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덕경찰서

1) 연 혁

  우리나라에 현대적 의미의 경찰서가 생긴 것은 1894년 7월의 갑오경장에 따른 「경무청관제직장 (警務廳官制職掌)」 및 「행정경찰장정(章程)」에 의거하여 종래의 좌·우 포도청을 폐지하고 서울에 경무청(警務廳)을 두고 내무아문에 속하게 한 후 그 장(長)으로서 경무대신을 둔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895년에는 칙령 제85호로 「경무청관제」를 제정하여 근대 경찰제도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1902년에는 경무대신을 없애고 경찰권을 내무대신에 이관하여 경찰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후 1905년 일제에 의하여 통감부가 설치되자 일제는 경무총장을 한국주둔 일본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각 도의 경무부장은 각 도의 헌병대장으로 임명하는 등, 일제는 한일병탄의 야욕을 달성할 도구로 경찰제도를 이용하였다.
  한편 우리 지역 영덕관내에 언제부터 현대적 의미의 경찰관서가 설치되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고증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근대적 의미의 경찰제도가 갑오경장 이후 중앙에 경무청이 생긴 이후부터 도입된 것이라고 본다면 당시의 영덕군이나 영해군에도 지방수령의 관할 아래에 근대적 의미의 경찰업무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격적인 경찰관서가 우리 지역에 들어서게 된 것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로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1905년 이후로 보이며, 통감부가 설치된 이듬해인 1906년 8월 10일에 전국 지방경무서 밑에 경무분파소를 설치할 때 영덕경찰서는 경주경무고문분파소라는 명칭으로 설립된 것이 처음이다. 이렇게 설립된 영덕분파소는 처음에 경주분서(慶州分署)에 소속되어 있다가 1907년 8월에 가서 영해경무고문분견소에 이속되었다.
  1908년에 들어와서 1월 1일부터 관제개혁에 의하여 종래의 분파소가 순사주재소로 변경되는 등, 경찰제도의 변경이 있었는데, 이때 경상북도는 대구경찰서 관내에 5개의 분서 즉 상주, 영천, 경주, 영해, 안동의 5개의 분서를 두었다.
  영해분서에는 청하, 영덕, 영양을 관할지역으로 하여 이 지역에 각기의 순사주재소를 두고 치안 및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동년 7월 20일에는 통감부가 각도에 내무부와 경찰부를 신설할 때 경북경찰부 산하에 대구, 상주, 영천, 경주, 영해, 안동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청하순사주재소와 영양순사주재소, 그리고 영덕순사주재소를 영해경찰서 관할로 소속시켰다.
  1909년 1월 22일에는 한일병탄을 앞두고 시행된 경찰제도의 개편으로 이때 전국 각지에 많은 경찰서와 순사주재소를 증설하였는데, 영덕지역은 종래의 영해경찰서를 폐지하고 영덕에 영덕경찰서를 신설하였으며, 이해 10월 27일에 청하, 영덕, 영해, 영양, 영양수비순사주재소를 관할주재소로 하였다.
  191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는 한일병탄을 대비하여 종전의 경찰관서로는 한민족의 대대적인 반대를 진압하기 곤란하리라는 점을 생각하여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구한국의 경찰제도를 1910년 6월 24일 「한국의 경찰사무위탁에 관한 각서」를 통하여 일제 통감부에 완전히 귀속시켰으며, 1910년 8월 5일에는 통감부령 제42호인 「경찰서의 직무를 행할 헌병부대의 명칭, 위치 및 관할 구역표」라는 법령으로 경북지역의 김천, 함창, 대구, 순흥, 영양, 청하에 6개의 헌병분대를 설치하여 경찰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청하헌병분견대는 포항분견소와 진안(眞安)분견소, 인비분견소, 흥해파견소, 장사파견소를 두었는데, 진안분견소는 영덕군의 중남면(현 강구면, 영덕읍의 일부지역)과 외남면(현 남정면) 일부지역, 그리고 서면(현 달산면)을 관할지역으로 하고 분견소 소재지를 서면에 두었으며, 장사파견소는 외남면 일부지역을 담당하도록 하여 소재지를 남정면 장사리에 두었다. 영양헌병 분대는 영양군과 영해군, 그리고 예안군 일부를 관할지역으로 하였다.
