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지역에서는 일제시대부터 좌익활동을 하던 이경석(李慶錫)과 이부암(李富岩), 권병술(權炳述), 이양우(李良雨), 권병희 등의 주도로 1945년 12월에 인민위원회와 이와 관련된 여러 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 때 관련단체로 결성된 농민조합의 대표로 전농 결성식에 이태석과 김상순, 정천보가 참석하였으며, 부녀동맹과 청년동맹도 결성되어 인민위원회와 연계하여 지역의 정치적인 상황에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이 광복 공간에 지역에서 활약한 인민위원회와 부녀동맹 관련 인사들 중 현재까지 신원이 밝혀진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덕군인민위원회〉 영덕군인민위원회위원장 : 이경석 영덕군인민위원회치안대장 : 권병술 영덕군인민위원회총무부장 : 권병화 영해면인민위원회위원장 : 권병희 영덕면인민위원회위원장 : 이태석 강구면인민위원회위원장 : 서창구, 정해봉(남로당 강구면책) 남정면인민위원회위원장 : 이병화 달산면인민위원회위원장 : 이기양 지품면인민위원회위원장 :신수형(초대), 김수영(2대), 이응춘(3대) 축산면인민위원회위원장 : 배금함, 이쫛쫛, 박명옥 병곡면인민위원회위원장 : 권삼달, 주순술, 김혁동 창수면인민위원회위원장 : 남영희
〈영덕군부녀동맹〉 위 원 장 : 임익선(林益善) 부위원장 : 이종생(李種生) 총무부장 : 이용해(李龍海) 재무부장 : 주덕희(朱德熙) 조직부장 : 이수연(李壽連) 선전부장 : 정영익(鄭永益) 소녀부장 : 김을선(金乙先)
광복 직후의 정치적 상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건준과 건준의 후속조직인 인민위원회 등에는 일제 강점하에서 조국광복이란 목표 아래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많은 인사들이 좌우익의 이념을 떠나서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좌우익의 공존은 1945년 12월 17일에 있었던 모스코바에서 개최되었던 미·영·소 3국 외상들의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발표되고부터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신탁통치안이 발표될 당시에는 신탁통치안을 반대하던 좌익계열이 1946년에 들어오면서 찬성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자 이에 반대하는 우익진영은 이를 격렬히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좌우익 진영은 서로 자기합리화와 상대방을 헐뜯는 비난전(非難戰)을 주고받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서로 자기세력을 결집하여 각기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이란 단체를 결성하여 대립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중앙 정치정세의 여파가 각 지방에도 미치기 시작하였는데, 경북지역에서도 위의 여파로 좌우익 진영의 갈등이 시작되어 서로 각자의 단체를 결성하여 서로 대립을 격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우익진영에서는 1946년 3월 17일에 이미 결성되어 있던「조선독립경북촉성회」와 「탁치반대국민총동원경북위원회」를 합쳐 「대한독립촉진경북국민회」를 대구에서 발족하는 한편, 경상북도 전역에 지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좌익진영에서도 좌익할동을 하던 여러 단체를 3월 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위원회」로 통합결성하여 도내 좌익진영의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영덕에서도 위와 같은 중앙 단위의 정세변동에 따라 이미 결성된 좌익진영의 인민위원회와 좌익 관련단체들은 전열을 정비하여 우익진영과 대항할 준비를 하였으며, 우익진영은 새로이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영덕지부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영덕청년연맹, 그리고 애국부인회 등을 결성하여 지역정치의 주도권을 잡고자 양 진영이 서로 대결하기 시작하였다.
