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제 강점기의 군내 항만 수축
군내의 항만시설의 신축이 논의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다. 일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항만의 신축공사는 조선의 어업이나 통상의 원활화를 위하여 항만시설을 신축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청일 및 노일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사적 측면과 식민지 어자원 수탈을 위한 필요에 의해서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의 군내의 항만시설은 강구항과 축산항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이들 항구는 통상이나 군사적인 어항으로 개발되었다. 일제는 한일병탄 이후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적으로 7개 항구의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한 항구 당 평균 공사비가 2,500원 정도로 겨우 어선의 정박시설과 방파제 공사만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강구항은 1913∼1914년 걸쳐 1차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국고보조 4,000원, 도비 3,163원 등 총 7,163원을 투입하여 방파제 50칸, 강입구절개 30칸의 공사를 하였으며, 이어 1927년 2월부터 국비 90,000원과 도비 110,000원 등, 총 200,000원을 투입하여 1930년 5월에 공사를 마무리하였는데, 이 공사의 결과 체절제(締切堤) 255m, 우안도수제(右岸導水堤) 165m, 매립 18,644㎡, 준설 4,000㎡에 이르는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어 2차 확장공사는 1931년 7월부터 1933년 사이에 있었는데, 국고보조 94,500원과 지방비 부담 94,500원의 총공사비 189,000을 투입하여 1934년 3월에 이 공사를 모두 마쳤다. 2차 공사 이후 1934년 4월에는 총공사비 130,000원을 들여 3차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3차 공사의 목적은 물량장 및 계류장, 그리고 여타 시설을 보완하기 위한 공사로 1936년 2월에 3차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3차에 걸친 공사의 결과 강구항은 우안도수제인 남쪽 방파제 255m, 북쪽 방파제 340m, 물량장 및 호안 축대가 500m에 이르는 동해안 최고의 항구로 탈바꿈하였다.
축산항에 대한 일제의 본격적인 개발은 1930년대 이후이다. 1930년 이후 동해안 지역의 명태와 정어리, 그리고 청어의 대량어획은 새로운 항구의 개발이 필요성이 증대되어 조선수산회와 어업조합에서 어항수축을 당국에 요구하여 1930년대부터 축산항의 개축이 실시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한반도의 항구를 만주사변 등의 전쟁을 대비하는 군사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공사를 하였는데, 축산항의 경우는 삼국시대이래 왜구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오히려 일제의 대중국, 대러 침략기지로 수축되었다니 역사의 또 한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여건 아래서 축산항의 신축은 1932년부터 1933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국고보조 36,000원과 지방비 36,000원 등의 총비용 72,000원을 투입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때의 축산항 신축공사로 인하여 축산도를 비롯한 주변 인근의 명승절경이 모두 훼손되어 현재는 이러한 경치를 볼 수 없어 매우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