  한편으로 1910년 8월 5일 통감부령 제43호인 「헌병대 관구 및 배치표」에 의하여 당시의 영덕군과 영해군은 영양헌병대의 관할구역으로 영덕과 영해에 분견소가 설치되었다. 또한 동일 날짜로 통감부령 제44호인 「경무부 및 경찰서의 명칭 위치 및 관할 구역표」에 의하여 영덕경찰서는 경상남도경무국내 경상북도경무부 소속 영덕경찰서가 되어 영덕군과 진보군, 청송군의 일부지역을 관할지역으로 하여 개편되었다.
  위와 같은 헌병경찰제는 이후 10여 년간 한민족을 탄압하는 도구로써 충실한 역할을 하였으나 1919년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만세의거에 따라 일제의 한반도 통치의 방식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뀜에 따라 「조선총독부관제」를 개정하여 종전까지 경찰집행기관이었던 헌병을 경찰업무에서 제외시키고 경찰사무를 경찰관서가 관할하도록 하는 단일체제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헌병기관에 경찰업무의 대부분을 위임하였던 영덕경찰서는 1919년 8월 1일에 다시 제기능을 찾아서 경찰업무를 시작하였다. 이후 영덕면은 본서 직할로 하고 남정, 강구, 달산, 지품, 축산, 영해, 창수, 병곡의 8개 면에 주재소를 설치하여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광복이 되자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 21일 군정청 경무국을 창설하여, 해방 공간의 치안을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이날이 현재까지도 국립경찰창립 기념일로 하고 있다. 1946년 1월 16일에는 군정경(軍政警) 제23104호에 의하여 경시는 경감으로, 경무보는 경위로, 순사부장은 경사, 순사는 순경으로 개칭하고 주재소를 지서로 하도록 하는 제도의 변경이 있었다.
  이러한 제도의 변경에 따라 영덕경찰서는 1946년 4월 1일에 제5관구 경찰청인 경상북도 경찰부 소속의 제13구 경찰서가 되었다가 1949년 2월 12일 대통령령 제59호에 의하여 영덕경찰서로 개칭하였다.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립경찰로 거듭나면서 오늘날의 영덕경찰서가 되었다. 그리고 1995년 1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14512호에 의하여 경찰서 하부조직으로 주민치안을 위하여 직접 대민과 접촉하고 있는 지서를 파출소로 개칭하였다.
  영덕경찰서가 업무를 보던 경찰청사는 구한말 이후 일제시대 초기까지 영덕읍성 내의 객사(客舍)에서 업무를 보았으며, 1922년 3월 20일에 가서야 현재의 영덕읍 남석리 313-4번지에 대지 1,562평, 건평130평, 기타 30여평을 신축하여 치안업무를 담당하였다.
  광복 이후 1971년 4월 19일에는 정부의 구경찰청사 신축계획에 따라 영덕경찰서의 구건물을 헐고 공사를 시작하여 동년 8월 28일에 청사를 준공하였으며, 1997년 12월 2일에는 영덕경찰서를 영덕읍 남산 59-3번지로 이전하여 대지 3,518평,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건평 1,064평, 부속 건물 6동 215평의 최신식 건물을 지어 이전하였다.
  현재의 영덕경찰서의 관할지역은 영덕군 전체로 하며, 7개 파출소, 2개분소, 1개의 경찰초소와 2개의 해안초소로 관내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2) 편 제

