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조선시대 수산업
1. 전기의 어업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비교적 풍부한 자료가 남아 있어 어획물의 종류와 명칭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명칭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명칭들로 보아 오늘날에 잡히는 어획물의 대부분이 조선초부터 우리나라 각처에 잡히고 있었다고 하겠다. |
특히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수산물의 유통을 용이하게 하여 수산물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켜 어업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를 다시 어종별로 살펴보면 명태와 청어가 이 시기의 중요한 어획물이었다. 특히 명태어업은 동해안을 대표하는 중요어업으로 성장하였으며, 함경도의 주요어업으로 12월부터 어망을 설치하여 잡는다고 하였다. 명태는 집산지인 원산에 수집되었다가 배나 말에 실려 전국 각처로 운송되었는데 밤낮 인마(人馬)의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청어는 자원변동이 심하기는 하였으나 거의 전 연안에서 어획되었으며, 명태와 함께 가장 많이 생산된 어류였다. 조기도 대표적 다획성 대중어의 하나로 대량 어획되었다. 「자산어보」에 의하면 어망으로 잡는데 어군(魚群)을 만나면 산더미처럼 많이 잡아 어선에 실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멸치어업도 발달하여 많이 잡혔으며 미처 말리지 못하면 비료로 쓰고, 건멸치는 밥반찬으로 이용하였다고 하였다. 균역사목(均役事目)에는 청어, 대구 방렴(防廉)이 있다고 하였는데, 방렴(方廉)의 주어획 대상은 청어와 대구로서 정조 원년(1777)의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통영 웅천에서 방렴 3회, 거제에서 어조(漁條)(정치망) 3회를 설치하였는데, 드는 비용이 2,300량(兩)이었다고 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1) 조선시대 전기의 영덕지역의 수산물 종류 예로부터 동해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영덕지역은 풍부한 영양소가 담긴 강구 오십천과 영해의 송천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지역으로 연근해에 어자원이 풍부하였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과 달리 어로기술의 미숙과 어업에 종사하는 자체가 대접받지 못한 직업으로 간주되어 어로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로 영덕지역의 어자원은 오늘날과 달리 해안인근 지역에까지 아주 풍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덕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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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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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 조선시대 전기에 이 지역에서 어획된 어종의 대부분은 현재에도 잡히는 어종들이다. 조선시대의 어구는 대부분이 정치어구(定置漁具)인 통발이나 어살 등으로 회유성 고기를 잡았는데, 오늘날도 정치망이라 하여 일정범위의 지역에 그물을 펼쳐놓고 고기가 지나가면 잡는 어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그 잡는 방법은 대개 같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전기에 많이 잡힌 청어, 문어, 송어, 광어, 고도어(고등어) 등은 요즘도 지역 정치망에 잡히는 중요한 어족이다. 그러나 당시에 잡히던 대구는 현재 거의 잡히지 않고 있다. 특이한 것은 담수어인 은구어와 해수와 담수에 동시에 살 수 있는 연어와 황어, 은어 등도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내수면 어종에도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전복이나 홍합 등의 조개류와 미역, 김 등의 해조류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주요한 해산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시대 후기의 영덕지역의 수산물 종류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도 영덕과 영해지역의 해안을 끼고 있는 마을을 중심으로 어업활동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사실은 후기에 이루어진 지방토산물의 대부분이 해산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