1) 10.1폭동과 달산사건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발생한 10.1폭동은 부족한 식량사정을 원인으로 발생하여 결국은 좌우익 이념 대립으로까지 번져 무수히 많은 좌우익 인사가 피해를 입은 역사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 준 사건이다. 대구지역은 광복 당시부터 부족한 식량사정으로 호남지역과 타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구입하는데 혈안이 될 정도로 식량사정이 최악이었다. 시민들은 일제 강점하에서는 일제의 미봉책과 강압책으로 겨우 하루하루를 넘기면서 연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이 되자 점령군과 일제관리들의 업무 인수인계 등의 일로 일시적인 행정의 마비와 업무를 인수한 미군정 당국의 실정(失政)으로 대구지역의 식량사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간파한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지도부는 이를 자기들 정치 선전공세의 지랫대로 삼고자 하여 동년 9월 23일자로 대구지방의 철도노조와 운송노조에 파업지시를 내리게 된다. 중앙의 파업지시에 따라 대구에서는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를 설치하고 이 평의회의 지시에 따라 철도노조와 운송노조에 소속된 1천여명의 종사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당시의 중요한 운송기관인 철도관련 단체가 파업을 시작하자 철도운송에 의지하던 대구시내의 식량사정은 더욱 더 악화되어 대구시민들의 불만은 점차 높아졌다. 이와 함께 우체국과 여타 생산업체들도 동조파업을 하는 등 대구와 경북 일원에서 점차 파업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으며, 민심도 극도로 뒤숭숭하여 무슨 일이 곧 발생할 것 같은 불안한 기운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0월 1일이 되자 파업의 지도부인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와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당국간의 마찰로 대구평의회에서 내건 「파업투쟁위원회」란 간판이 경찰에 의하여 철거되자 이를 빌미로 본격적인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평의회원과 일부시민, 학생들이 파업투쟁위원회 간판의 원상회복을 요구하면서 경찰당국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위는 밤새껏 계속되어 시내 곳곳에서 진압하는 경찰들과 접전을 벌이면서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다. 이튿날인 2일 새벽까지 간간이 진행되던 시위는 신원불명의 시체 1구가 발견되자 이것이 경찰에 의한 것으로 속단(速斷)한 일부 군중들의 선동에 의하여 더욱 더 격렬하여져 마침내 일부시위대는 폭도로 변하여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경찰관과 행정관리, 우익계 인사들을 살해하는 등 완전히 무법천지를 만들며 시내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였다. 한편 대구, 경북 일원의 치안을 맡고 있던 미군정 당국과 군정경찰은 10.1일 폭동이 식량부족의 해결차원을 넘어서 정치적 차원으로 변모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하여 수습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미군정 당국은 포고령 제1호를 발령하여 대구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과 군정경찰을 주축으로 시위진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대구시내는 미군과 경찰력의 도움으로 폭동이 진압되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구시내의 안정과는 달리 폭동의 여파가 경북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대구시내의 폭동이 미군과 경찰에 의하여 진압되어 가자 폭동의 주동자들은 미군과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대구 인근의 농촌지역으로 피신하면서 폭동사태를 확산시켰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들은 이전부터 조직되어 있던 각 농촌의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부녀동맹, 농민조합 등의 좌익계 단체 등과 연계하여 폭동사태를 계속 확대시켜 나갔다. 10월 1일에 대구에서 시작된 폭동사태가 벌써 2일에는 영천, 경주, 김천, 상주, 안동, 영주, 예천, 달성, 칠곡, 군위, 고령, 의성 등지로 번져 거의 경북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0월 4일에는 영덕지역에 까지 파급되어 이 지역에도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다. 영덕지역은 일제 강점기부터 좌익활동에 심취하여 광복 공간에서 남로당의 거물급 인사가 된 이기석을 배출할 정도로 좌익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다수 있었으며, 광복 후 인민위원회를 즉시에 구성할 정도로 그 조직도 탄탄하였다. 