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조선시대 수산업

1. 전기의 어업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비교적 풍부한 자료가 남아 있어 어획물의 종류와 명칭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명칭들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명칭들로 보아 오늘날에 잡히는 어획물의 대부분이 조선초부터 우리나라 각처에 잡히고 있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어량을 어전(漁箭)으로 바꾸어 불렀는데, 세종 이후부터 바뀐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건국 후, 어업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사재감(司宰監)을 두어 어량업무를 관장케 하여 불법으로 사점(私占)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한 사어장(私漁場)을 국유로 환원하여 어량을 국가기관인 사재감에 전속시켜 어세(漁稅)를 징수케 하였다. 성종 15년(1484)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나오는 어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규정을 살펴보면 어업 자체를 아주 중요시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저도(儲道)의 어전(魚箭)은 등급을 나누어 적(籍)을 만들어 이를 호조(戶曹), 본도(本道), 본읍(本邑)에 비장(備藏) 한다. 적(籍)에 누락시킨 자는 곤장 80대에 처하고 그 이익을 관(官)에서 몰수한다. 사점(私占)한 자도 같다. 어전(魚箭)은 빈민에게 주고 3년 마다 교체한다.” 이와같이 어전의 사점(私占)을 엄격히 금지하고 빈민에게 3년씩 이용케 한 것은 오늘날의 어업면허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어업의 중요성이 매우 컸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어전어업이 발달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조기어업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는데, 조기를 어망으로 잡으며 관(官)에서는 잡은 조기에 대하여 세금을 징수하여 국용(國用)으로 쓴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기를 그물로 잡았다는 구절을 보아 조기어획용 어망어구도 개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 26년(1750) 균역법의 실시로 작성된 해세(海稅) 징수규정인 균역해세(均役海稅) 절차(節且)에 어구(漁具) 명(名)이 나타나는데, 건국 초기에 어장(漁場) 국유제가 시행되어지면서 어업제도를 개혁하였으나, 점차 어업제도가 문란해져 어장 사점(私占) 행위가 성행되었고 이것이 균역법의 시행으로 재개혁되었다. 균역법은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양포(良布) 징수를 반감한 조치였는데 이로 인한 재정상 부족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어염(漁鹽), 선세(船稅)의 징수를 강화하기 위해 국가의 세원에서 누락되어 있던 모든 사점(私占) 어장을 국가에서 환수하여 균역청에 소속시켰다. 여기에 어구명칭이나 규모, 수익성에 관한 자료가 실려있다. 1752년에 편찬된 균역사목(均役事目)에는 어전(魚箭), 토전(土箭), 주박군리세망(注朴軍罹細網) 등이 보인다. 어전은 전라도의 경우 대, 중, 소(大中小)로 나누었고 충청도 어전은 청어어전, 조기어전, 준치어전, 잡어어전으로 나누어지며 이중에서 청어, 조기어전이 유명하였다. 토전은 경기도와 황해도에 있었는데 삼대와 대나무로 발을 설치하여 새우나 게를 잡는데 사용되었다. 주박(注朴)은 충청도에 있었는데 새끼로 만든 어망을 조수(潮水)의 진퇴처(進退處)에 설치하였는데, 이는 주본망(柱本網)을 말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어구어법이 만개한 시기였으며 이때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였고, 이는 어업발달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수산물의 유통을 용이하게 하여 수산물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켜 어업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를 다시 어종별로 살펴보면 명태와 청어가 이 시기의 중요한 어획물이었다. 특히 명태어업은 동해안을 대표하는 중요어업으로 성장하였으며, 함경도의 주요어업으로 12월부터 어망을 설치하여 잡는다고 하였다. 명태는 집산지인 원산에 수집되었다가 배나 말에 실려 전국 각처로 운송되었는데 밤낮 인마(人馬)의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청어는 자원변동이 심하기는 하였으나 거의 전 연안에서 어획되었으며, 명태와 함께 가장 많이 생산된 어류였다. 조기도 대표적 다획성 대중어의 하나로 대량 어획되었다. 「자산어보」에 의하면 어망으로 잡는데 어군(魚群)을 만나면 산더미처럼 많이 잡아 어선에 실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멸치어업도 발달하여 많이 잡혔으며 미처 말리지 못하면 비료로 쓰고, 건멸치는 밥반찬으로 이용하였다고 하였다.
  균역사목(均役事目)에는 청어, 대구 방렴(防廉)이 있다고 하였는데, 방렴(方廉)의 주어획 대상은 청어와 대구로서 정조 원년(1777)의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통영 웅천에서 방렴 3회, 거제에서 어조(漁條)(정치망) 3회를 설치하였는데, 드는 비용이 2,300량(兩)이었다고 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1) 조선시대 전기의 영덕지역의 수산물 종류

