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강구면

▒ 강구리(江口里)

  강구리 리명(里名)의 유래는 오십천 강 어구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을 개척한 이는 지금부터 약 4백년전 안씨(安氏)와 이씨(李氏)라는 두 어부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에 대피,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盈德縣) 중남면(中南面) 지역이었으나 갑오경장(甲午更張)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현을 군(郡)으로 개칭할 때 영덕군에 속했으며 새마을이 생김에 따라 신강(新江)과 구강(舊江)으로 나누어 불렀으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강구동으로 하여 영덕면(盈德面)에 속했으며 1934년 4월 1일 강구면이 신설됨과 동시에 강구면에 속했으며 그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강구동은 강구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1, 2, 3, 4리로 분동되어 있다. 강구 1리는 일제하인 1917년 축항공사로 어선정박이 늘어나 어업전진기지로 변하자 갈대밭을 매립하여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다. 강구 2리는 일제시대에 변전소가 설치되면서 형성되어 전기회사 마을이라고도 하였다. 갈대밭을 매립한 시가지 평지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산비탈에는 한인들이 주로 살았는데, 이곳을 골마을이라고 불렀다. 강구 3리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평지가 잠식되자 한인들이 이곳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웃한 골마을과 더불어 대추나무가 많다고 하여 대추밭골이라 불렀다. 강구 4리는 강구항이 어업항으로 번창하자 새로 생긴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기동이라고도 하였다.
  강구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오포1, 2리, 소월리, 남은 오포3리, 삼사리, 북은 금진리, 금호리가 있으며 영덕읍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8km 지점에 있는 항구이다.

         

 
대추밭골 :
강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대추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이름이 붙음.
 
아릿마(下里) :
강구 아랫쪽에 있는 마을임.
 
웃마 (上里) :
강구 윗쪽에 있는 마을임.
 
전기회사 :
강구 북서쪽에 전기회사가 있은 데서 붙여진 이름임.
 
봉의재(황석산) :
강구리 뒷편에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 황석산 봉수대가 있었음.

 

▒ 오포리(烏浦里)

  오포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뒷산이 오두(烏頭 : 까마귀 머리) 형국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고려시대 때 인동장씨(仁同張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중남면 지역으로써 오개 또는 오포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신강구를 병합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강구면이 신설됨에 따라 강구면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오포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오포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
  오포리의 위치는 동은 오십천을 경계로 강구리와 마주하고 서는 화전리, 원직리, 남은 삼사리, 북은 금호리가 있다.

         

 
괘방(掛防) 마을 :
오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들이었다 한다.
 
신강구(新江口) :
괘방 동쪽에 있는 마을로 강구리 맞은편에 새로 이룩된 마을이다.

         

▒ 삼사리(三思里)

  삼사리 리명의 유래는 신라(新羅) 때 시랑(侍郞) 벼슬을 한 세 사람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세사람의 시랑들이 이 마을에 숨어 살았다 하여 삼시랑골 또는 삼시랑이라 하였다 하기도 하며, 또는 그 뒤 이 세 분을 생각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8세기경(약1300년전) 안씨(安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그 뒤 평산신씨(平山申氏)가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중남면(中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피전동(皮田洞)과 호연동(浩然洞)을 병합하여 삼사동이라 해서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강구면이 신설됨에 따라 강구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삼사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강고개(江峴), 남은 남정면 남호리, 북은 동사고개(同思峴)를 넘어 오포리와 연해 있다.

         

 
피전동(皮田洞, 稷田) :
삼사동 남동쪽에 있는 마을임.
 
호연동(浩然洞) :
삼사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임.
 
효자동(효자각 모퉁이, 돌찡이) :
삼시랑 동쪽에 있는 마을로 효자각(孝子閣)이 있는 모롱이를 돌아가면 있음. 효자각은 효자 밀양박씨 박완실의 효성을 기리고자 세운 정려각이다.
 