대구의 10.1폭동이 일어나자 좌익진영의 지령을 받은 영덕지역은 강구와 남정, 달산과 지품, 영덕을 나누어 동시에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영덕 장날을 거사일로 삼았다. 그러나 미군과 치안당국의 집중적인 감시로 10월 4일의 거사가 여의치 못함을 알고 지역의 좌익지도부는 거사일을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달산면의 좌익 책임자들과는 연락이 되지 못하여 거사일의 연기를 통보하지 못하였으며, 통보받지 못한 달산면 좌익 책임자들은 10월 4일의 폭동준비를 착실히 하면서 거사당일을 기다렸다. 10월 4일은 마침 달산초등학교(국민학교)의 가을운동회가 열리는 날로 면내의 각급 기관 단체장과 많은 학부형들이 모이는 날로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날 지도부의 지령에 따라 아침부터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운동장가에서 술추렴을 하며 정해진 시간이 되도록 기다렸다. 운동회가 거의 끝나고 폐회가 되기 직전인 오후 3시경이 되자 아침부터 농주(農酒)에 취한 농민들과 좌익단체원들이 하나 둘 운동장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 때 좌익지도부의 책임자 1명이 단상에 올라가 토지개혁 등의 시국정세에 대하여 일장연설을 한 후 구호를 외치며, 군중들을 선동하자 운동장에 모인 군중들은 같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면서 웅성웅성 그리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운동회장은 좌익들의 선동장이 되어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지는 등 점차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였다. 일부 조직화된 좌익계열 인사들은 교문을 나와 옥계 쪽으로 향하자 군중심리에 들뜬 일부 군중들도 여기에 합세하여 운동장을 나와 옥계 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행군 중에 점차 폭도로 돌변하여 우익진영 및 행정관리들을 구타하는 한편 민가를 파괴하고 방화를 하면서 면소재지인 대지에서 옥산 쪽 나아가 흥기리에까지 진출하는 등 면내의 일부지역을 유린하였다. 이 같은 10월 4일에 있었던 달산 폭동사건은 이후 이 지역에서 좌우익이 대결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종래의 무혈대결에서 유혈대결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상황도 엄청나서 당시의 「10.1사건대책위원회」에서 작성한「10.1사건 조사 통계표(1946.10.20일 현재)」에 의하여 달산지역의 피해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망자 2명, 부상자 2명, 건물파괴 5동
또 1981년에 나온 「영덕군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① 달산면 사무소 일부 파괴 및 기물집기, 중요문서 소각, 파괴, 절취, 폐기 ② 경찰지서 파괴, 기물 서류 전파③ 우익진영 간부급 가옥 20여채 전파, 가재도구 전파 ④ 달산면장 신태순(申台淳) 타살 ⑤ 구타 중상 약 25명(중상자 중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달산면 총무부장 정원석(鄭元石)도 포함되었음) ⑥ 달산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연맹 총무 행방불명.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위와 같이 드러난 피해 이외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2) 창수면 갈천동 사건
광복 공간의 치열하였던 좌우익 투쟁에서 좌익계열의 정치활동이 불법화되자 좌익측은 그들의 전술을 바꾸어 폭력과 비폭력을 배합한 투쟁방식을 택하였는데, 이들은 서울에는 행동대를 지방에는 야산대(野山隊)를 조직하여 합법적인 투쟁 이외에 본격적인 무쟁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의 야산대를 일명 공비(共匪, 빨치산, 빨갱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야산대가 영덕지역에도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창수지서 습격사건이다. 1947년 5월 17일 창수면 갈천동에 집결한 약 100여명의 공비들은 신기동에 있는 창수지서를 습격하기로 결정하고는 비밀리에 창수지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여 이를 대비하고 있던 창수지서에서는 경찰관들과 경비대원들이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가 공비들이 습격하여 오자 신속한 대응으로 공비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싸움에서 공비측은 대장인 김필동(金必東) 외 2명이 현장에서 사살되었으며, 다수의 부상자를 낸 공비들은 뿔뿔이 흩어져 산으로 도주하였으며, 경찰측에서는 불행히도 창수지서의 경비를 위하여 차출되었던 경비대원인 박영태(朴永泰)가 순직하였다.
3) 남정 장사리의 7.15사건
남정면은 일제 강점 이래로 사회주의활동을 하여 오다 1946년 12월 남로당 제1차 중앙위원 및 중앙감찰위원 연석회의에서 박헌영과 함께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이기석(李基錫)의 고향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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