  예로부터 동해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영덕지역은 풍부한 영양소가 담긴 강구 오십천과 영해의 송천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지역으로 연근해에 어자원이 풍부하였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과 달리 어로기술의 미숙과 어업에 종사하는 자체가 대접받지 못한 직업으로 간주되어 어로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로 영덕지역의 어자원은 오늘날과 달리 해안인근 지역에까지 아주 풍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에 발간된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덕·영해조를 통하여 이 당시 진공이나 토산품조에 나오는 수산물의 종류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전기에 우리 지역에서 잡힌 어종과 어획방법의 대강을 알 수 있다.

〈영덕현〉

곽(미역), 전포, 홍합, 대구어, 쌍어(雙魚) 〈경상도지리지〉

우모(우무가사리), 세모(참가사리), 해의(김), 곽(미역), 대구어, 사어, 전포(전복), 건합(말린조개), 건광어, 자해, 건대구어, 건문어, 염(소금), 은구어, 연어 〈세종실록지리지〉

송어, 복, 대구어, 문어, 사어, 청어, 백조어, 홍합, 황어, 은구어, 곽, 자해, 광어, 해삼, 세모, 방어, 연어 〈신증동국여지승람〉

〈영해부〉

곽, 우모, 세모, 대구어, 전포, 쌍어, 건합, 해의 〈경상도지리지〉

우모, 세모, 해의, 곽, 대구어, 사어, 전포, 건합 〈세종실록지리지〉

방어, 대구어, 홍어(洪魚), 청어, 문어, 송어, 광어, 연어, 자해, 고등어, 홍합, 복, 해의, 곽, 세모 〈신증동국여지승람〉

  위에서 보듯 조선시대 전기에 이 지역에서 어획된 어종의 대부분은 현재에도 잡히는 어종들이다. 조선시대의 어구는 대부분이 정치어구(定置漁具)인 통발이나 어살 등으로 회유성 고기를 잡았는데, 오늘날도 정치망이라 하여 일정범위의 지역에 그물을 펼쳐놓고 고기가 지나가면 잡는 어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그 잡는 방법은 대개 같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전기에 많이 잡힌 청어, 문어, 송어, 광어, 고도어(고등어) 등은 요즘도 지역 정치망에 잡히는 중요한 어족이다. 그러나 당시에 잡히던 대구는 현재 거의 잡히지 않고 있다. 특이한 것은 담수어인 은구어와 해수와 담수에 동시에 살 수 있는 연어와 황어, 은어 등도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내수면 어종에도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전복이나 홍합 등의 조개류와 미역, 김 등의 해조류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주요한 해산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시대 후기의 영덕지역의 수산물 종류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도 영덕과 영해지역의 해안을 끼고 있는 마을을 중심으로 어업활동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사실은 후기에 이루어진 지방토산물의 대부분이 해산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전기에 기록되어진 어종들이 그대로 나온다. 단지 청각과 삼(참)어(參魚), 그리고 물개(올눌제) 등이 새로이 추가되어 나올 뿐이다. 영해부 「읍지 사례(事例)」에 따르면 명태가 잡힌 것으로 나와 이채롭다. 수산생물 가공산품으로는 해포(蟹脯)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영덕에서 잡히는 대게를 말려서 진상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는 영덕읍 창포리를 중심으로 많은 청어가 잡혀 지방토산물로 유명하였다. 오늘날 과메기로 불리는 꽁치과메기는 사실상 청어과메기에서 시작되었다. 겨울철에 잡히는 청어를 짚으로 엮거나 나무로 눈을 꿰어 집뒷간 혹은 부엌구석 등의 응달진 곳에 걸어두고 삼한사온(三寒四溫)에 따라 얼었다 녹았다 하는 과정을 거쳐 청어 특유의 기름기가 빠진 후 담백하고 고소한 청어과메기가 만들어진다. 현재에도 창포리 중심으로 겨울 한철동안 만들어지는 청어과메기는 지역의 특산물로 원근 각지로 팔려나가고 있다. 후기에 내려와서는 고도어, 고동어(고등어)도 많이 잡혔는데, 고노(古老)들에 의하면 야간에 소형배를 타고 관솔불을 밝히고 낚시로 고등어를 낚았다고 한다. 이때 잡은 고기는 진보, 안동 등지의 상인들에게 판매를 하였는데, 하루 저녁에 낚이는 숫자가 엄청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