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광 업

  광업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에는 동광석을 제련하여 주석과 아연을 섞어 청동무구류를 만들었다. 청동기시대를 지나 삼한시대에 이르러서는 철기 제조업이 발달하여 철을 화폐로 사용할 정도로 발달하였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이러한 것은 더욱 발달하였으며, 특히 고려시대는에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 정도로 철공업이 발달하였으며, 화폐와 불상, 범종 등의 제작을 위하여 많은 철광산 및 구리, 기타 비철금속 광산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철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철의 수급에 대한 것도 염격하여, 국가의 필요에 따라 농민들로부터 수취하는 염철법(斂鐵法)과 관영철광업장인 철장을 두어 국가에 필요한 철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이는 철에 대한 수급을 국가의 강력한 지배독점 경영하에 두어 민간이 사사로이 개점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하겠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오면서 상업의 발달로 철의 유통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자 민간인의 채광이 일부 허용되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철의 생산 이외에도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은(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銀鑛)의 개발이 활기를 띄어 18세기 초엽에는 전국에 70개소의 은점(銀店)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은점도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었지만, 조선조 후기에 오면서부터 국가 통제하의 은점은 점차 줄어들었는데, 이 결과 18세기 말엽에는 국가 통제하의 은점은 23개소로 줄어들고, 그 대신 상인물주에 의한 사금광이 무수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개항 후에는 정부에서 부국강병을 위하여 금광의 중요성을 새로이 깨닫고 적극적으로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지만, 기술과 자금력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조선정부는 1887년의 광무국의 설치와 1895년 3월의 관제개혁시에 농상공부 내에 광산국을 설치하는 등 근대적인 광업정책을 펼쳤으며, 이에 따라 개광하는 광산의 수가 점차 늘어났으나, 제국주의를 앞세운 강대국들과 일제의 농간으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본격적인 광산의 개발은 일제시대로 넘기게 되었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광업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이다. 일제는 청일전쟁 후 끊임없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고자 노력하면서 경제적 침투를 계속하였는데, 이러한 결과 1900년대 들어와서는 광산의 이권확보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05년 통감부를 설치한 후 1906년에는 대한제국을 협박하여 광업법을 공포하여 전국 대부분의 광업권을 일본인이 확보하도록 하면서 국내 광산 개발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병탄 후에는 식민지 수탈을 위하여 전국의 광산을 개광하여 약탈하여 갔으며,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필요한 군수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무수히 많은 광산을 개발하여 약탈하여 갔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발달하기 시작한 광업은 일제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군수품의 원료로 채취하기 위하여 발달한 것으로 진정한 의미의 광업의 발달로는 보기가 힘들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광업의 발달은 광복 후 우리 손에 의하여 경제개발이 시작된 196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에 따른 에너지수요가 증대해지자 국내의 유일한 에너지 원료인 석탄광산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어 많은 석탄광산이 개발되어 필요한 에너지수요를 충족시켰다. 또한 산업화에 필요한 원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철광석 및 비철금속 광산에 대한 개발도 서둘러 다수의 광산이 개광되어 국내수요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석유와 원자력 등의 대체에너지가 석탄에너지를 대체하기 시작하자 이들 석탄광업은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철광석 이외의 기타 광업도 대부분의 원료를 외국의 수입에 의존하게 되자 점차 국내의 광업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