▒ 화전리(花田里)

  화전리 동명의 유래는 연화동(蓮花洞)의 화(花)자와 장전(長田)의 전(田)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전1리인 연화동은 19세기 전기(1830년경) 하씨(河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연꽃이 많아 연화동이라 했다 하며, 2리인 장전마을은 14세기 후반기(1370년경)에 안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계곡을 따라 밭이 길게 있다 하여 장전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중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화동, 눌미동을 병합하여 화전리라 하고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강구면이 신설됨에 따라 강구면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화전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화전리의 위치는 동은 오포리, 서남은 남정면과 경계를 이루고 북은 원직리, 상직리가 있다.

         

 
눌우미(訥宇美·訥美) :
화전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임. 약 500년전 밀양박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말못할 정도로 마을이 아름답다 하여 訥美(訥宇美)라 불렀다 함.
 
안마 :
눌미 서쪽 안에 있는 마을임.
 
양지마 :
안마 양지쪽에 있는 마을임.
 
음지마 :
안마 남쪽 음지에 있는 마을임.
 
장밭골(長田) :
화전리 북서쪽에 긴 밭이 있는 마을임.

         

▒ 상직리(上直里)

  상직리 리명(里各)의 유래는 직천(直川) 윗쪽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상직천(上直川)이라 하였다.
현재 상직1리인 상직천 마을은 약 16세기경 야성김씨(野城金氏)가 정착했다 하며 상직2리인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은 17세기경인 인조(仁祖) 연간에 박씨와 야성김씨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상직3리인 백산(배산, 배시이) 마을은 17세기 후기에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중남면(中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산동(梨山洞)과 신기(新基, 새마, 새터, 새모태), 중직(中直)을 병합하여 상직동이라 하여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강구면이 신설됨에 따라 강구면에 편입되었으며 그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상직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
  상직리의 위치는 강구면 소재지에서 약 10km 떨어진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동은 원직리와 영덕읍 남산리, 서는 달산면 대지리, 남은 화전리, 북은 영덕읍 천전리와 면 경계를 이루고 있다.

 
 
고드내(直川) :
상직리와 원직리에 걸쳐 있는 마을로써 고드내가 흐르는데 고드내 옆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고드내란 개울로서 상직리 삿갓봉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에서 곧게 흘러(直川) 원직리에서 오십천으로 들어간다.
 
배산이(배산이, 梨洞, 梨山洞) :
상직천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배나무가 많았다고 함.
 
새마(새마을, 새모태) :
상직천 남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임.
 
양지마을 :
상직천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임.
 
음지마을 :
양지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임.

         

▒ 원직리(元直里)

  원직리 이명(里各)의 유래는 고드내(直川), 으뜸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직1리는 15세기 전기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앞 냇물이 곧게 흐른다 하여 직천(直川)이라 했다 하며, 원직2리는 15세기 전기에 영천이씨(永川李氏)의 이유(李儒)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중남면(中南面) 지역으로써 고드내 아래쪽이 되므로 아릿고드내, 또는 하직천(下直川), 하직(下直)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현동(長峴洞), 외직동(外直洞)을 병합하여 하직동이라 하여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강구면이 신설됨에 따라 강구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하직리라 하였으며, 1990년 1월 3일 군조례(郡條例) 제1146호에 의해 하직리를 원직리로 개칭(改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원직리의 위치는 동은 소월리와 금호리, 서는 상직리, 남은 화전리, 북은 영덕읍 남산리가 있으나 주위에 장고개(長峴), 선병산, 노물봉, 진등잇재(鎭登) 등이 있다.

 
 
건너말 :
문방골 남쪽 개울 건너에 있는 마을임.
 
문방골(文傍谷) :
원직 남쪽에 문방우가 있는 마을임.
 
장고개(長峴) :
장고개 밑에 있는 마을임.