  1999년 12월 31일 현재의 영덕경찰서의 편제는 경찰서장을 정점으로 청문감사관, 경무과, 방범교통과, 수사과, 정보보안과 4과와 각 과에 소속되어 있는 11개의 계와 7개의 파출소, 2개의 분소, 1개의 경찰초소와 2개의 해안초소로 이루어져 있다.
  1999년 12월 31일 현재 영덕경찰서의 기구표는 아래의 표 〈4- 70 〉와 같다.

3) 역대 경찰서장 명단

2. 관내 파출소 현황

1) 영덕 중앙파출소

(1) 연 혁

  영덕중앙파출소는 1914년 3월 1일의 부군현 행정구역개편 이전에는 영덕경찰서 외근직할로 당시의 읍내면(현재 영덕읍)을 관할지역으로 하여 치안을 담당하였다. 1914년 이후에도 영덕경찰서 직할로 영덕면(현재의 영덕읍)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여 왔다.
  광복 이후 1957년 3월 27일에는 영덕경찰서 직할 경찰관 파출소로 계속 면내의 치안을 담당하여 왔으며, 1963년 11월 12일에는 경상북도 규칙 제167호에 의하여 경찰관 파출소로 개칭하여 본서의 구내에 설치되어 면내의 치안을 담당하여 왔다.
  1964년 9월 30일에는 경찰서 구내에서 남석 3동 69-5번지로 이전하여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으며, 1965년 2월 15일에는 경상북도 규칙 제200호에 의하여 남석동 69번지로 위치를 변경하였다.
  1966년 5월 25일에는 남석 3동 5-3번지에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1971년 5월 4일에는 경상북도 규칙 제497호에 의하여 영덕경찰서 중앙파출소로 개칭하였다.
  1995년 10월 30일에는 대지 46평, 건평 39평의 2층 콘크리트 슬라브 건물로 청사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역대 파출소장 명단

2) 강구파출소

(1) 연 혁

  현재의 강구파출소는 강구면 강구리 75-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18년 8월 당시의 영덕면 강구리 345번지에 함석건물로 신설되어 일본인 순사부장 1명과 순사 1명이 주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강구파출소가 현재의 강구면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강구는 1914년 3월 1일의 행정구역 조정으로 영덕면에 속하여 있었다. 그러나 1900년 초부터 오십천 하구의 천연항구인 강구항을 중심으로 일본 본토에서 원정온 일본인 어부들이 동해안 일대의 풍부한 어족을 잡아가기 위하여 강구항을 그들의 어업 전진기지로 삼게 되면서부터 점차 번성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관계로 치안의 확보를 위하여 일제는 강구, 오포, 상직, 하직, 소월, 하전, 삼사, 금진, 하저동을 관할하는 영덕경찰서 강구순사주재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1925년 7월에는 대홍수로 강구항을 중심으로 하여 전지역이 침수되면서 주재소 건물도 침수가 되어 영덕면 강구리 336번지에 이건하였다. 1933년 5월에는 도로신설에 따라 강구리 345번지로 다시 이전하게 되었다.
  1934년 4월 1일 군 행정구역 개편 때 영덕면의 일부가 분리되어 강구면이 신설되자 강구경찰관주재소는 강구면을 전담하는 주재소가 되었다. 1942년에는 현재의 위치인 강구면 강구리 75-1번지에 대지 64평, 청사 20평을 신축 이전하였다.
  1948년에는 방화로 거의 소실되어 소방회관을 임시로 사용하였으며, 1950년 8월에는 6.25전쟁으로 청사와 사택이 완전히 파괴 소실되었는데, 1952년 1월 10일에 당시 면민들의 협조로 콘크리트건물로 새로이 신축하여 전쟁 전후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1989년 10월 21일에는 1층 20평, 2층 19평의 시멘트 벽돌조 슬라브 건물을 새로이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5년 1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14512호에 의하여 강구파출소로 개칭되었다.

(2) 역대 파출소장 명단

3) 남정파출소

(1) 연 혁

  1910년 8월 5일의 통감부령 제43호에 의하여 청하헌병분견대 장사파견소로 설치가 되어 당시의 본군 외남면(현 남정면)의 일부지역을 관할하였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남면이 남정면으로 개칭되자 남정면 전지역을 관할지역으로 하였다.
  1919년 8월 20일 일제가 종래의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경찰이 중심이 되는 제도로 개편하면서 남정경찰관주재소가 되었다. 광복 이후 1946년 1월 16일에 주재소란 명칭을 지서라고 개칭함에 따라 영덕경찰서 남정지소가 되었다.
  1966년 4월 12일에는 국비와 주민의 부담으로 청사를 신축하였으며, 1995년 10월 13일에는 벽돌 슬라브 2층, 40평의 건물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역대 파출소장 명단

4) 달산파출(분)소

(1) 연 혁

  1910년 8월 5일 통감부령 제42호에 의하여 당시의 외남면(현 남정면) 일부 지역과 중남면(현 영덕읍, 강구면) 일부 지역, 그리고 서면(현 달산면)을 관할지역으로 하여 청하헌병분견대 진안분견소가 서면의 대지리(大枝里)에 위치하면서 영덕군 서남부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1919년 8월 20일 3.1의거의 후속조치로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고 경찰제도로 복귀되자 1920년 3월 20일에 달산면 대지리에 영덕경찰서 달산경찰관주재소로 개칭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는 동년 10월에 설치된 인민위원회의 치안대에 접수되었다가 동년 12월 26일에 미군정청에서 정식으로 영덕경찰서장이 임명되자 영덕경찰서에 인수되어 경사 1명, 순경 5명이 배치되어 광복 공간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1946년 4월 1일에는 달산지서로 개칭되었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과 동시에 내무부로 소속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에는 지서가 파출소로 개칭되었다.
  2000년 6월 7일에는 달산파출소가 폐합되고 분소가 되어 지품파출소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어 지품파출소 달산분소가 되었다.
  청사는 1921년 6월 20일 대지리에 대지 95평, 건평 30평으로 신축하였으나 너무 낡아 1977년 12월 27일 대지 95평, 건평 32평의 최신식 건물로 신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역대 파출(분)소장 명단

