과 바다였다. 이제 이 성루를 복구한 것도 또한 같은 바다와 산인 것이다. 산과 바다는 변함이 없는데, 사람의 세상일은 폐함도 있고 흥함도 있으니, 즐거움이란 산이나 바다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마음에 느끼는 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전 일에서 생각하면 마땅히 즐길 만하지만 뒷일에서 생각하면 또한 상심할 만한 것이다. 예전에 이미 음란하고 사치하여, 안일하고 향락함으로써 망하는 데에 이르렀다가, 이제 도로 안정되어 다시 진작(振作)하는 첫 머리에 있어서 문득 엎어진 앞수레 바퀴자국을 밟고자 하니 뒷날의 근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 또한 뒷날 이 누에 오르는 자들이 마땅히 알아서 경계해야 할 바이다. 내가 이 고을에 귀양살이를 왔더니 마침 이 누를 낙성하는 때여서 벽(壁)에 걸 기문(記文)을 써 주길 청하는데 내가 사양하지 못하였다. 아! 몽암은 북을 만들어 한 고을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더하였지만 박후(朴侯)는 누를 지어서 한 고을의 근검(勤儉)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소리는 흘러 가버리지만 남아 있는 은택(恩澤)은 마땅히 한 개의 북보다 훨씬 나은 장거(壯擧)일 것이며, 길고 멀리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기를 쓴다.

< 참고문헌>

ㆍ 영덕향교, 「영영승람」, 1935.
ㆍ「세종실록지리지」
ㆍ「경상도지리지」
ㆍ「경상도속찬지리지」
ㆍ「단양부지」
ㆍ「경상도 영덕, 영해읍지」
ㆍ「임원경제지」
ㆍ「교남지」
ㆍ「영해부사례」, 「영덕현사례」
ㆍ「신증동국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