         

▒ 소월리(小月里)

  소월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지형이 반달같이 생겼다 하여 소월천(小月川) 또는 소월이라 하였다. 일설에는 오십천 맑은 물이 흘러 동명을 소월(素月)이라 부르다가 뒤에 소월(小月)이라 했다 한다.
  이 마을은 고려말(高麗末) 신안주씨(新安朱氏)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평산신씨(平山申氏)가 들어와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중남면(中南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자의로 통폐합 할 때 소월동이라 하여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강구면에 편입되었으며 그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소월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월리의 위치는 동은 오십천을 건너 금호평야(錦湖平野)가 펼쳐져 있고 서는 장고개(長峴) 넘어 원직리가 있고 남은 독미산(獨美山)과 선병산(仙屛山)이 감싸고 있고 북은 입내산(入來山)을 경계로 영덕읍 남산리와 접해 있다.

         

 
선병들 :
소월 남동쪽에 있는 들로 조선시대 전기에 오포수군만호영이 있었으나,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오포리로 이건하였음.

         

▒ 금호리(錦湖里)

  금호리 이명의 유래는 큰 물가(오십천)가 되므로 “거무리” “거무” 또는 검호(劍湖), 거동(巨洞), 금동(今洞)이라 하다가 금호라 하였다고 하며, 오십천이 한줄기로 합쳐지기 전에 현 금호리 앞으로 세갈래의 강줄기가 흘렀는데, 이것을 삼강이라 하였으며, 이 삼강의 물줄기가 호호대 앞에서 칼날같이 날카롭게 금호리 앞을 찔러 흐르기 때문에 검호(劒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
  현 금호1리는 16세기 중기인 조선 중종(中宗) 연간에 울진임씨(蔚珍林氏)가 이 마을에 정착했으며 그 뒤 영천이씨(永川李氏)가 입주하였으며, 금호2, 3리는 약 15세기 초인 조선 초기에 평산신씨(平山申氏)가 마을을 개척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중남면(中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금동, 하금동, 둔전, 소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호동이라 하여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강구면이 신설됨에 따라 강구면에 속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금호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
  금호리의 현 위치는 동은 금진리, 서는 원직리와 영덕읍 남산리, 남은 강구리, 북은 우곡리와 연해 있다.    

 
 
아릿거무(下錦湖 : 아릿금호) :
금호리 아랫쪽에 있는 마을임.
 
웃거무(上錦湖, 웃금호) :
금호 윗쪽에 있는 마을임.
 
주막거리 :
중금호 서쪽 길가에 있는 마을임.
 
큰 마을 (中錦湖) :
금호리에서 가장 큰 마을임.

         

▒ 하저리(下渚里)

  하저리 동명의 유래는 바닷가 백사장에 위치한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지금부터 약 6백여년전 순흥안씨(順興安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임리(林里)라고 하다가 그 뒤 기계유씨(杞溪兪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차례로 정착하여 하저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으로써 동해 바닷가의 전형적인 해안 마을로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임리(林里)를 병합하여 하저동이라 하고 오보면(烏保面)에 속했다가 1934년 강구면이 신설됨에 따라 강구면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하저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저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고불봉 고개를 넘어 영덕읍 우곡리, 남은 금진리, 북은 해안을 낀 강축도로를 따라 영덕읍 대부리가 있다.

         

 
숲밭(林里) :
하저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숲이 많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는 곳마다 웃음을 퍼뜨린 방학중(方學仲)이라는 인물이 이 마을 출신이라 한다. 8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많은 일화(逸話)를 뿌렸고 이것이 민담(民譚)이 되어 우울하다가도 방학중의 이야기만 나오면 근심 걱정이 씻은 듯 사라지고 함박웃음을 터뜨리게 한 인물이다.

         

▒ 금진리(金津里)

  금진리 리명(里各)의 유래는 나루 뒷산에서 구리쇠가 많이 났으므로 쇠날기라 하다가 변하여 쇠나리 또는 금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지금부터 약 4백년 전인 16세기 후반에 김해허씨(金海許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소하(小下) 마을은 약 3백년전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소하동을 병합, 금진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강구면이 신설됨에 따라 강구면에 속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금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금진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금진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금호리, 남은 강구리 북은 하저리가 있으며 남북으로 해안을 따라 강축(江丑)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소하동(小下洞) :
금진 남쪽에 있는 마을임.
 
아릿마 :
쇠나리 아래에 있는 마을임.
 
웃    마 :
쇠나리 위에 있는 마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