5) 지품파출소

(1) 연 혁

  1910년 통감부 고시 제170호에 의하여 영덕경찰서 지품순사주재소가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시의 북면이 지품면으로 개칭되자 지품면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하고, 주재소를 원전리에 두었다.
  1919년 3.1의거의 후속조치로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고 경찰제도가 부활하자 1919년 12월에 신안리 108번지에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영덕경찰서 지품경찰관주재소라 하였다.
  1920년 5월 5일에는 주재소를 신안으로 이전하였으며, 1928년 10월에는 오천리의 광업소 개발로 인구가 늘어나자 오천에 순사출장소를 설치하여 삼화, 오천리를 관할하도록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인민위원회 치안대가 장악하고 있던 것을 동년 12월 26일에 미군정 영덕경찰서에 접수되어 광복 공간의 치안을 담당하였으며, 1946년 1월 15일에는 경사 1명, 순경 5명이 배치되었으며, 1949년 2월 15일에는 대통령령 제59호에 의하여 영덕경찰서 지품지서로 개칭되었다.
  1950년 2월 18일에는 당시의 혼란한 치안상황에 따라 원전출장소를 설치하여 황장, 기사, 지품, 원전, 복곡, 수암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1954년 9월 28일 도규칙 제45호에 의하여 원전경찰관출장소로 개칭되었다가 동년 10월 23일 동출장소가 폐지되어 지품지서에 흡수되었으며, 1963년 5월 3일에는 원전검문소가 새로이 설치되었다.

 1979년 12월 11일에는 신안리 163-1번지에 벽돌조 슬라브 2층 27.8평의 청사를 신축하였으며, 1995년 1월 1일에는 지품지서에서 지품파출서로 개칭되었다. 1999년 2월 2일에는 새로이 청사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0년 6월 7일에는 달산파출소가 분소가 되어 지품파출소에 통합되었다.

(2) 역대 파출소장 명단

6) 축산파출소

(1) 연 혁

  1910년 8월 5일에 영양헌병대 영해분견소에 속해 있다가 1919년 3.1만세의거의 영향으로 헌병경찰제가 폐지되자 1919년 9월 23일 영덕경찰서 축산경찰관주재소로 축산면 축산동에 설치되었다.
  1946년 1월 16일에는 직제 개정에 따라 축산지서로 개칭하였으며, 광복 공간의 혼란한 치안상태에 따라 1949년 3월 21일에는 도곡동에 도곡지서를 신설하여 면내의 치안을 양 지서에서 관장하였다. 그러나 1953년 휴전이 되고 점차 치안상태가 호전되자 1954년 7월 15일 경상북도규칙 제45호에 의거하여 축산지서를 도곡지서에 편입하였다.
  1954년 10월 15일에는 경상북도규칙 제50호에 의하여 도곡지서를 축산지서로 개칭하였으며, 1965년 5월 11일에는 경상북도규칙 제205호에 의하여 축산항에다 영덕경찰서 축산항출장소를 신설하여 해안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1975년 10월 27일에는 경상북도규칙 제763호에 의하여 축산항출장소가 축산항지서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에는 축산지서와 축산항지서가 각각 파출소로 개칭되었으며, 1998년 7월 10일에는 축산파출소와 축산항파출소를 통합하여 축산항파출소가 있는 위치에 축산파출소를 개소하였다.

