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우제(祈雨祭)의 유래

  기우제란 나라와 민간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제사로서 봄, 여름 농사의 절기에 한발이 심했을 때 기우(祈雨)하는 제의(祭儀)를 행하였다.
  유래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기우제에 관한 기록은 신라(新羅)시대부터 보이며 그 뒤 고려(高麗), 조선(朝鮮) 등 역대왕조가 관개(灌漑)와 아울러 기우(祈雨)의 예(禮)를 중요한 치정(治政)의 하나로 삼고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지방 관속에 이르기까지 한발 때에는 기우제를 주관 행제(行祭) 하였다. 한발이 극심하면 왕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 하늘의 벌을 받아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왕은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초가로 옮겨 거쳐를 하고 죄수를 석방하였다.
  이것은 비 내리기를 기원하고 가뭄으로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는 종묘 사직과 4대문, 그리고 오룡제(五龍祭)를 동서남북 4교(四郊)와 종각 앞에 거행하였으며 또 한강변에서도 지냈다.
  민간에서는 산이나 냇가에 제단을 만들고 그 일대를 신역(神域)으로 정하고 마을 공동으로 기우제를 행사하였으며 또 시장을 옮기기도 하였다.
  기우제의 제신은 천신(天神), 지기(地祇), 명산대천신, 풍우뇌우신(風雨雷雨神), 성황신, 토지신, 산신(山神), 동신(洞神), 용신(龍神), 수신(水神) 등이다.

 
 

2. 기우제(祈雨祭)의 형태(形態)

▒ 산천기우(山川祈雨)

  산 정상 강 또는 내, 못(池), 보(洑) 등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고, 마을 공동으로 가뭄 때마다 지내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관(官)에서 주관할 경우는 수령(守令)이 제관이 되었으며, 민제(民祭)의 경우는 생기복덕(生氣福德)한 사람이 선출되어 제주(祭主)가 되었으며, 제물(祭物)과 제순(祭順)은 산신제(山神祭)에 준했으며 대부분 축문(祝文)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고 지어서 독축(讀祝)을 하나 민제(民祭)에서는 읽지 않는 수도 있으며 이 제(祭)는 주로 천신(天神)과 용신(龍神)에게 기원하는 것이다.

▒ 동물공희기우(動物供犧祈雨)

  천신(天神)이 하강(下降)하는 곳이나 용신(龍神)과 수신(水神)이 거처하는 신성(神聖)한 곳인 산상(山上) 기우제장(祈雨祭場)이나 강 깊은 못 또는 늪 등에 소, 돼지, 개의 머리 등 가장 불결한 짐승들의 피(血)를 뿌리거나 시체를 던져서 신(神)들의 노여움을 사게하고 그 노여움이 비를 뿌리게 하는 득죄함우(得罪含雨) 형태인 곧 부정기우(不淨祈雨)가 있었다.

▒ 세기기우(洗箕祈雨)

  급수기우(汲水祈雨), 국수기우(水祈雨)라고도 하는데 옛날부터 가물 때 키를 씻으면 이에 응하여 비가 온다. 한즉세기유응(旱則洗箕有應)인 데서 비롯된 기우 방법이다. 농가에서 사용하는 키(箕)는 부정 (不淨)한 것이 많이 붙어 있으므로 이것을 강이나 못 또는 내(川)에 씻으면 용신이나 수신이 노하여 비를 내린다는 것인데 이것은 부인들만이 하며 냇가에 나가 물을 떠 올려 뿌리며 비요! 비요! 하며 외친다. 여자들만이 하는 것은 여자가 음(陰)이므로 운우(雲雨)를 불러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현벙기우(懸甁祈雨)

  가뭄이 계속되면 집집마다 병(甁)에 물을 넣고 버드나무 가지로 마개를 해서 꺼꾸로 메달아 놓으면 가지와 잎을 따라 물방울이 떨어진다.
이렇게 물이 떨어지듯 비가 오도록 비는 것이다. 또 버들가지나 솔잎을 물에 적셔서 추녀 끝에 달기도 하였으며 냇가 모래를 두둑하게 쌓고 거기에 버들가지를 꽂아 물을 뿌려 비가 오도록 빌기도 하였다.

▒ 쇄시기우(屍祈雨)

  신성(神聖)한 영지(靈地), 즉 칠보산 용제(龍祭)의 경우, 그 터 등에 무덤을 쓰면 부정(不淨)하게 되어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어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파내어 이를 정화(淨化)하고 다시 그 시체를 묻지 않고 땅에 굴려 버림으로써 부정하게 하면 신(神)이 노(怒)하여 비를 뿌려 정화한다는 것으로 주술적(呪術的) 기우(祈雨)이다. 가뭄이 심할 경우 누가 무덤을 쓰지 않았나 하여 병곡(柄谷), 창수(蒼水) 면민들이 수시로 용제터에 가서 돌아보기도 하였다.

 
 

3. 영덕(盈德)의 기우제(祈雨祭)

  한발이 심하면 영덕에도 각 마을마다 기우제를 지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칠보산(七寶山, 騰雲山), 산정(山頂), 하단(下端)에 용제터(龍祭址)가 있다. 주위에는 암석이 병풍처럼 둘러있어 천연제단(天然祭壇)을 이루고 있다. 가뭄이 극심하면 이 산 아래 있는 동민들은(병곡,창수) 닭이나 돼지머리, 술, 과실, 떡, 포 등을 준비하여 용제터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이 신성한 터에 투장(偸葬)을 하였는가 살피기도 하였으며, 만약 투장을 했을 경우 시신을 파내어 땅에 굴려 버린다고 한다.
  영덕읍 노물리(老勿里)의 경우 가뭄이 심하면 천제산(天祭山)에 차일(遮日)을 치고 기우제를 지냈는데 7개 마을이 합동으로 한 사람씩 부정이 없는 사람을 제관으로 뽑았다. 제(祭)를 지낸 뒤 생닭을 잡아서 피를 뿌렸다.
  그 밖에 영덕읍 창포리(菖浦里)에서는 바다 가운데 있는 소라암(素螺岩)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강구면 화전리(花田里)에서는 마을 북쪽에 있는 두리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불을 놓았으며, 상직리(上直里)에서는 무제바위에 기우제를 지냈으며, 남정면 우곡리(羽谷里)에서는 서구바위에 모닥불을 피우고 기우제를 지냈으며, 달산면 흥기리(興基里)에서는 마을 앞 돌구소 옆 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지품면 용덕리 마을 앞산에서도 정상에 불을 피우며, 연기를 내어 비를 비는 기우제를 지냈으며, 축산면 상원리(上元里)에서는 고래산(鯨山)에 기우제단(祈雨祭壇)을 마련하고 가뭄이 극심하면 영해부사(寧海府使)가 이곳에 나와 제(祭)를 지냈으며, 영덕 화림산(花林山)에도 기우단(祈雨壇)을 설치하고 제(祭)를 지냈으며, 용평리(龍坪里) 정산(鼎山)에서도 기우제를 지냈으며, 창수면 오촌리(梧村里)에서는 아랫들 보(洑)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가뭄이 극심하면 칠보산 용제터에서 제(祭)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영해면 성내리(城內里)에서는 장시(場市)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 열기도 하는 등 이 밖에도 군내 여러 마을에서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다.