(2) 역대 파출소장 명단

(3) 축산항 출장소·파출소장 명단

7) 영해파출소

(1) 연 혁

  1910년 8월 5일 영양헌병대 영해분견소로 설치되어 영해, 축산, 병곡, 창수의 4개면을 관할하여 오다가 1920년 8월 20일 영덕경찰서 영해경찰관주재소로 시작되었으며, 1928년 11월 21일에는 대진동에 대진경찰관주재소를 설치하여 대진과 사진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혼란한 치안의 확보를 위하여 영해와 대진주재소를 영해지서와 대진지서로 개칭하여 광복 전후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1952년 10월 10일에는 경상북도규칙 제132호로 대진지서를 영해지서에 통합하고, 동년 10월 8일에 묘곡동에 묘곡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54년 5월 17일에는 경상북도규칙 제42호에 의해 묘곡출장소가 묘곡지서로 개칭되었다가 동년 7월 15일 경상북도규칙 제45호에 의해 시 묘곡출장소로 개칭되었다. 동년 10월 23일에는 경상북도규칙 제424호에 의하여 묘곡출장소가 영해지서에 통합되었다.
  영해파출소 청사는 6.25전쟁 중에 파괴되었던 것을 1952년 1월 10일에 면민들의 협조로 복구하여 이용하여 오다가 1956년 5월 31일에 신청사를 준공하였으며, 1985년 7월 20일에 다시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5년 1월 1일에는 영해지서가 영해파출소로 개칭되었으며, 2000년 6월 5일에는 창수파출소가 영해파출소 창수분소로 편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역대 파출소장 명단

8) 병곡파출소

(1) 연 혁

  1914년 당시의 북초면과 북이면을 통합하여 병곡면을 두면서 병곡분파소로 존재하다가 1916년 3월 7일에 영덕경찰서 병곡경찰관주재소로 변경되었다. 1945년 12월 26일에는 미군정하의 군정경찰로 편입되었다가 1946년에는 직제개편으로 병곡지서로 개칭되어 광복 전후의 치안을 담당하였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국립경찰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5년 1월 1일에는 병곡지서가 병곡파출소로 개칭되었으며, 청사는 1992년 11월 25일에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역대 파출소장 명단

9) 창수파출(분)소

(1) 연 혁

  1915년 9월 영해헌병분견대 영해파견소가 설치되어 경찰업무를 담당하여 왔으며, 1919년 3월 18일의 만세의거 때에 헌병파견소가 피습됨에 따라 신기동으로 이전하기로 하고 동년 10월에 신기동 60-6번지에 새로이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제5관구 경찰청 제13구 경찰서 창수지서로 지역의 경찰업무를 행하여 오던 중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자 영덕경찰서 창수지서가 되었다.
  1981년 6월 20일에는 구청사 목조건물을 철거하고 신청사를 신축하였으며, 1995년 1월 1일에는 창수지서가 창수파출소로 개칭되었다가 2000년 6월 5일에는 창수면 지역의 치안수요의 감소로 창수파출소는 영해파출소 창수분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역대 파출소장 명단

3. 포항해양경찰서 강구선박출입항신고소

  군 관내 선박출입항 관련업무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89년 1월 20일까지는 영덕경찰서가 관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 1월 20일부터는 포항해양경찰서 관할로 업무가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포선박출입항신고소가 1956년 3월 15일에 영덕경찰서 창포선박임검소로 개소되어 군내에서는 제일 먼저 개설되었으며, 이어서 1957년 5월 18일에는 강구지서가 영덕경찰서 강구임검소로 개설되고, 1962년 1월 1일에는 대진선박출입항신고소가 영덕경찰서 대진선박임검소로 개설되었으며, 축산선박출입항신고소는 1987년 10월 1일에 영덕경찰서 축산선박임검소로 개설되었다. 이후 이들 임검소는 1989년 1월 20일자로 포항해양경찰서로 업무와 관할이 이관되었으며, 구계항 선박출입항신고소는 1995년 12월 28일에 개설되었다.
  현재 이들 선박출입항신고소는 포항해양경찰서 강구지서의 예하 신고소로 어민들의 해상안전 조업과 불온, 불순분자들의 방비 등 해상치안활동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1) 강구지서

(1) 연 혁

  1957년 5월 18일 영덕경찰서 강구임검소로 발족하여 1989년 1월 20일 포항해양경찰서로 업무가 이관되어 1991년 8월 1일 강구선박출입항신고소로 개칭되었다가 1996년 2월 1일 포항해양경찰서 강구지서로 승격되었다. 강구지서 예하 신고소로는 구계, 창포, 축산, 대진신고소가 있으며 치안수요 관할구역은 북으로 영덕군 병곡면 백석리에서 남으로 남정면 부경리까지 해안선 53km에 대한 선박출입항 및 불법어로단속, 해상오염사범단속 등 해상에 관련된 모든 해상치안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2001년 1월 7일 슬라브 2층, 40평 건물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역대 지서장 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